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26)
레필리아 레소드-227화(226/398)
레필리아 레소드 227화
광검(2)
에레사의 말에 리에르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또래 중에서도 유난히도 예뻤던 에레사.
리에르는 그녀에게 관심 있는 짓궂은 악동들을 전부 내쫓았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만이 그녀를 괴롭히는 특권을 누렸었다.
“생각해 보니 보고 싶다. 이미 다 돌아가셨겠지만.”
기지개를 켜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에레사의 모습, 그것을 눈으로 좇으며 리에르는 굳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안색이 좋지 않은 리에르를 보면서 에레사는 왜 그러냐는 듯 눈웃음을 쳤다.
“이제 슬슬 자러 가자.”
“어……. 그, 그래야지.”
익숙하지 않았던 평화가 오래전부터 입었던 옷처럼 잘 들어맞았다.
까마득하게 잊어먹었던 사실 하나.
자신은 적혈의 악마였다. 그리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인 놈이다.
그 호칭을 얻게 된 최초의 사건 이야기가 나오자 리에르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일행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 찾아왔다. 에레사, 유이, 멜런은 한방에서 자게 되었고, 리에르와 레온은 서로 한 침대에서 눕게 되었다.
여성들의 머릿수가 세 명이었기 때문에 이층 침대가 있는 곳은 그녀들의 차지가 되었고, 서로 간의 불협화음을 일으킬 수 있는 남남 커플은 한 이불을 덮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여성이 아니라서 아쉬우십니까?”
“아니, 너라는 게 불만이야.”
“리에르 경, 제가 선배이고 당신은 후배입니다. 또한, 제가 연상이고 당신은 연하입니다.”
레온은 확실하게 상하 관계를 지키자는 의미에서 단단하게 못 박아 두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쉽사리 들을 리에르는 아니었다.
“몰라, 그딴 거. 그냥 공식 석상에서는 존칭 써주지.”
“일단 피곤하니 그 정도로만 해두죠.”
레온은 피곤이 몰려오는지 거슴츠레한 눈을 힘겹게 뜨며 자리에 먼저 누웠다. 리에르는 어쩔 수 없이 레온과 함께 침대로 향했고 왠지 모를 찜찜함이 느껴졌다.
노숙할 때는 배고픈 짐승이나 탐욕에 눈먼 몬스터의 공격이 있다. 때문에 불침번을 서는 것은 필수였다.
마을에서 자게 되면 편안한 잠자리는 둘째 치고 안전하게 잘 수 있다.
레온은 다른 면에선 철두철미한 부분을 보였지만 유독 밤에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밤이 아니다. 그는 졸음을 참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한때는 나도 그랬지.’
리에르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잠이 많았었다. 눕기만 하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겨웠다.
하지만 지금의 리에르는 거의 혼자서 불침번을 섰다. 깊이 잠들 수 없었고, 무슨 일이든 인기척이 들리면 바로 반응한다.
또한, 아르카가 적을 탐지하면 시끄럽게 울어댄다. 그러니 문제는 없었다.
‘이런 마을에서 놈들이 공격해 올 리는 없을 테고.’
장미 기사들이 앙갚음하기 위해서 공격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루나레이크의 여제, 베로니카를 만나기 이전의 이야기였다.
인재에 대한 욕심이 많은 그녀라면, 확실한 대답을 듣지 않는 이상 공격을 지시할 리가 없었다.
물론 장미 기사단 쪽에서 우발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었지만, 한 국가의 기사단이 명령을 어겨가면서 싸움을 할 정도로 결속이 엉망은 아니었다.
일단은 수면을 취해도 이상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리에르는 눈을 감아 내렸다.
「아서라, 네 녀석이 어설프게 건드린 덕에 녀석들도 자존심이 상해서 더 심하게 구는 거니까.」
오랜 세월, 많은 경험을 나타내는 지표처럼 보이는 주름들. 나이 든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는 것이 떠올랐다.
