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28)
레필리아 레소드-229화(228/398)
레필리아 레소드 229화
광검(4)
대륙에서 가장 짧은 역사를 가진 왕국.
신생왕국 페리안은 무법천지였던 주변을 하나로 군집시켰다.
아버지 지크의 뒤를 이은 유트가 베리타스로 등극하면서 새로운 강국의 탄생을 알렸다.
하지만 아직 단단하지 못한 주춧돌은 무엇을 올려놓든 불안했다. 젊은 영웅왕에 대한 시기가 이곳저곳에서 모여들었다.
“엠블 기어 용병단이 집결했습니다.”
“각하의 군대가 언제든 적을 찢을 준비를 마쳤습니다.”
기사와 병사들의 보고를 받는 사람은 짧은 턱수염을 가진 중년의 남성이었다.
무표정한 얼굴과 근엄함은 귀족의 상징과도 같았다.
페리안의 이인자, 하르츠 후작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엘이 리즈와 함께 성을 나선 지 반나절이 지났습니다.”
“근위 기사 프세와 텟사 역시 국경선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확실했고, 모든 준비가 착착 끝나가고 있었다.
유트 페브리안.
지크 왕의 피를 이은 단 하나의 아들이자, 불과 몇 년 만에 패왕이 되어가는 청년.
싸우기만 하면 연전연승에 백성들을 사랑하는 그는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우선적으로 실현했다.
덕분에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
유트의 선정(善政)은 곧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은 사람을 끌어모았다.
넓디넓은 대륙의 끝과 끝에서 페리안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거대한 왕국의 꿈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반대로 귀족들의 반발은 심해졌다. 그들은 가지고 있던 권력과 재산으로도 충분히 농노를 부릴 수 있었고, 잘살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귀족들이 자신들의 왕을 만들려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로 전쟁으로 하루라도 편한 나날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힘이 약하면 더 강한 쪽에게 잡아먹히고 가진 것을 모두 빼앗겨 버리게 된다.
두 번째로 더 많은 재산과 부를 원했다.
그러므로 왕을 만든다. 왕에게 투자하게 되면 되돌아오는 권력과 부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킹 메이커만큼 이익이 남는 장사는 없다.
왕은 신세를 진 공신들을 무시하지 못하고, 공신들은 대대손손 호의호식하니까.
하지만 귀족들의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졌다.
페리안의 왕은 서민 위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점점 긁어내기 시작했다.
결국, 귀족들이 들고일어났다. 그리고 이들은 하르츠 후작에게로 모여들었다.
“왕성에는 유트 녀석 하나밖에 없습니다. 리즈나 근위 기사들이 돌아오기 전에 빨리 해치우죠.”
귀족들은 평소에 기름진 배가 잘 보이는 복장이었지만, 오늘은 당장 검투 시합이라도 하듯이 갑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부족한 운동량 덕분에 갑옷을 입고 몇 걸음 이상 걷는 것은 어려웠다. 때문에 하인이 이들을 옮기는 데 고생해야만 했다.
‘유트 왕, 넌 스스로를 너무 과신했다.’
전장의 기운이 일렁거리는 군대의 지휘부. 그곳의 장으로서 모든 권력을 통치하게 된 하르츠 후작은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벌써 유트 왕과 재회한 지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처음 지크 페브리안에 매료되어 그의 충신으로서 살아왔던 날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어린 유트를 만났을 때를 아직도 기억했다.
한눈에 보아도 총명해 보이는 눈망울, 그리고 유모를 고생시키지 않던 의젓한 아기.
그 아기는 빠른 세월 속에서 성장하고, 아기에서 아이로 자라날 때 특유의 총명함으로 모든 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랬던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재앙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하나뿐인 여동생과 불길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아 다시 이곳에 왔다.
하르츠 후작은 지크 페브리안의 오른팔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즉, 제일가는 충신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이면이 있었다. 그는 유일하게 왕을 배신하고 교단을 끌어들인 장본인이었다.
그가 배신했던 이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항상 자신을 신임했던 지크 왕. 하지만 그는 너무나 뛰어난 인물이었다. 자신의 능력은 그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점점 하르츠 후작이 할 수 있는 것은 줄어들었다.
자신은 뛰어난 인재지만, 지크의 앞에서는 그저 보잘것없는 촌부에 불과했다.
