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29)
레필리아 레소드-230화(229/398)
레필리아 레소드 230화
광검(5)
수도의 성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서는 하르츠 군대는 말 그대로 거침이 없었다.
갑자기 수백의 군대가 평온했던 수도를 덮치자 시민들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하르츠 후작의 군대는 어차피 왕의 권좌를 탈환하러 가는 길이었기에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자신들의 목표인 왕성을 향해 전진, 또 전진했다.
드디어 신생왕국의 왕좌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르츠 후작을 위시한 무장 귀족들은 오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평소 자주 들락날락했던 성이었지만 주인을 찾아가는 것과 자리를 빼앗기 위해서 찾아가는 건 남다른 쾌락과 성취감을 일깨웠다.
이제 그 얄미운 애송이 왕에게 어리석음을 일깨워 줘야 했다.
복수의 시간이 다가왔다.
무장한 귀족들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홍조를 띄우면서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뭔가 이상하다.’
하르츠 후작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리 그가 오랫동안 전장을 떠나 있었다지만, 그동안의 숙련된 경험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왕성에 있는 병사들은 고작 백 여 명에 불과하다. 기습하면 무조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작 백 여명에 불과하지만, 이미 반란군이 수도에 왔다는 사실을 유트가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반응이 없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소?”
“무엇이 말입니까, 폐하. 껄껄껄.”
“왕성이 너무 조용하오.”
“껄껄, 전부 도망가지 않았겠습니까?”
“바지는 챙겨 입고 갔어야 했을 텐데 걱정입니다. 하하하.”
이미 승리에 취해 버린 귀족들은 하르츠 후작의 말을 장난스럽게 받아들였다.
“후작 각하, 안에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내성을 지키는 위병이 보이질 않자, 몇몇 군병들이 조심스럽게 왕성을 수색하고 보고했다.
“이미 소문을 듣고 은발 애송이가 도망을 쳤나 보오!”
귀족들은 싸워보기도 전에 승전했다는 착각 속에 빠져 그렇게 외쳐 보였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도 조심스럽게 웃었다. 조금 전만 해도 반란을 한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반란에 성공하면 일개 병사들에게도 어마어마한 보상이 주어진다. 말 그대로 로또였다. 그것도 당첨될 것이 거의 확실한.
“이대로 수도를 빠져나간다.”
하르츠 후작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군대에 명령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후작의 명령에 귀족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설명을 요구하였다.
바로 눈앞에 왕좌가 있다. 도주한 유트 페브리안을 붙잡기만 하면 끝나는 이야기였다.
후작은 귀족들에게 설명해 주는 대신에 군대를 재빨리 통솔하면서 회군을 명령하기 시작했다.
등골의 오싹한 기분,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냉랭하게 얼어붙는 오싹함.
‘이건 함정이다.’
어디에서 자신의 음모가 들통난 것일까?
어디서부터 귀족들의 움직임을 포착했을까?
아무리 왕성의 사람들이 도주했다 하여도, 이렇게 개미 새끼 한 마리보이지 않을 정도로 휑한 것은 수상하다.
위기를 느낀 하르츠 후작과는 달리 귀족들은 상황 판단을 못 하고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였다. 천지가 울리는 듯한 구령, 그리고 저녁노을을 가르며 휘날리는 은기사의 깃발이 보였다.
시가지의 시민들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자신들의 집으로 대피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희희낙락했던 귀족들의 기름진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빈틈없는 포위진으로 천천히 옭매며 다가오는 군대 선두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근위 기사인 테스타롯사와 프세가 있었다.
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은 얼마 전, 유트의 군사가 된 빅스터 나이브만이었다.
하르츠 후작은 가슴 한구석이 철렁했다. 하마터면 제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릴 뻔했다. 다른 귀족들은 더했다. 이미 주저앉은 사람도 있었고, 사시나무처럼 떠는 자도 있었다.
하르츠 후작과 각 귀족의 용병 기사들은 나름대로 실력도 있고, 이름도 알려진 자들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기사들은 페리안 최강의 정예다. 그 강력한 교단의 군대도 박살 낸.
