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30)
레필리아 레소드-231화(230/398)
레필리아 레소드 231화
광검(6)
펑! 쾅!
엘의 빛줄기는 몇 차례 더 날아들었으나 번번이 리즈의 핏빛 창에 산화되었다. 그사이 유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엘 당신이 원하는 것은 군대. 그리고 제가 원하는 것은 교단과 싸워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눌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히 엘과 리즈가 싸우는 것은 서로에게 이득 될 것이 전혀 없었다. 엘의 등 뒤에서 네다섯 발의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리즈 역시 한 번에 다섯 발의 창을 쏟아내 포스를 요격하고 있었다.
“확실히.”
엘은 유트의 말을 듣고 잔잔하게 웃어 보였다.
“저는 당신들을 그저 부서지기 쉬운 장난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엘이 입을 벌려 온화하게 속삭였다. 말을 하는 그 순간에도 등 뒤로 순백의 광선들을 수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리즈는 그의 공격들을 전부 산화시키기 위해 붉은 마력들을 끌어모아 요격시켰다.
사방에서 붉고 하얀 마력들이 터지며 빛 가루를 흩날렸다.
“그 말인즉슨 굳이 당신들의 존재가 없어도 된다는 의미겠죠.”
순백의 엘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유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금빛 이채를 뿌리는 그의 눈동자 안으로 엘의 진실이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아무리 베리타스의 힘을 지니고 있어도 포스를 완벽하게 읽어내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유트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의 뜻과 다르면 무조건 적이다. 그 의미군요.”
“그렇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대의를 위한 희생은 필수 불가결하니까요.”
유트의 말에 엘은 부드럽게 답변했다.
“인형만을 원한다면 별수 없군요.”
유트는 한숨을 쉬어 보였다.
그는 엘이 두려웠다. 온화하게 미소를 짓고 있지만, 사실 먹이를 유혹하는 것에 불과하다. 믿을 수 없는 살기가 몸에 내리꽂히는 기분이었다. 진실을 꿰뚫는 힘을 가지고 있기에 상대방의 살기가 진짜라는 것도 느껴졌다.
만약에 엘과 손을 잡는다면 거대한 교단을 쓰러뜨리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은 공동의 적을 두고 있지만, 서로 원하는 것이 다르다. 엘은 인형을 원했고, 유트는 동반자를 원했다.
유트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한쪽 날만 벼려진 매끄러운 검날은 달마저 베어버릴 것같이 아름다웠다. 엘은 유트가 뽑아 든 도신을 보고서 눈이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투 헤븐(Two Heaven)인가요?”
엘과 리즈 사이에 쏟아지던 백색과 적색의 섬광들은 점점 숫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리즈는 요염해 보이는 붉은 미소를 머금으며 엘에게 속삭였다.
“장난감이라 해도 의지를 가지면 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장난감이 장난감을 갖고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요, 리즈.”
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뒤편으로 공간이 전이되며 광활한 빛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발할라의 나선창.”
엘 파실드의 중얼거림과 함께 거대한 나선의 빛이 유트에게 쏘아졌다. 리즈는 가볍게 손을 들어 붉은 창들을 결집하여 그것을 쳐냈다.
다시 한번 백과 적의 교차점에서 빛의 파편들이 쏟아졌다. 빛의 풍진 속에서 유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유트의 오른팔이 찢겨 나갔다. 피비린내를 풍기며 떨어져 나간 팔은 무기를 놓지 않았다.
“과연 아리아의 5대 무구로군요. 제 마법을 베다니. 하지만 그 대가가 크군요.”
엘이 자조적으로 웃어 보인다. 유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저에게 거짓은 통하지 않습니다.”
유트가 눈을 뜨자 거짓된 환상이 전부 거품처럼 사라졌다. 잘려 나갔던 팔은 어느새 온전히 붙어 있었다.
아무리 강한 존재라 해도 포스의 마력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유트의 무기는 그것이 가능했다.
투 헤븐. 두 자루의 도가 한 쌍인 무기로 인류 최초의 영웅 아리아가 소유했던 5대 무구 중 하나였다.
투 헤븐의 전 주인은 지크 페브리안이었다.
잠들어 있던 유물을 구해 리즈가 유트에게 선물한 물건이었다.
전설의 무기니 노리는 사람은 많았다. 물론 웬만한 인물은 사용할 수도 없는 무기였다.
유트는 타고난 재능과 혈통으로 무기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아리아 시리즈는 애초에 다른 차원의 무구라는 것을.”