하르츠 후작은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지크 왕만 없다면.
하르츠 후작은 그가 없다면 능히 북을 다스리는 지배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크 페브리안 못지않은 뛰어난 왕으로서.
지크 왕은 죽었다. 그리고 하르츠 후작은 흩어진 힘을 주워 담았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지 못했다. 하르츠 후작은 용맹했지만, 지크 왕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또다시 그는 지크와 비교당하면서 왕국을 차지하는 데 실패했다. 그렇게 페리안은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하르츠 후작은 직접 왕이 되려고 했다. 그는 흩어진 영주들을 설득하거나 힘으로 굴복시켰다. 북방 대륙에서 가장 강한 영주가 되었지만, 왕이 되지는 못했다.
그때 유트 페브리안이 돌아왔다. 하르츠 후작은 생각을 달리했다. 왕이 될 수 없다면, 최고의 권력을 차지하기로.
거기에 유트의 여동생, 유이와 아들 레온을 결혼시킨다면 최고의 조합이었다.
하르츠 후작은 유트와 함께 온 남자가 이상하게 불쾌했다. 말투는 조곤조곤하고 얌전해 보이지만, 불타는 듯한 머리카락과 차가운 눈동자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다.
붉은 머리칼의 남자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박학다식한 그는 유트를 보좌했고, 왕으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유트 역시 스펀지처럼 착실하게 흡수했다.
하지만 변수가 생기기 시작했다.
유트는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 귀족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누구 덕에 호의호식했는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트의 친구인 리에르가 근위 기사가 되었고, 유이 공주와 핑크빛 스캔들까지 퍼졌다.
상식적이라면 자신에게 이래서는 안 된다.
하르츠 후작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 아니, 차라리 이것이 옳았을지도 몰랐다. 그의 선택을지지하며 모여든 귀족들이 주변에 산재했다.
“은발 애송이를 무릎 꿇리겠소.”
되도록 자기 아들 레온과 함께 왕족으로 사는 삶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려워졌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직접 왕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나 레인 폴 하르츠는 고귀한 여러분들의 힘으로 봉기할 것을 선언하오! 우리의 숭고한 싸움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눈부시게 수 놓일 것이오!”
주변에 모인 귀족들, 그리고 개인 사병들의 기다림을 알기에 하르츠 후작은 당당하게 왕과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새로운 귀족들의 왕이 될 남자의 선언과 함께 삼백 명으로 구성된 군대가 왕실을 향해 진격했다.
거침없는 진군으로 수풀은 밟히고 밟혀서 더는 허리도 펼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사방에 흙먼지가 잔뜩 피어올랐다. 마치 군기를 흩날리듯이.
이 용감한 진군의 앞에는 무한한 영광만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 수도와 멀리 떨어진 한적한 숲.
그곳에는 엘과 리즈가 같이 걷고 있었다.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나무들의 순을 흔들리게 한다. 점점 붉어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엘 파실드는 흩날리는 백발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슬슬 시작인가.”
엘은 잔잔하게 웃음 지어 보였다. 리즈는 의아한 듯이 그에게 물었다.
“뭐가 시작한다는 거죠?”
냉정해 보였던 리즈는 의외로 정에 약했다.
엘이 유트를 제거하기 위해서 움직일 때도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엘은 궁금했다. 지금 유트에게 반역을 하려는 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안다면 리즈가 어떻게 할지.
그것에 대한 답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리즈 지센라이드는 유트를 구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리즈, 할 말이 있습니다.”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을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겨우 이런 일 때문에 리즈와 같은 친구를 잃을 수는 없었다.
“오늘 좀 이상하네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저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도 궁금하고요.”
“실은 유트 왕을 제거하기 위해 하르츠 후작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페리안의 왕이 바뀌어 있을 겁니다.”
엘의 말에 리즈는 아무런 표정 없이 서 있었다. 그러더니 붉은 입술을 열면서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일에 가담한 겁니까, 엘?”
“네, 유트 페브리안을 죽이기 위해서.”
리즈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짚어 보였다. 그러곤 이내 진홍으로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엘과 함께한 지 오래되었지만,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유트를 제거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았다.
신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교단이라는 군대를 무너뜨릴 필요가 있다.