* * *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있나요?”
반란군이 큰 위기에 봉착한 시각, 왕성에서 떨어진 숲에서는 엘 파실드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항상 온화한 얼굴로 위장하고 있던 엘이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는 걸 보고 리즈는 웃음이 나왔다.
“천하의 엘도 놀라긴 놀랐나 봅니다.”
리즈의 웃음기 섞인 말에 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려 보였다.
“하르츠 후작은…….”
유트는 한 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엘 파실드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 아버지, 지크 페브리안을 배신한 장본인입니다.”
유트의 맑은 눈가가 다시 열어졌다. 그의 눈동자는 에메랄드빛 대신에 찬란한 금빛 이채를 띠고 있었다.
“진실의 눈동자(Eye of Truth)…….”
엘 파실드는 황금빛 눈동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트 군은 처음부터 하르츠 후작을 믿지 않았습니다.”
엘이 다시 한번 놀라는 것을 보고 리즈는 웃음기를 거두지 않으며 말했다.
“이미 반역을 할 거라고 예상, 아니, 오히려 독려했죠. 미끼를 문 잡어를 그물로 건져보니 생각지도 못한 대어가 같이 있더군요.”
“내통자가 있었군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엘 파실드마저도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이런 거로 발목이 잡힐 거로 생각지도 못했다.
“궁금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엘은 자신의 계략이 수포가 된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어째서 원수를 지금껏 내버려 뒀나요? 아니, 왜 가장 먼저 하르츠 후작을 찾아갔나요?”
엘의 물음에 유트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래야 그자의 경계심을 풀 수 있을 테니깐요.”
그 가정이 가져다주는 해답은 너무나 당연했다.
만약 유트가 하르츠가 아닌, 다른 자의 도움으로 성장을 시작했다면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주인을 배반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복수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라도 유트를 망가뜨리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트는 오히려 원수의 품으로 찾아 들어가 그를 신뢰하는 연기를 선보였다.
젊은 나이에 믿어지지 않을 대담함과 판단력.
과연 천하의 학살자, 리즈 지센라이드를 끌어당기고, 많은 인재를 포용하는 인재다웠다.
“또 하나의 궁금증은…….”
엘 파실드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리즈는 경계하는 빛을 지우지 않은 채, 유트의 곁을 지켰다.
“기껏 위기를 피했다면 제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하지 않나요?”
엘 파실드의 등 뒤로 순백의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녁노을을 갈라 버리고 주변의 소음마저 절단시키는 순백의 찬란한 휘광. 그것이 날개 형태를 취하자 나무와 숲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엘 파실드의 포스가 폭발하기 시작하자 리즈 역시 차가운 눈으로 핏빛의 날개를 펼쳐 들었다.
순백과 핏빛의 기류들이 어지럽게 서로를 휘감기 시작한다.
날카로운 살기가 허공을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죄 없는 동물들만 우수수 소리 내며 도망쳤다.
빛의 깃털들이 자욱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유트는 리즈의 앞에 나섰다. 숨 막히는 살기로 인해 일반인들은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다.
하지만 유트는 아무런 중압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위험합니다, 유트.”
유트는 리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엘은 자신을 직시하는 유트를 보고서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당신을 죽여야 하는 이유를 말하죠.”
유트는 오히려 엘을 위협했다.
“당신은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제 친구의 운명을 농락했습니다. 당신이 날 죽여야 하는 이유는 뭡니까?”
유트의 얼굴이 괴로운 듯이 일그러졌다.
지금쯤 에레사는 리에르를 원망하고, 리에르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두려움을 모르는 것처럼 유트는 한 걸음, 한 걸음 살기의 파동을 뚫고서 걸어 나갔다.
“당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라는 이유 말고, 정당한 이유를 대보세요.”
엘 파실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유트는 손만 뻗으면 당장 유트의 목을 꺾을 수 있었다. 그것을 상대도 모르지는 않을 터다.