엘 파실드의 뒤편에 서린 백색 마력들은 나선을 그리며 꿈틀거렸다. 하지만 엘은 다짜고짜 공격부터 퍼붓지는 않았다.
“테헤라자드에게 유일하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리아 시리즈뿐이죠.”
이 대륙의 모든 속성과 권한을 만들어낸 창조주는 테헤라자드였다. 즉, 대륙에서 만들어진 것은 창조주에게 피해를 주지 못한다. 예외가 있다면 다른 세계에서 만들어진 물건과 인간이었다.
“아리아의 5대 무구를 다룰 수 있는 인물은 많지 않아요. 교단과 적대하는 무구 사용자, 더군다나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인물은 희박하지요.”
“그건 사실입니다.”
엘은 리즈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다만 엘에게 있어서 스스로 움직이는 장기 말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유일한 희망을 꺼뜨리는 인물이라면.’
엘은 미래를 볼 수 있다. 그는 머지않은 미래에 대해 자각몽을 꾸었다.
리에르 아르빈트의 날개가 꺾였다. 그리고 그의 심장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칼날을 보았다.
완벽한 죽음이었다.
리에르 아르빈트의 강력한 힘은 흩어지고, 눈의 초점이 빛을 잃었다.
유트와 리에르.
두 존재는 같이 있으면 안 된다.
엘의 눈동자에 고민의 흔적이 서리기 시작했다. 아리아의 무구를 사용하는 패왕의 후손. 이것은 너무나 매력적인 카드였다.
* * *
황성으로 가는 장미 기사단, 그리고 그들이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루나레이크 여제.
기사단은 밤을 맞이하여 막사를 건설하고 있었다.
풀벌레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울창한 숲에서 공사가 한창이었다.
여제의 기품에 어울리는 막사를 짓기 위해서였다. 기사들의 불편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막사의 겉면을 동물의 털가죽으로 감싸고, 바닥은 부드럽도록 단상을 깔았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은 침실을 달콤하게 만들었다.
“내일이면 우리 귀염둥이 황제 폐하도 만나 뵙겠구나.”
막사를 건설하고 있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여제는 기분 좋은 듯이 콧소리를 내보였다.
“폐하, 황공하오나 아르빈트가의 청년을 그렇게 두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베로니카의 충성스러운 오른팔이자, 장미 기사단의 실력가인 라헬이 입을 열었다.
요염한 콧소리를 내보이며 베로니카는 충성과 연모로 뒤섞인 라헬의 눈을 바라봤다.
“영웅 놀이를 하는 것이 참으로 귀엽잖으냐.”
자신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마을을 위해서, 단지 감성적인 이유로 힘을 사용하는 아이라면 손에 넣을 방법은 차고도 넘쳤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페리안에서 리에르를 내치도록 만드는 것이다.
리에르는 페리안의 근위 기사이다. 그런 그가 사실은 적혈의 악마라는 사실이 퍼진다면 곤란해진다.
그렇게 되면 유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리에르를 추방하는 것.
아직 정치적으로 단합되지 못한 페리안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리에르를 손에 넣든 못 넣든, 베로니카가 손해 보는 것은 없다.
전자는 인재를 얻어 좋고, 후자는 라이벌 국가를 약화시킬 수 있어 좋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대륙 오대 강국이라 불리는 루나레이크의 여왕, 황제의 권력조차 능가하는 시대의 여걸에게 칼을 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끄아아악!”
귓가를 찢어내는 듯한 비명. 그것은 분명 죽음을 부르는 서곡이었다.
갑작스러운 장미 기사단의 괴성에 소란스러움이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베로니카는 놀라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라헬도 베로니카에게 직접 하사받은 클레이모어를 꺼내 들었다.
등골의 오싹함. 지독한 살기의 냄새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라헬은 마차를 지키는 정예 기사들에게 손짓하며 경계를 강화할 것을 명령했다.
다시 한번 끊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어진 괴성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렸다.
“대, 대체 무슨 일이냐!”
베로니카가 당황한 듯이 라헬을 향하여 물었을 때, 사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헬은 숲에서 하나둘씩 보이는 시뻘건 안광들을 보며 두꺼운 입술을 비죽여 보였다.
“늑대입니다.”
베로니카는 라헬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늑대의 움직임이 날래고 포악하다 해도 장미 기사들이 이토록 힘없이 당할 리는 없다.
더더군다나 늑대가 무장한 기사들에게 덤빈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무언가 또 다른 것이 있다!’