리에르가 처음 검을 들었던 것은 아버지와 형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장난삼아 형과 대결을 했고, 그 결과 머리에 커다란 혹을 달게 된 적이 있다.
파에트는 우는 리에르를 달래느라 고생했었다.
유트와 검술을 수련하였고, 카이샤에 진학하기 위해서 되지도 않는 능력으로 검술 대회까지 나갔다. 그곳에서 우승하면서 승리의 기쁨을 처음으로 만끽하게 되었다.
그것도 아주 잠시. 평화는 금방 깨졌다.
잠재되어 있던 사악한 힘이 폭주했다.
폭룡 네버 에이지의 부하들이 습격해 마을을 학살하고 다녔다. 그 사건 이후 아르미안과 교단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여러 훈련을 받았고,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인격체가 되었다.
싸워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아무것도 없는 무의식 속에서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그 당시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고 베고, 또 베었다.
싸우는 이유?
처음에는 형과 아버지에 대한 동경으로.
그다음에는 에레사와 같은 카이샤에 진학하기 위해서.
교단의 살인하는 인형이 되어 명령에 따라 움직였었기 때문에.
교단과 적대하며 복수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에게 적대하는 존재를 굴복시켜야 한다.
그동안의 경험을 생각한다면 너무도 당연한 진리였다.
하나, 결과는 항상 좋지 않다.
그저 폭력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피해가 생길 뿐이다.
오늘의 마을도 그랬고, 앞으로 자신과 연결된 모든 것도 마찬가지다.
리에르가 상념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워 있던 리에르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레온의 코골이가 다시 한번 드르럭, 하며 거친 소리를 뿜어냈다.
리에르는 짜증보다도 먼저 드는 생각이 있었다.
‘저게 사람의 몸에서 날 수 있는 소리야?’
리에르는 레온에게 왠지 모를 경외감마저 생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뽀드득, 뿌드득거리는 귓가를 찢어내는 소음이 들려왔다.
레온은 연신 코를 골면서 이를 갈아 대고 있었다.
두 개의 소음이 서로 하모니가 되어 방을 점거해 나섰다. 리에르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대로 물러나면 안 됩니다. Master는 더 강력한 소음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합니다.
“아니…… 딱히 저건 자신 없거든.”
-잠자리를 빼앗긴 수컷은 암컷도 빼앗기게 마련입니다. Master는 왜 그 법칙을 모릅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르카의 독려를 무시한 채로 리에르는 의자에 걸어두었던 제복을 걸쳐 입었다. 그러곤 유이에게 선물 받은 검은색 머플러까지 목에 두르며 밖으로 나왔다.
새벽에 가까워진 모두가 잠든 밤은 제법 날씨가 쌀쌀해서 하얀 입김이 뱉어진다. 페리안의 매서운 추위에는 비할 바는 아니지만, 체온을 빼앗기기엔 좋은 날씨였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니 목에 감겨 있는 따뜻한 온기가 고맙게 느껴졌다.
능숙하지도 않으면서 딴에는 힘들게 만들었을 물건이다.
손을 들어 머플러를 어루만지며 리에르는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가보실까.”
-이 야밤에 어디로 가는 겁니다. 드디어 발정이 찾아온 것으로 의심해도 되겠습니다.
“넌 대체 왜 모든 것이 다 그쪽으로 통하는 거냐?”
-혼자만 착한 아이인 척하지 않습니다.
불순한 생각만 가득해 보이는 자신의 검을 바라보며 리에르는 인상을 찌푸려 보였다.
“너 사실은 예전에 사람이었던 것 맞지? 원래 검도 아닌 거지? 너도 뭐 봉인되어 어쩌고저쩌고한 거 아냐? 갑자기 사람으로 변해서 뒤통수치는 스타일 같은데 말이야.”
