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27)
레필리아 레소드-228화(227/398)
레필리아 레소드 228화
광검(3)
“정말로 자네 혼자서 그놈들을 토벌했단 말인가?”
기운 없고 노쇠한 촌장의 얼굴은 언제 침울했냐는 듯이 얼굴이 활짝 폈다.
요즈음 우울한 일만 가득했던 마을이다.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모여서 리에르가 가지고 온 전리품(?)을 구경했다.
몇몇 아이들은 이렇게 많은 과일은 처음 본다며 눈을 반짝거렸다.
체면 때문에 집어먹지 못하는 어른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사과를 집어서 소매로 쓱쓱 닦았다.
몇 번 문질렀을 뿐인데도 윤기가 흘러나오는 사과를 보고서 아이들은 입맛을 다셨다.
아삭!
아이들이 크게 사과 한 입을 베어 물었다. 달았다. 지독하게도 달았다. 아이들의 눈동자에 저마다 화색이 돋아났다.
그 모습을 보며 어른들도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체면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다.
먹을 것은 과일뿐만이 아니었다. 리에르는 사슴도 한 마리 잡아 왔다.
사슴을 보고 사람들은 저마다 침샘이 고장 난 것처럼 침을 흘렸다.
그동안은 숲을 장악하고 있던 몬스터 때문에 이런 것은 구경도 못 했다.
비싼 세금과 막혀 버린 상업.
유일한 타개책은 숲이지만, 숲에 자리 잡은 몬스터 무리는 위협적이었다.
무기는 없고, 훈련도 받지 못한 힘없는 서민이 몬스터를 토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별것 아니란 식으로 리에르는 말하면서 촌장에게 사과 한 알을 건넸다.
엉겁결에 촌장이 사과를 받았다.
리에르는 닦아서 한 입 깨물어 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잠시 망설이던 촌장이 소매 끝으로 사과를 닦은 후 사과의 과즙을 즐기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달군.”
“내일부턴 숲을 이용하는 데 문제가 없을 거예요. 안에 들어가 보니 그동안 사람 손이 닿지 않아서 먹을 것이 천지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리에르도 껍질 사과라 불리는 녀석을 집어 들고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껍질을 벗겨낸 리에르가 속 안의 알갱이를 입안에 넣었다.
구경만 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리에르가 피식, 웃는다.
그는 주민들에게 과일을 하나씩 던져 보였다. 다들 엉겁결에 손안에 먹을 것을 쥐게 되었다.
“저녁엔 바비큐 파티나 하면 되겠네.”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리에르는 촌장의 의자에 앉았다. 오랜만에 신선한 과일을 보는 마을 사람들이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운다. 그러곤 더 이상 권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나씩 집고서 먹어댔다.
‘암, 먹어야지. 저거 들고 오느라 어깨 빠지는 줄 알았는데.’
몬스터를 해치우는 것은 일도 아니다. 문제는 그 이후다. 과일과 사슴을 운반하기 위해서 리에르는 적어도 세 번은 산을 오르락내리락한 것 같았다.
촌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른입을 열어 보인다.
“왜 도와주는 겐가?”
“밤중에 배가 고파서 참을 수가 있어야죠.”
리에르가 픽, 웃으면서 손안에 남은 껍질 사과를 입안에 다 털어 넣었다.
촌장은 대가 없이 선의를 베푸는 리에르의 어색함을 보면서 너털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제 본의 아니게 마을에 피해를 준 것에 대한 그 나름의 보상이라 생각하는 것이 옳았다.
무엇보다 리에르가 쑥스러운지 고맙다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 했다.
촌장은 간단하게 인사치레하였다.
“잘 먹겠네.”
“별말씀을.”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리에르가 촌장의 말을 받는다. 오랜만에 배불리 먹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 뒤로, 여제의 기사단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리에르에게 공격받은 기사들은 의외로 가벼운 상처였기 때문에 대다수 이상 없이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사람들이 떼 지어 모인 것을 구경하던 장미 기사들은 리에르와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리에르는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마차에 오르는 여왕을 보았다.