진한 어둠이 드리우는 숲에 번뜩이는 붉은 안광들. 포악하게 어금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소리 속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라헬은 반사적으로 그 무언가를 향하여 양손으로 클레이모어를 휘둘렀다.
채앵!
철의 굉음. 한순간 번뜩이는 불티 속에 시커먼 무언가가 어둠에 녹아 침입하는 것이 보였다.
“네놈은!”
검은 구름을 서서히 몰아내는 차가운 밤바람. 광기가 물든 듯한 어스름한 달빛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칠흑의 머리카락.
잘생긴 청년의 눈가가 마치 짐승의 것처럼 붉게 안광을 뿌려내는 것을 보고 라헬은 등골이 오싹해져 왔다.
“감히!”
라헬은 상대의 무모함에 격노했다. 그는 청년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청년은 상대의 공격을 받아넘기며 뒤로 한두 걸음 물러난다.
청년의 목에 감긴 머플러가 칠흑의 허공에서 나풀거린다. 그는 차가운 비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 라헬의 눈동자에 광기가 감돌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여왕을 단신으로 습격하는 이는 있을 수 없었다.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것이냐!”
격노하는 라헬의 물음에 청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차를 지키는 정예 기사 몇이 대장을 지원하기 위에서 창을 쥐고서 달려들었다.
검은 청년은 어스름한 달빛을 유영하듯이 풀밭을 미끄러지며 움직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빠르고 매끄러워,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낸다.
츄악.
정예 장미 기사들은 제대로 창질조차 못 하고서 검은 청년에게 베여나갔다.
이번에는 지난밤과는 다르게 부상 정도로 그치지 않는 검격이다. 명백한 살의를 가지고 휘두르는 광검을 보고 라헬은 이를 악물었다.
그가 든 클레이모어가 번뜩인다.
다시 한번 시커먼 검광과 바람을 찢어내는 검과 검의 불똥이 튀어 오른다.
“으아아아악!”
“라, 라헬!”
라헬이 비명을 토해내며 땅바닥을 뒹구는 걸 보고 베로니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마차에서 튀어나왔다.
라헬이 패하는 것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녀가 꼽을 수 있는 가장 강한 남자인 그가 손이 사라진 양쪽 손목으로 핏물을 토해낸다.
아직도 혈관이 뛰는 라헬의 두툼한 손은 클레이모어를 꼭 쥐고 있었다. 그것을 짓밟은 검은 청년의 붉은 안광이 베로니카에게 향했다.
“너, 너는……!”
베로니카는 그제야 검은 청년의 정체를 파악하고 붉은 입술을 파르르 떨려왔다.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굉장히 극단적인 선택을 해온 검은 청년이었다.
리에르 아르빈트가 차가운 공기 속에서 칠흑의 머플러를 흩날리며 앞으로, 또 앞으로 걸어 나왔다.
베로니카의 뒤편으론 늑대들에게 잡아먹히는 장미 가사들의 비명이 전주곡으로 울려 퍼졌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하는 베로니카를 지키기 위해서 정예 기사들이 공포를 이겨내며 떨리는 발을 진격시켰다.
서걱.
기사들이 뻗어내는 창을 피해낸 칠흑의 검광이 아름답게 선호를 그린다.
서걱, 서걱.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광기의 달이 세상을 향하여 장막을 쳤다.
베로니카의 얼굴을 향하여 기사들의 진득하고 뜨거운 선혈이 튀었다.
생명의 온기를 담고 있던 그 체액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 내리는 것을 느끼며 베로니카는 현실이란 것을 인식해야만 했다.
검은 장막이 다시 걷히며 어느새 눈앞에 서 있는 리에르의 붉은 안광이 코앞에서 보였다.
베로니카는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열어냈다.
“자, 잠깐만…… 우리 다시 이야기를…….”
푸걱!
베로니카는 가슴팍에서 뚫고 들어오는 고통을 느끼며 헉, 하는 비명을 토해냈다. 타는 듯한 뜨거움이 느껴지자 주변의 사물들이 빠르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쿵!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뒤늦게 깨닫고 있는 베로니카의 몸에서 칠흑의 검이 뽑힌다.
리에르는 차갑고 냉랭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의 내 평화를 막으면 그 누구라도 용서 못 해.”
여제의 옷가지로 아르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리에르는 붉은 안광을 뿌리는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이제 잦아들기 시작하는 비명은 이곳에 남아 있는 생명이 없어졌단 것을 의미했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에 힘을 주면서 억지로 독하게 말하는 에레사의 원망에 찬 얼굴이 떠오른다.
“그 누구라도.”
더 이상 살아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서 리에르는 다시 한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