“연옥에서 올라온 심정을 당신이 알 리가 없죠.”
“틀렸어. 날 죽여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해.”
엘 파실드의 말을 끊어먹고서 유트는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유트. 제가 하는 일은 결국 이 세상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테헤라자드에게 패배한 이유가 뭔가요?”
생각지 못한 유트의 지적에 엘 파실드는 움찔하였다.
“제힘이 미약했던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더욱더…….”
“미치광이라 해도 신은 신이니, 이길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겠죠. 하지만 이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능일 줄 알았던 신조차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미쳐 버리니까요.”
엘 파실드 스스로도 아는지 모르지만, 유트에 대한 살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모든 것에 대한 진실을 알 권리를 가지는 눈동자 때문일까?
엘은 유트를 죽여야 한다는 관점에서 벗어나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엘, 당신은 혼자의 몸으로 싸웠습니다. 그 결과가 가져다준 것은 패배. 그리고 수없이 많은 인류가 떼죽음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졌죠.”
“듣고 싶지 않습니다.”
매일 밤 계속되는 악몽. 바로 옆에 있던 소중한 친구도, 가족도, 연인도 모두가 죽은 자로 탈바꿈하는 고통. 연옥의 바닥에서 썩은 시체의 살을 씹어 먹으며 기어 올라왔던 기억은 죽음보다 더 괴로웠다.
“당신은 자신만이 옳고, 자신만이 다 안다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엘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것을 혼자 하려고 했었다.
“난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내 친구를 위해서, 그리고 당신들을 위해서 교단을 부수겠습니다.”
핏빛 융단이 드리워진 왕궁을 빠져나오면서 수차례 다짐했던 복수. 그것을 다시 한번 되씹으며 유트는 굳은 결의로 엘을 직시하였다.
“당신은 뭘 하겠습니까?”
유트의 물음에 엘의 표정이 서서히 풀려 갔다. 이윽고 여유로운 얼굴로 부드럽게 입가에 미소를 그린 엘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갑자기 웃기 시작하는 엘 파실드를 보면서 유트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온화한 음성이 그의 귓가 안으로 들어온다.
“저보고 리즈처럼 소꿉놀이라도 하라는 건가요, 유트 페브리안?”
엘 파실드의 부드러운 눈동자는 웃음을 지었다.
“저는 지난 신과의 대전에서 패했습니다.”
엘 파실드는 로브의 후드를 짚어 이마 언저리까지 썼다.
“그로 인해 저는 교리를 따르는 이들을 상대로 포스를 사용할 수 없는 저주에 걸렸지요.”
순백의 기운이 주위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엘의 눈동자에 강력한 마력들이 서리기 시작했다.
“묻겠습니다. 당신들에게는 신의 교리가 깃들어 있나요?”
엘의 로브가 마나의 기류에 펄럭이기 시작했다. 순백의 마나 깃털은 사방을 몰아치며 리즈와 유트를 압박했다.
리즈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강력한 마력 압박으로 숨을 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즈의 붉은 날개가 펼쳐지며 순백의 기류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엘의 눈동자는 슬픈 듯이 흐려졌다.
“리즈. 결국, 우리는 이렇게 적이 되는 건가요?”
“아쉽군요, 엘. 다시 말하지만 나는 당신의 손가락 따위가 아닙니다.”
엘은 리즈의 붉은색이 점차 잿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아무 색도 가지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엘의 눈동자는 차갑게 변해갔다.
색을 띠지 못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두 포스의 기운이 서로 맞부딪쳤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유트였다.
“당신이 사람을 장기 말로 생각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엘의 차가운 눈동자가 유트를 향했다.
“하지만 그 이유 따위는 굳이 궁금하지 않군요. 어차피 한심한 이유일 테니.”
엘 파실드의 등 뒤에서 순백의 섬광이 일직선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정확히 유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리즈는 허공에 손가락을 튕겨냈다.
핏물로 이루어진 창날이 엘의 광선과 부딪치며 허공에 빛의 가루를 뿌려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