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32)
레필리아 레소드-233화(232/398)
레필리아 레소드 233화
악연(2)
하르츠 후작이 혼자 튀어나와 대결을 선언하자 기사들은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는 명예로운 결투를 선택했다.
기사들은 자신의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며 유트에게 청했다.
“전하께서 나서실 필요도 없는 문제입니다.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유트의 근위 기사인 프세가 출전을 요청하였다. 그의 말은 너무나 지당했고, 올바른 선택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유트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하르츠 후작이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머금었다.
“유트 그대에겐 직접 검을 맞대야 할 이유가 있을 터. 아닌가?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지. 네 간악한 머릿속에 항상 그리고 있던 그림 중 하나가 아니던가? 나서라!”
무엄하기 짝이 없는 도발이었다.
하르츠 후작의 발언에 은기사들은 대번 달려들 뻔했다.
유트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하르츠 후작의 말처럼 유트는 철천지원수인 그를 당장에 죽이지 않았다.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버릴 생각이었고, 그 시기가 왔으니 망설일 것은 없었다.
유트는 백마 위에서 가볍게 내려선 뒤에 손을 들어 올렸다.
“검을.”
“폐하!”
직접 하르츠와 전투를 벌이려는 유트를 보고 프세가 경악한 듯이 소리쳤다.
“전하, 내성의 창턱은 활을 운용하기에 매우 용이합니다. 저들이 이 이상의 불경한 마음을 품는다면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비겁한 수를 써서라도 왕을 암살하는 것. 그러한 경우는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빅스터의 말에 유트가 슬쩍 웃어 보였다.
“그 정도 배짱이라도 있다면 칭찬해 주고 싶군요.”
유트는 빅스터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저지를 작자들. 더더군다나 지금까지의 풍요로움에 몸을 내맡겼던 그들이다. 용기가 있을 리 만무하다.
유트의 입장에선 오랫동안 잊지 않았던 숙원 중의 하나였다.
왕의 자리에 앉아서도 호시탐탐 노리던 원수가 스스로 목을 들이밀었다. 유트의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유트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무수히 많은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릴 적부터 타인의 시선을 받는 데 익숙한 유트였다. 굳이 그가 가진 고유의 진실이 아니더라도.
천천히 유트는 자신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장검에 필적하는 길이인 개천(National Foundation)도의 서늘한 기류는 언제든지 눈앞의 적을 도륙할 것만 같았다.
왼쪽 손에 감아쥔 개문(Opening The Gate)도는 유트에게 항상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선대에서부터 전해지던 이도류를 믿고, 자신의 실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유트는 군 앞에 서서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검투를 하러 나섰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며 그의 병졸과 기사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시선을 떼지 못했다.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겠네.”
막다른 벼랑에 이른 하르츠 후작은 더 이상 유트에게 경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저 역시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유트는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지극히 냉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단 한 조각의 용서도 품지 않은 유트를 보며 하르츠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스르릉.
고요한 전장에 스산한 발검 소리가 울렸다.
하르츠도 한때는 손에서 검을 떼지 않았던 기사였다. 그 나름 경지에 이른 무인이었기에 형편없이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혹시 모든 걸 알고 있었나?”
“그렇습니다.”
유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답하였다. 그런 그의 말을 듣고서 하르츠 후작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유트가 왕의 재목이란 것과 보통내기가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하르츠 후작도 그를 주군으로 모시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원수를 상대로 지금껏 아무렇지 않게 평정심을 유지했다.
품속에 칼을 품고 있으면서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아났다.
“지독한 녀석이군.”
“당신께 찾아올 미래보단 덜 지독할 겁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그렇기에 하르츠 후작은 손에 든 검집을 땅바닥에 던져 버리고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유트는 하르츠 후작에게 선수를 양보할 생각인지 제자리에서 못 박힌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르츠 후작의 맹검이 유트를 찢을 듯이 날아들었다. 유트는 물러서지 않은 채, 자신의 머리를 향해 세로로 날아드는 검을 맞받아 쳤다.
채앵!
철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주변의 모든 것이 경직된 채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하르츠 후작은 현역에서 물러나 검을 놓은 지 오래되었어도, 제법 묵직한 검기를 날렸다. 만약에 유트가 방심했다면 불시에 목숨이 달아났을 수 있었다.
하르츠 후작의 검은 완력으로 찌르고 들어왔다. 유트는 받아낸 검을 밀어냈다. 하르츠 후작은 탄력 좋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검의 힐트를 고쳐 잡았다.
“한때는 지크 왕의 근위 기사였던 몸이니 우습게 보지 말아주게.”
