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33)
레필리아 레소드-234화(233/398)
레필리아 레소드 234화
악연(3)
전국 시대를 맞이하여 황권은 약해졌으나, 수도 임펠란드의 위상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다.
타 영지를 몇 개 합쳐놓은 듯한 넓은 영토, 허락받지 못한 자는 들어올 수 없는 거대한 장벽.
천년 왕국이 세워지던 때에 함께 만들어진 거대한 장벽은 윌 크로스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마법의 융갑이 쓰인 이 거대한 장벽은 부서져도 스스로 복원되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거대한 땅덩어리를 다스리는 대제국이라 해서 천 년 동안 계속 부흥의 길을 걸어온 것만은 아니었다.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으로 인해 침입을 허용당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수도를 지키는 거대한 장벽은 천년 마법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함락되지 않는 성벽의 장엄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내뱉게 했다.
깎아지를 듯이 높은 외성 안의 유일한 출입구는 삼엄한 경비 속에 운영되었고, 단 한 번도 부서진 적이 없는 성문은 회색의 길티하임이라 불리며 숭배받고 있었다.
수도 임펠란드의 성문이 숭배받는 이유는 적에게 문이 열린 적이 없다는 사실보다, 그 문 자체 가지고 있는 특정한 마법에 있었다.
오트리아 제국의 건국부터 수많은 시대의 환난 속에서 태어나고 활약한 영웅들. 그 영웅들의 초상이 새겨지는 문은 수도의 자랑이자, 뛰어난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왜 초상이 새겨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초상이 조각되는 모습을 목격한 자 또한 없었다.
“아무리 봐도 원숭이 얼굴 따위는 없을걸?”
햇살을 반사하는 긴 은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은 마차의 창문을 연 채로 빈정거린다. 고귀함이 묻어져 나오는 듯한 은빛 머리카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빼앗는 마력을 지녔다. 긴 속눈썹의 아래로 보이는 루비빛 눈동자는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보석과도 같았다. 보드라운 뺨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희디희고, 윤기 흐르는 입술과 신이 만들어낸 조각처럼 아름다운 턱선은 아찔함마저 전해준다.
동성에게는 질투를 부르고, 이성에게는 사랑을 꽃피우게 만드는 아리따운 여성. 그녀가 마차의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부드러운 긴 은빛의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관문병과 입문자들은 인형 같은 여성의 얼굴과 말하는 투가 너무나 다른 것을 보고 의아함을 품게 했다.
조신한 말과 사랑스러운 단어들만 내뱉을 것 같은 여성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독설들을 입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명성 높은 길티하임에 지저분한 원숭이 몰골이 새겨지면 관광객의 기분마저 망쳐 버리잖아? 애초에 네가 잘난 것이 뭐 있다고 영웅들과 얼굴을 나란히 할 것이라 생각해? 여긴 인간 영웅들이 새겨지는 문이니, 원숭이는 원숭이 영웅이 새겨지는 문으로 사라져.”
은발 소녀의 앙칼진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저 얼굴에 성격까지 좋으면 그것은 신의 부조리라고.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있는 것은 당연한 법이라고 스스로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관문병과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중의 한 명은 은발 여성과 대치 중인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이었다.
원숭이라고 불릴 정도로 못생긴 얼굴인가 하고 구경하던 남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매우 뛰어난 미남은 아니었지만, 남성들에게 있어서 열등감을 움켜쥐게 할 만큼 깔끔하게 잘생긴 마스크였다.
훤칠한 키는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한 기분마저 들게 하였고, 말라 보이는 몸과는 다르게 검은색 제복 안에는 균형 잡힌 근육들이 감춰져 있었다.
수도에 일이 있어 찾아온 아가씨들은 은발 여성에게 구박받는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을 보고 시선을 빼앗겼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은 머리의 청년은 은발 여성의 말을 듣고 잔뜩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너 얼마 전에는 도시를 구했네, 뭐 했네 하면서 나보고 영웅이라며!”
“흐응, 겨우 그 한 번으로 회색의 길티하임에 얼굴이 새겨지길 바랐나 보지? 넌 그 양심 없는 발언부터 종신형인 거 알아?”
은발 머리의 여성, 유이 페브리안이 하는 말에 리에르는 반론을 토로하고 싶었지만 불편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수도에 들어서는 유일한 관문소. 이곳은 계급에 따라 세 곳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피오네(천민 계급)는 수도 입성이 금지되어 있으며, 주인과 동행할 때만 제한된 인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수도에 장사하러 오거나, 이주를 온 플로레(자유 시민)층이 사용하는 관문소, 라 피드체(귀족 계급)층이 사용하는 관문, 마지막으로 레 플로레(왕족 계급)층이나 비상시에만 사용할 수 있는 관문소로 나뉜다.
단연 서민 계급이 지나가는 관문소는 사람이 많았고, 지나가는 절차도 복잡하고 시간이 걸렸다. 서민층보다 인구수가 적은 귀족 관문소는 한산했고, 왕족 관문소는 더할 나위 없이 파리만 날리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하루에 스물에서 서른 번 정도의 행차가 있던 귀족 관문소는 바쁜 행렬들이 이어졌고, 왕족층 관문소를 향하는 고귀한 행렬들도 잦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고 있는 은발 여성과 흑발의 청년 역시 레 플로레 관문소를 지나고 있어, 그들의 신분을 깨닫기엔 충분하였다.
“저 아가씨가 혹시 페리안의 공주 아냐?”
“소문에 부풀려진 것이 하나 없구먼.”