아무리 포스가 강력한 존재라곤 하나, 일개 단신으로 군대와 싸워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포스의 마력들도 한계점은 있었고, 칼에 맞으면 살갗이 베이고, 상처를 입으면 똑같이 피가 나온다.
먹고 마시고 자는 것. 그 무엇도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몸이다. 즉, 단신으로 신을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트 페브리안의 존재를 너무 가볍게 본 것이 제 실수입니다.”
엘은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리에르는 유트의 안위를 생각하며 활동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제약이 생기게 되죠.”
승리하기 위한 싸움이 아닌,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가 없다. 이미 엘이 실패해 봤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엘은 눈을 들어 리즈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보인다. 이미 리즈도 유트 남매에게 정을 주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평생을 외롭게 살아왔고, 배신을 당했었다. 그런 존재에게 가족처럼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 나약함이 싫지는 않지만, 좋지도 않다.
“유트는 페리안이라는 무력 집단을 형성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은 건가요?”
“네, 아주 훌륭한 도구죠.”
“기억한다니 다행입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이제 퇴장을 할 때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왜죠? 그는 무대 위에 설 배우로서 충분합니다.”
“너무 충분하죠. 주연마저도 밑으로 밀어버릴 만큼.”
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세상이 혼탁해지면 사람들은 영웅을 기대한다. 그리고 유트는 그런 영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 엘이 원하는 그림은 따로 있었다.
유트에게는 베리타스의 힘이 있다. 그 힘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베리타스의 힘을 가진 이는 엘의 힘에 저항할 수가 있다. 그는 그것이 불편했다.
리즈는 차갑게 냉소하였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엘은 그의 냉담한 반응에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 싸워서라도 관철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저를 이해해 주세요.”
엘은 자기 생각을 알아주지 않는 리즈에게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가 긍정적으로 받아주지 않아도 별수 없다.
리즈의 루비빛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조금 전만 해도 살기등등했던 그의 눈동자가, 이제는 불쌍한 사람을 보는 듯 처연하게 바뀐다.
“당신이 테헤라자드와 다른 게 뭡니까?”
리즈의 말에 엘은 할 말을 잃었다.
“자기 뜻에 조종당하지 않는 인형을 부숴 버리겠다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 아닐까요?”
“뭐라고요?”
“엘, 우리는 장난감이 아니라 우리 계획의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애초에 리에르 군을 손에 넣기 위해 당신이 했던 거짓말들은 뭐라고 설명할 겁니까?”
일렁이는 붉은 기운들. 리즈의 분노를 나타내고 있었다.
엘 파실드는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리에르 아르빈트가 페이서스에서 에레사 레이나드의 부모를 죽였다. 그렇게 위장해서 두 사람을 이간질 한 당신의 거짓을, 리에르 아르빈트에게 안주할 땅을 주지 않아서 신과의 싸움을 유도하는 당신의 오만을 뭐라고 설명할 겁니까?”
엘 파실드는 리즈의 호통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신과의 싸움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야 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 여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이 리에르에게는 최고의 행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신을 사냥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잠시간의 행복을 위해서 모든 이를 파멸로 돌릴 수는 없었다.
“당신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리에르 아르빈트마저도 자신의 인형으로 삼고 있습니다. 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남의 운명을 조종하는 엘 파실드, 그리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타인의 운명을 농락하는 테헤라자드. 두 존재가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미치광이를 죽이기 위해선 저 역시 악마가 되겠습니다. 그것이 백 년 전의 제 결단입니다.”
지그시 내리감았던 눈을 뜨며 엘 파실드가 리즈의 얼굴을 직시했다.
유유히 웃고만 있던 리즈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분노로 인해 일그러져 있었다.
엘 파실드는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스로,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학살자로 알려진 리즈도 겨우 이 정도일 뿐이었다.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리즈. 당장에 유트를 구하러 간다면 목숨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죠.”
엘은 그렇게 말하며 처연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적어도 제 목을 취해야 할 겁니다.”
엘 파실드가 서 있는 흙바닥에서 백색의 빛이 꿈틀거린다.
찬란한 순백과 음울한 적색이 서로 파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유트 군을 구하러 가는 문제는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리즈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그와 동시에 리즈가 있던 숲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그는 천천히 자신이 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그 순간 엘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유트…… 페브리안……!”
저녁노을을 등지고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을 빛내는 미청년이 맑은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