밝은 대낮에 보니 더욱 농염해 보이는 얼굴이고, 제법 풍만함이 있는 몸매였다. 몇몇 마을 사람들은 오르지 못할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마침 리에르와 시선이 마주쳤는지 요염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의 의미를 잘 아는지라 리에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볍게 목 인사를 건넸다.
어차피 그들은 리에르가 쉽게 오지는 않을 것을 알았다. 시간 여유는 충분했다.
괜히 자극을 해봤자 반발만 일으킨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혀로 축였다. 정말로 갖고 싶은 물건일수록 더 정성을 들여야 했다.
그녀는 자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모아온 수집품 중에 가장 뛰어난 물건이 되리란 것을.
“저쪽의 사람들이 네게 관심이 많은 것 같네?”
언제 곁으로 다가왔는지 에레사가 리에르의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치맛단을 정리하며 의자에 앉은 에레사가 리에르를 향해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그럴지도.”
“어제 저 사람들과 무슨 말을 한 거야?”
무슨 대화를 했기에 갑자기 호의적으로 대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들의 개가 되어달라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리에르는 조소했다.
에레사는 그의 차가운 얼굴을 보면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얼굴은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인데, 시니컬한 음성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기야, 지금 리엘은 강하니까.”
에레사는 리에르의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잔잔하게 웃음 지었다.
“잠이 안 와서 혼자 몸으로 몬스터를 쫓아낼 정도니.”
에레사의 말에 리에르는 흥,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저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을 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돕기 위해서가 아닌, 마을에 피해 입힌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난 그저 심심해서…….”
“어머, 아무리 심심해도 잠도 안 자고 마을을 위해서 그럴 리는 없잖아.”
리에르의 시야 안으로 에레사의 생긋 웃는 얼굴이 보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누구나 그녀를 만나면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릴 것이 분명했다.
“아, 맞다. 원래 선잠밖에 못 자니까 괜찮았으려나.”
자신의 무릎을 가슴께로 끌어안으며 에레사가 즐거운 듯이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리에르와 대화하면서 밝은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음성은 무미건조했다.
그는 그것을 느끼고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페이서스의 비극 이후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몸이 되었으니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리에르의 목소리. 그것을 듣고서 에레사는 고운 입술을 자신도 모르게 깨물고 말았다.
직접 말하진 않지만 알 수 있었다. 가끔가다가 에레사에게 보여주었던 리에르의 처연한 눈빛. 이제야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역시나.’
에레사는 비참함을 느꼈다.
자신에게 함께 살자고 말해왔다.
솔직히 기뻤다. 하지만 곧바로 그녀의 마음에는 차가운 비가 내렸다. 그가 자신과 함께 살자고 말한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에게 싸구려 죗값을 하기 위해서였다.
정말로 사랑해서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해왔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그랬다면 에레사는 평생 리에르만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었다. 부모님에게는 죄송하지만, 리에르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이 더럽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리에르의 마음을 깨닫고 나서 에레사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소리 없이 우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서 같이 살자고 한 거야?”
방금까지만 해도 발랄하게 들려왔던 에레사의 목소리가 이제야 간헐적으로 떨려온다.
아니라고 말해도 그녀는 믿지 못한다.
리에르도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응.”
“그래.”
리에르의 대답을 듣고 에레사의 눈이 점차 식어갔다.
그 어떠한 핑계도 없었고, 변명조차 없었다.
에레사는 속 안에서 끊어 오르는 무언가를 느낀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떨려왔다.
그녀의 귓가로 리에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
“그게 다니?”
에레사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귀 끝으로 전해지는 리에르의 허스키한 저음이 평소에는 듣기 좋았으나, 오늘은 비열함을 극대화시켜 주는 것처럼 들린다.
“미안해. 난…….”
“닥쳐, 리에르 아르빈트.”