겨우 한 번의 검기를 뿌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하르츠 후작은 자신이 현역 시절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실력이 나오려면 아직은 멀었다. 하지만 하르츠 후작은 오랜만에 근육이 꿈틀거리는 활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맑은 정신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트의 입가는 균열이 일어난 듯 꿈틀거렸다.
“아버지의 근위 기사였음을 자랑스러워할 줄은 몰랐습니다.”
냉랭한 눈동자. 마치 조소하는 듯이 보이는 유트의 시선을 느끼며 하르츠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이번엔 유트가 한 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은색의 날을 비껴들며 다가오는 유트를 보면서 하르츠 후작은 검을 들어 올렸다.
지크 페브리안의 고유 검술이었던 이도류. 양손으로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검술은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쌍수는 한쪽으로 공격을 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방어나 견제를 하는 것이 주 전법이었다. 하지만 페브리안가의 이도류는 공격과 견제를 동시에 하는 것이 가능했다.
어느 한쪽으로 힘이 치우쳐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부단히 노력해야 했고, 천부적인 자질은 타고나야만 했다.
하르츠 후작 역시 젊을 적엔 페브리안가의 비전을 익히기 위해서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불가능했고, 자신에게 익숙한 검과 방패로 만족해야만 했다.
자신의 주인의 것이었던 두 자루의 무기가 지금 유트에게 쥐어져 있었다.
어쩌면 하르츠 후작은 유트를 만나 유품을 건네줬을 때부터 지금과 같은 일을 예상했을지도 몰랐다.
하르츠 후작은 유트에게 넘겨준 무기가 자신에게 휘둘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머리 위로 추어올렸던 검을 세로로 내려찍어 보였다.
챙!
긴 검의 공명음이 울려 퍼졌다. 유트는 오른손의 개문도만으로 하르츠 후작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르츠 후작은 자신이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이전의 감각을 잃은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하지만 서로의 검이 맞닿는 순간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하르츠 후작은 재빨리 검을 거두고서 뒤로 후퇴하며 간격을 벌리려 하였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유트의 개천도가 빠른 은광을 내뿜어 보였다.
하르츠 후작의 무릎 갑옷 이음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개천도는 피를 흡수하듯이 붉게 물들었다. 하르츠 후작은 찢어질 듯한 고통에 억지로 마른 입술을 깨물어 보였다.
지금껏 쌓아온 업적과 자신의 프라이드가 적 앞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은 용납지 않는다. 있는 힘을 다해 유트의 검을 튕겨내며 이번엔 가로로 베어 들어갔다. 개천도에 찔린 다리 때문에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순식간에 머리를 두드렸다.
하지만 초인적인 인내로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검은 다시 한번 개문도로 길이 막혔다.
아무리 지크 왕의 곁을 수호하며 맹위를 떨쳐냈던 근위 기사라 해도, 나이를 먹으면 퇴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페브리안가의 천재들을 범인(凡人)이 이기는 것은 어려웠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지크 페브리안이 패왕이라 불린 이유는 지극히 단순했다.
그는 무법천지였던 북방 대륙의 소왕국들을 전부 힘으로 제압했다. 그리고 모든 전투에서 항상 선두에 섰다.
그는 검술과 창술의 극치에 다다른 이였고, 단 한 번의 레퀴엠전도 패배한 일이 없었다.
하르츠 후작은 검을 다시 회수하였다. 다리에서 쏟아지는 뜨겁고 질퍽이는 액체가 화상을 입은 듯이 뜨겁게 느껴졌다.
“혈통이란 어쩔 수 없는 건가.”
하르츠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물에 젖은 종이처럼 전신이 축 처지는 것 같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검을 들어 올렸다. 유트는 이번에도 그의 강검을 옆으로 비껴가는 동시에 개문도를 찔러 들어갔다.
푹!
하르츠 후작은 멀쩡했던 다리에도 서늘한 검이 찔러 들어온 것을 느낀다.
서늘한 그 촉감은 순식간에 화끈거리는 고열처럼, 얼얼한 고통이 몸 전신을 향해 퍼져 나간다.
저절로 몸이 휘청였다. 힘을 잃은 무릎이 갑옷 틈새로 피거품을 토해냈다.
“레온은 이 사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네.”
힘겹게 핏기 잃은 입술을 열어본다. 냉랭하고 감정 없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잠시간 하르츠를 직시하였다.
어차피 이길 수 없으리란 것을 알고서 나온 것이었다. 최소한의 명예라도 지키기 위해서, 왕의 검날 아래 목숨이 거두어지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선택권이었다.
또한, 지금쯤 공주를 호위하며 황성으로 향하고 있을 레온에게 피해를 덜 끼칠 수 있도록 애절한 바람도 담겨 있었다.
“네, 하지만 혈통이란 어쩔 수 없습니다.”
