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31)
레필리아 레소드-232화(231/398)
레필리아 레소드 232화
악연(1)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나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세계. 거대한 석벽으로 이루어진 도시. 기괴한 차림새를 한 사람들의 홍수. 차가운 철의 매듭으로 만들어진 갑옷 이음새 사이로 보이는 탐욕들.
마치 중세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전쟁터의 한복판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눈앞에 서 있는 금발의 소녀와 마주했다.
마치 요정같이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윤기 흐르는 입술을 미소 짓듯이 열었다.
“당신은 나쁜 사람인가요?”
순진무구해 보이는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묻는 그녀의 말.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잠시 할 말을 잃어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에메랄드를 닮은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청년은 떨려오는 입가를 열며 대답하였다.
“아, 아니요…….”
“그럴 줄 알았어요.”
마치 봄 햇살을 맞은 꽃봉오리처럼 활짝 웃음을 꽃피우는 금발의 소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불만스러운 얼굴의 은빛 머리카락의 기사.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이 다르고, 세계가 달랐다.
처음 만나게 된 금발의 소녀 디아나와 은발의 기사 길트는 현우에게 버팀목이 되었다.
그리고 시작된 싸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저주받은 운명과 싸우기 시작한 현우는 안일한 생각 끝에 패배하였다. 그러고는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었다.
세상을 뒤엎을 수 있을 강력한 힘, 그리고 항상 곁에서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동료들.
전설의 대마법사라는 칭호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현우, 아니, 엘 파실드는 복수만을 위해서 생을 허락받게 되었다.
그에게 남은 이성은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탈색되어 버린 머리카락만큼이나 남은 게 없어졌다.
마지막 싸움.
엘은 이기든 지든 최후의 싸움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절대로 패배할 수 없었기에 모든 것을 걸었다.
현우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을 적, 너무도 사랑하고, 너무나 아꼈던 소녀를 떠올린다. 햇살처럼 맑은 웃음이 바로 어제 봤던 것처럼 눈에 선했다.
이제는 단절되어 없어졌으리라 생각되었던 베리타스의 피는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눈앞의 청년에게 그녀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엘 파실드는 혼자 남았다. 이미 유트와 리즈는 또 다른 전장으로 향했다.
그 어떤 마법도 자유자재로 다루고, 마나의 축복을 받은 전설의 대마법사.
‘나는 아직도 각오가 부족한 것인가.’
엘은 그렇게 혼잣말을 읊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각몽에서 보았던 리에르의 죽음.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유트를 죽여야 했다. 하지만 그를 죽일 수 없었다. 예전에 만났던 베리타스의 공주와 닮은 얼굴이었다. 자꾸만 독하게 마음을 먹어도 한편으로는 흔들렸다.
‘아직도 마음이 남아 있는가.’
어리석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악마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손에는 혈흔이 묻어 있었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엘프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죄가 없었다. 하지만 신을 쓰러뜨리기 위한 첫 단추였다.
신이 만들어 놓은 법칙은 파훼한다.
이 조건에 부합되는 것은 소수민족인 엘프였다. 천 년 이상을 사는 그들을 죽임으로써 이 세상은 법칙이 무너진다. 무너진 법칙은 테헤라자드를 끌어내릴 유일한 실마리였다.
죽이고, 죽였다. 눈을 내리감으면 언제라도 살육의 현장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미 말라서 없어진 줄 알았던 눈물이 맺혀졌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지금의 테헤라자드는 ‘절대’가 아니었다.
유트를 죽이고 싶었지만, 죽일 수 없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보면 마음이 흔들린다. 무엇보다도 리즈와 적대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을 리에르가 알게 되면 리에르와도 적대할 수밖에 없다.
엘이 사람을 장기 말로 보게 된 이유는 테헤라자드에게 있었다.
엘은 이계에서 넘어온 청년이었다. 그리고 신의 유희를 위해, 유일하게 신을 죽일 수 있는 포스가 되어야만 했다. 처음에 그가 각성한 계기는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마지막에 배신을 당했고 인간은 약하디약한 존재였다.
엘이 너무나 사랑했던 그녀는 눈앞에서 찢겨 죽었다. 엘은 그녀를 지킬 수 없었다. 슬픔으로 오열할 때 테헤라자드는 엘을 위로했다. 그러곤 엘이 사랑하던 여성을 다시 복원시켜 주었다. 엘의 동공이 흔들렸다. 또다시 그녀는 엘의 눈앞에서 산산이 조각났다.