-쓸데없는 질문입니다. 아르카 System은 최적화된 Interface로 구동되고 있을 뿐, 불필요한 System은 갖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만 묻자. 너 대체 누가 만든 거냐?”
새삼스러운 질문이기는 했지만,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동안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었으니까.
-아르카 System은 다른 차원의 Mechanism 혁신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아르카가 하는 말들은 대다수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다.
이번에도 리에르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저으며 포기하고 만다.
사람들이 잠든 마을은 조용했다. 날씨가 쌀쌀해서 그런지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Master에게 묻습니다. 이 앞으로 가면 숲 지대밖에 없습니다만, 무슨 용도로 가는 겁니다.
“고철, 주변에 있는 디에고 둥지를 탐색해 봐.”
숲이 주는 혜택으로 인간이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면, 유통과 상업은 발달할 수 없었다.
지금 리에르가 있는 마을이 숲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포악한 디에고 무리가 숲에 둥지를 트고 있기 때문이다.
맹수는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하지 않지만, 디에고라는 몬스터는 본능처럼 생명체를 공격했다.
-이 야밤에 무슨 목적입니다.
“찾으라면 찾아.”
-Navigation Program 작동합니다.
평소에 시끄럽게 굴어서 그렇지, 아르카는 여러 가지로 쓸모가 많았다.
보통 때는 검이 아닌 다른 형태가 되어 무기를 숨길 수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결계나 버프와 같은 편리한 기능도 있었다.
덕분에 리에르는 은근히 아르카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았다.
-직진입니다.
웬일인지 아르카는 고분고분 리에르의 말을 듣고서 안내를 시작하였다.
-전방에 과속 방지 나무뿌리가 있습니다.
음산하게 울어대는 새소리와 아르카의 안내 멘트만 들려왔다. 시커먼 손을 내밀어 하늘을 가린 나무들 때문에 그나마 주변을 밝혀주는 달빛도 보이질 않는다.
사각사각 밟히는 나뭇잎 소리. 갑자기 풀을 짓밟고 지나가는 리에르 덕분에 깜짝 놀라 도망친 풀벌레들이 찌르르 성을 낸다.
-Master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는 행위로 파악됩니다. 행동의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뭐가?”
리에르의 시큰둥한 목소리를 듣고서 아르카는 웅웅거리는 검은 진동을 일으키며 재차 물었다.
-디에고는 숲에서만 사는 Monster입니다. 디에고는 Master에게 해를 주지 않는데 일부러 찾아가는 행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르카는 정말로 알 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검 주제에 비아냥거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리에르는 잠시 고민해야 했다. 그러고는 나지막하게 입가를 열어 보였다.
“풀죽밖에 못 먹었더니 배고파서 과일이라도 따 먹으려고 그런다.”
아르카는 리에르의 말을 듣고서 단 답하였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넌 아무것도 안 먹으니 배고픔을 모르지? 야, 풀죽 조금 먹고서 싸움까지 했는데 이 덩치에 배가 안 고프겠어? 가뜩이나 잠도 못 자는데 옆에선 코까지 골아대고 말이지.”
-그렇다고 합니다.
“너 어째 말투가 점점 건방져진다?”
말로는 마스터, 마스터. 말하는 내용은 하나같이 시건방지기 짝이 없다.
리에르는 아르카를 숲에다 던져 버리고 돌아가 버릴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
아르카가 웅웅, 진동을 울리면서 말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Navigation을 종료합니다.
우거진 수풀과 하늘을 온통 감싸 안을 만큼 자라난 나무들 덕분에 주변이 시커멓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노란 눈망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코가 썩는 듯한 역겨운 냄새가 느껴져 온다.
아르카는 천천히 큐브 형태로 모습이 바뀌더니 롱소드가 되었다. 리에르는 지그시 감아 내렸던 눈을 열어 보였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 안으로 팔다리가 두 쌍씩 달린 커다란 도마뱀이 목을 뒤틀면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