유트의 말에 하르츠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지금 지독한 검상을 입은 양쪽 다리의 고통 때문이 아닌, 아무것도 모르고 화를 당할 자식에 대한 걱정이다.
자신이 죄를 전부 뒤집어쓰게 된다면 아무리 냉정한 유트 왕이라 해도 저 많은 귀족을 전부 내치진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남아 있다면 최소한 레온 폴 하르츠에게까지 큰 화가 돌아가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
애초에 하르츠 후작이 반란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도 레온을 권력자로서 앉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르츠 후작은 더 이상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로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이미 감각이 사라지고 있는 노쇠한 손가락은 억지로 힐트를 움켜쥐었다. 탄력을 잃은 근육이 몸을 마비시키듯 뻣뻣하게 만들었고, 결국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공격하게 만든다.
애초에 하르츠 후작의 검에 맞을 일은 없었다.
전성기 시절의 하르츠라 해도 지금의 유트를 상대하는 것은 어려웠다.
가슴팍을 향해 날아드는 하르츠 후작의 검.
유트는 쌍수를 들어 그의 검을 막았다. 그리고 옆으로 기울인 십자 형태로 미끄러지듯이 흘려보냈다.
유트는 오른손의 개문도를 고쳐 쥐었다.
은광이 허공에 그어진다 싶더니 하르츠 후작의 손목에서 붉은 혈선이 그려졌다.
츄륵!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건틀릿으로 보호받지 못한 손목 안쪽에서부터 시뻘건 물감을 터뜨리듯이 움직이는 선혈. 연분홍 뼈가 드러날 정도로 베여 나간 손목은 더 이상 제구실을 할 수 없었다. 덕분에 하르츠 후작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구고 말았다.
하르츠 후작은 이미 피를 많이 흘린지라 몸에 마비가 찾아들었다. 하지만 억지로 이를 사리물었다.
무모한 반항이란 것을 알면서도 하르츠 후작의 남은 왼손이 유트의 얼굴로 뻗어 나간다.
머리카락이라도 움켜쥐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왼손이 검을 쥐고 있다는 착각이라도 했던 것일까.
유트는 망설임 없이 오른손에 쥐고 있던 개천도를 안에서 바깥으로 휘둘렀다. 귀족들에게 반역을 지시했던 하르츠 후작의 손이 허공 중에 비를 흩뿌리며 춤을 추었다.
반란군은 모두 하나같이 숨을 죽였다.
그래도 한때는 귀족들을 규합하고, 북방 대륙에 뿌리 깊은 지배자였던 남자다.
그는 자신의 나이에 절반도 안 되는 사내에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힘없이 주저앉아 고통 속에서 신음을 토해내는 하르츠 후작의 수염은 검붉은 핏물에 적셔져 있었다. 온통 차갑게 식어가는 몸의 곳곳을 끌어안으며 하르츠는 떨었다.
유트는 차가운 눈동자를 굴려 보였다.
“이제 만족……하는가.”
하르츠는 들끓는 고통을 힘겹게 누르느라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었다.
유트는 개천도를 높이 들어 올렸다. 일출과 더불어 은광을 은은하게 퍼뜨리는 그의 칼날을 보면서 하르츠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르츠 후작, 그대는 페리안의 초석이었고, 이제부터는 왕권 강화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유트의 말에 하르츠 후작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어 보였다. 눈앞에 있는 청년 왕은 복수라는 글자 이외의 것도 머릿속에 그려 넣고 있었다.
북방 대륙 최고의 귀족 중 하나인 하르츠가 반란을 일으키다가 실패했으니, 중심축을 잃은 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반란을 일으켰던 죄로 그들은 숨죽여 지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유트의 왕권이 더더욱 강해진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적당히 길들이려고 했던 유트는 걷잡을 수 없는 인물로 성장해 버렸다. 뒤늦은 후회를 하지만 이미 유트 왕의 차가운 칼날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 뒤였다.
반란군 쪽으로는 무거운 침묵이, 왕국군 쪽으로는 함성이 퍼졌다.
어차피 전쟁의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첫 모반. 나라의 중심이 되는 귀족들 태반이 하르츠 후작을 지지했기에 유트에게 돌아갈 피해는 컸다. 하지만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유트 왕은 첫 모반의 위기를 무사히 넘김으로써 추후에 있을 새 정책들을 반대파 없이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정책 입안에 대해서 반대표를 던질 수 있는 것은 귀족 계급이었으며, 그들은 유트 왕에게 죄지은 것이 있었기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서 눈치만 볼 수밖에 없었다.
위기를 넘긴 페리안, 그리고 건국 공신을 잃었지만 엘 파실드라는 괴물과 손잡은 유트는 거침없는 행보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아끼는 단 한 명의 혈육, 그리고 단 하나의 친우는 비릿한 음모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