테헤라자드는 엘을 위로했다. 그래서 사랑하던 그녀를 다시 퍼즐 맞추듯이 맞춰서 살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찢어발겨 죽였다.
여러 차례 반복되자 엘의 오열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흘릴 수 있을 눈물이 남지 않아서 일수도 있었다.
자신의 연인이 테헤라자드에게 죽을 때 몇 조각으로 찢기는지 셀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테헤라자드는 웃으면서 말했다.
“흰둥이는 각오가 부족해.”
테헤라자드는 오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오크에게 엘이 사랑했던 여성의 성격을 주입했다. 그리고 아까의 일을 반복했다.
사랑했던 그녀는 죽었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다시 부활하면 어김없이 엘의 품을 파고들며 사랑을 속삭였다.
어떤 때는 짐승으로, 또 어떤 때는 같은 동성으로, 또 어떨 때는 몬스터의 모습이었다.
엘의 눈가는 천천히 메말라갔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테헤라자드가 살아 있는 한은 인간은 그저 혼을 넣은 장난감일 뿐이다.’
엘은 테헤라자드를 죽이고, 자신이 신이 되길 원했다. 오만한 유일신을 죽이기 위해 스스로 오만해지는 오류를 범하면서.
엘은 결국 한발 물러섰다. 물론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옛 추억을 떠올리며 그녀의 후손을 잠시 지켜보기로 하였다.
베리타스의 혈족, 페브리안가(家)를.
* * *
싸우기도 전에 패색이 짙은 하르츠 후작과 귀족들은 성 바깥으로 보이는 포위망을 보고 두려운 눈을 굴려대고 있었다.
이미 일은 저질렀고, 도망칠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수도 바깥에 진을 치고 있던 하르츠군은 전부 투항하였습니다. 또한, 내성 안에 시위하고 있는 반역자들의 수는 이백여 명 정도 될 듯합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한 시간 안으로 진압 가능합니다, 전하.”
빅스터는 은발의 왕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보고를 올렸다. 유트는 침착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어 올려 성을 바라보았다.
“수고하셨습니다, 군사.”
유트의 치하에 빅스터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유트의 명실상부한 오른팔이자 페리안의 재상인 리즈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이제 어찌하시렵니까, 전하.”
“주인이 돌아왔음을 알려야죠.”
유트의 간단명료한 말에 리즈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리즈는 기품 있는 걸음으로 전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긴 검지를 들어 올렸다.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룬어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 음률과 동시에 손은 음악을 지휘하듯이 허공을 갈랐다.
[왕에게 예를 갖추라.]리즈의 가벼운 마법 덕분에 성내에 있는 하르츠 군대는 두려움이 커졌다.
저절로 타들어 가듯이 수 놓이는 붉은 글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이 저리게 만들었다.
[무기를 내려라.]인제 와서 누구를 원망한들, 소용은 없었다.
반역자라는 꼬리표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앗아갈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귀족들은 앞이 깜깜해졌다.
하르츠 후작은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부하들을 보면서 굳게 입을 다물었다.
왕성을 점령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성 내부에는 이미 모든 사람이 피신을 끝낸 상태였다. 그러니 수성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애초에 수성전은 불가능하다.
누가 뭐라 해도 은기사단은 유트와 함께 정복 전쟁을 해왔던 정예였다. 그런 은기사단과 비교하자면 귀족들의 사병들은 병아리에 불과했다.
개개인의 능력은 전쟁에서 큰 의미가 없으나, 병사 하나하나가 경험을 쌓은 군대는 위력이 다르다.
같은 편일 때의 은기사단은 든든했다. 하지만 지금의 귀족들에게는 은기사단이 사신으로 보였다.
귀족들의 겁먹은 눈동자는 하르츠에게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다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있지만, 한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유트 왕에게 항복하고 조금이라도 죄를 감면받는 것.
왕성 안에 있는 귀족들의 사병은 불과 백 명에 불과했고, 이들마저 승산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걸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사병이라는 것은 충성보다는 목숨과 돈이 중요한 법이기에.
그들은 이미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하르츠 후작은 지그시 눈을 떴다.