지독한 모멸감. 찢어진 마음처럼 지독한 고통과 상념들이 에레사를 들쑤셨다. 리에르는 괴로운 얼굴로 시선을 내려뜨렸다.
악몽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날의 기억.
아니, 악몽이길 원했고 사실이 아니길 원했던 그날의 절망.
그동안 고민했고, 괴로움을 느껴왔지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의 죄를 어떻게 청산해야 할지 찾아낼 수 없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여성이 사랑스러운 눈빛 대신에 표독스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본다.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더 두려운 것은 그녀의 고통을 자신이 닦아줄 수 없다는 것이다.
“잘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시치미 뚝 떼고 계셨어?”
에레사의 냉랭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현실 같은 망상. 그저 믿지 않으려 했던 안일한 진실이.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시야를 떨구고, 고개를 숙였다.
정면으로 그녀의 질타를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에레사는 품 안에 숨겨두었던 단검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손가락 끝은 여전히 떨려왔지만, 이상하게 망설여지지는 않았다.
리에르의 귓가에 스릉, 하는 서슬 퍼런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리에르는 말없이 입술을 다물었다.
에레사의 차가운 손길이 리에르의 왼쪽 소매를 붙잡았다. 그녀는 들고 있던 단검을 입에 물고서 그의 소매를 접어 올렸다.
드러난 팔뚝은 시커멓게 부어 있었다.
에레사는 그 상처를 보고 살짝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고는 입에 문 단검을 고쳐 잡았다.
“왼쪽 손의 균형이 안 맞는 것 같더라.”
“몰랐네.”
몰랐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에레사는 따지고 들지 않았다.
그녀는 단검을 들어 독에 감염된 상처를 살짝 찢었다.
부어오른 상처 속에서 시커먼 핏물이 기다렸다는 듯이 빠져나왔다.
에레사는 썩은 피를 입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깜짝 놀라서 그녀를 만류할 시간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서 핏물을 뱉어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리에르의 상처 핏물을 빨아들였다.
알싸한 통증이 조금씩 느껴진다. 마비되었던 감각이 아주 미세하게 돌아온다.
입술을 떼어낸 에레사의 입에 검붉은 핏물이 묻어 나왔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리에르의 상처를 묶었다. 아직 말라붙지 않은 피가 손수건을 적신다.
“그냥 내버려 둬도…….”
“넌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네가 만든 죗값을 갚기 위해서는 이딴 상처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돼.”
에레사의 차가운 눈동자. 그것을 보면서 리에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장에라도 눈가가 적셔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애써 이를 사리물며 꾹 참는다.
단 한 순간도 자신이 만들어낸 참담한 비극에서 눈을 돌리면 안 된다.
리에르는 에레사의 말을 그렇게 알아들었다.
에레사는 에레사대로 참을 수 없이 가슴이 답답했다.
심약하기만 했던 리에르가 적혈의 악마로서 얼마나 괴로웠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유일한 보금자리로서 그를 위로하고, 보듬어 주고 싶었다.
부모님의 원수.
하지만 더욱 괴롭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리에르는 다른 여성에게 시선이 향하고 있다. 지금도 그가 다른 여성을 품에 안고 있던 광경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역겨웠다.
원수라는 단어를 핑계 삼아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더러운 질투에 사로잡혀 그를 옭아매려 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행복했던 시절을 공유하는 단 하나의 남자. 항상 고개를 돌리면 옆에 있는 것이 당연했던 사람.
“리에르.”
괴로운 표정을 짓는 리에르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다.
“네가 죗값을 치르는 것은.”
차라리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어버리고 싶었다.
“자살 따위로도 안 돼.”
자신만 바라보라고, 예전처럼 그 한결같은 눈동자로 바라봐 주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의 리에르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지독한 연민과 죄책감이다.
사랑은 단 한 톨도 남지 않은 것처럼.
“싸우고, 또 싸워.”
검붉은 핏물을 입가에서 지워내면서 에레사는 눈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풀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것을 억지로 밀어내고, 다시 밀어낸다.
“부서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