[무릎을 꿇어라.]세 번째 글귀가 허공에 떠올랐다. 이미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반란군들은 글자를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후작 각하…….”
하르츠의 곁을 지키고 있는 몇몇 귀족들은 탄식하듯이 마른 입술을 열어 보였다.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리더인 그가 어떠한 행동과 말조차 하지 않는 것이 불안했다.
그들은 현 사태를 타개할 방법을 하르츠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비록 하르츠 후작이 아니라 그 누구라 할지라도 현 상황에선 해결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투항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유트는 겉으로 보기엔 소녀 취향으로 생긴 도련님이었다. 하지만 외모와는 다르게 판단은 냉정하고 신속했다.
유트가 왕좌에 앉고 페리안을 선포한 이후 수차례의 반란이 발생했다. 유트는 그때마다 반란의 대가를 톡톡히 보여주었다.
약속을 어긴 영지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보복행위를 가했다.
유트는 하나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했다. 그는 결정이 내려지면 그대로 실행하는 실행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유트의 성향을 가장 잘 아는 이는 하르츠 후작이었다. 여명과 함께 유트의 매끈한 얼굴이 비치자 귀족들은 저절로 무릎이 굽혀질 것 같았다.
유트의 얼굴은 부드러움 따윈 단 한 조각도 없었다. 오로지 차갑게 식어 있는 냉소적인 얼굴만이 있었다.
“내가 나가지.”
결국, 하르츠 후작이 무겁게 입을 열어 보였다. 귀족들은 누구도 만류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의 반란은 실패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하르츠 후작은 귀족들이 등을 떠밀지 않더라도 앞에 나설 생각이었다.
유트가 마음을 먹는다면 반란군은 순식간에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다.
유트는 하르츠 후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르츠 후작은 검 한 자루를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를 막는 사람은 없었다.
항상 충성을 말하고, 목숨도 내걸 것처럼 소리치던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유트 왕의 기분도 이랬던가.’
유트의 처지에서 본다면 자신의 신하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창칼을 움켜쥐었다. 믿음에 대한 배신. 그것은 하르츠 후작에게도 꽂혔다.
‘검을 든 것이 얼마 만이던가.’
하르츠 후작이 걸을 때마다 판금 갑옷의 거추장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하르츠 후작은 세월의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한때는 그도 지크 페브리안의 근위 기사로서 무를 갈고 닦았었다. 잘 때도, 쉴 때도 항상 검을 품에 안고 살았었다.
하지만 어느새 무력보단 정치에 의존하게 되었고 굳은살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르츠 후작은 왠지 모르게 비릿한 조소가 지어졌다. 문지기들은 그가 다가오자 말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끼리릭, 쿵!
두꺼운 문이 열리자, 하르츠 후작은 말도 타지 않은 채로 검 한 자루만 들고 나왔다.
한 번 했던 배신. 그것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느끼고 살았었다. 하지만 또다시 그는 배신하게 되었다.
처음 지크를 배신한 이유는 너무나 뛰어났던 주인에 대한 반항심이었다. 두 번째 배신은 자기 아들을 위해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르츠 후작은 유트를 이용하고 싶었다. 지크 페브리안 사후, 북방 대륙은 혼란의 시대를 겪고 있었다.
주인 없는 왕좌는 하르츠 후작이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까워질수록 왕좌는 멀어졌다. 경쟁자가 너무나 많았다.
결국, 하르츠 후작은 모든 세력을 규합하지 못했다.
그 시기에 유트가 왔다.
베리타스 일족의 명예를 이용해 북 대륙은 하나가 되었다.
왕족이나 권위 같은 것엔 관심도 없었던 강직한 아들.
레온은 끝없이 권력을 탐하던 후작과는 달랐다. 강직한 성품의 아들은 기사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일찍이 지크 페브리안이라는 북방의 영웅을 흠모하고 있었다.
그렇게도 존경하던 영웅왕을 죽인 배신자가 다름 아닌 아비라면 어떤 얼굴을 할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차디찬 냉기가 흐르는 전장의 공기를 마시며 하르츠는 성문 바깥으로 나섰다.
항상 대신들의 중심에 서 있었고, 위엄을 잃지 않았던 페리안의 초석은 화려했던 지난날들과 달리 혈혈단신으로 쓸쓸한 걸음을 옮겼다.
“나 레인 폴 하르츠는 유트 왕에게 레퀴엠을 신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