사랑스러운 얼굴, 그리고 신비로운 은발을 가진 여성을 보고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과 출신지마저 확신하였다. 이미 제국 황제가 여는 연회에 수많은 영웅이 모인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소문만 무성하게 들려오던 유명인을 직접 볼 기회다. 수도의 시민들이 놓칠 리 없었다.
“그럼 페리안의 꽃과 대화하는 사람은 설마……!”
검은 청년을 보고 질시하던 남성 중 몇몇은 심호흡을 하였다. 겉보기에는 그저 얼굴이 반반한 청년으로 보였지만 소문으로 익히 알려진 차림새였다.
사람들은 리에르를 보고 페리안의 흑사자라 수군거렸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리에르는 볼을 긁적였다. 누군가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함께하는 것보단, 혼자라는 것에 익숙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항상 이런 시선을 받아왔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리에르는 마차에 있는 은발 머리 소녀를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더 대인 관계에 대해서 서툴렀고, 말수가 적었던 그녀이기에 새삼스럽게 궁금했다.
유이는 자신에게 밀려드는 시선을 외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은 채,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비스에 불과했다. 그녀는 청년과 눈이 마주칠 때면 타인에게 들키지 않게 도끼눈을 뜨고서 째려보았다.
“바보 원숭이, 꾸물거리지 말고 움직이지그래?”
“알았다고.”
분명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던 그녀였지만, 보통 때 대하는 모습은 예전과 달라짐이 없었다. 툭툭 던지는 말들은 여전히 시비조였다. 부드러운 얼굴로 귀여운 말을 하던 모습이 전부 착각이었나 고민하게 했다.
회색의 길티하임에서 자신의 얼굴 조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리에르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말고삐를 잡아 틀었다.
그런 리에르의 옆으로 갈색 곱슬머리의 청년 역시 무언가 아쉬운 듯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 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기막혀.”
유이는 멀쩡해 보이던 레온마저 리에르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고 남자들은 전부 바보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오트리아 제국의 수도, 임펠란드에 입성한 유이 일행은 잠시간의 투덕거림도 잊은 채, 눈앞의 광경에 취해야만 했다.
티 없이 깨끗한 하늘 위로,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은 달콤한 찻잔 속에 한 스푼 담고 싶었다.
마치 여행객을 향해 행렬하고 있는 가로수들은 초록빛 손바닥을 흔들며 빛 알갱이를 쏟아 내린다. 가로수를 지나 삼림욕이 끝나면, 아치형으로 펼쳐진 건물들이 층층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마을이나 도시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물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일반 가택들이 층을 이루어 모여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예술 작품이었다. 타 도시에선 볼 수 없는 높다란 타원형 건물들이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보통의 단층, 혹은 이 층인 데에 비해 수도는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고층이 즐비해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해지는 길드 건물들.
어떤 이유와 의도에서 만들어졌는지 알 수도 없을 각양각색의 건물들을 보고 일행은 벙찐 표정을 지워내지 못했다.
그나마 제국의 수도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레온이 일행을 위하여 입을 열었다.
“지금 지나고 있는 곳은 길드 로드(Guild Road)라고 부릅니다. 각 목적에 맞게 설립된 길드들은 서로의 이익 창출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죠.”
마을이나 도시에 세워진 길드들은 소규모 단체인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간혹 큰 길드의 지부인 경우도 있었다. 돈만 주면 그 어떤 정보도 갖다 바치고, 암살도 밥 먹듯이 한다는 도적 길드, 이외에도 상인 길드, 용병 길드, 마법 길드 등등 큰 종목에서 작은 종목까지 길드의 종류는 광범위하였다.
리에르는 도적 길드를 떠올리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적혈의 악마로서, 그리고 교단을 배신한 복수자로서 움직이던 리에르를 끈질기게 암살하러 온 곳은 도적 길드였다.
어떨 때는 평범한 마을 소년으로, 어떨 때는 음탕한 윤락가 여성으로, 또 어떨 때는 지나가는 상인으로 위장여 급습하는 그들은 작은 방심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들은 대륙에서 제일가는 정보 상인이다. 리에르는 눈 밑까지 후드를 내려뜨렸다.
“길드 로드를 지나 우측 길을 따라 올라가면 시장이 있습니다. 여타 다른 도시의 시장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는 규모긴 합니다만.”
수도의 길을 잘 아는 레온이 마부석에 앉은 채로 설명을 계속했다. 멀리서도 보이는 도로변을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잔뜩 쌓인 물건은 윤곽이 뚜렷하지 않아서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진 상인의 모습을 보니 구경을 가고 싶어진다.
“와, 공주님. 저거 보세요!”
유이의 곁에 달라붙어 있던 멜런이 창문 너머로 손가락을 흔들면서 소리친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는 사람보다 더 큰 등 푸른 생선이 거꾸로 매달린 채,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멀리서도 비린내가 느껴지는 것 같아 인상은 찌푸려지지만, 사람보다 더 큰 생선을 보는 멜런의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구경 가고 싶네요, 그쵸?”
“한가하게 볼 시간이 없으니 별수 없잖아.”
멜런의 말에 유이도 동의하는 듯 보였다. 사람 많은 곳을 즐기진 않지만, 대륙의 모든 상업과 이어진 이곳은 유이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 많았다.
비록 한 국가의 공주로서 살아가게 되었지만, 그녀가 자라온 환경과 근본은 순수한 아가씨에 불과했기에.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얼마든지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수도의 시장은 매일 열려 있으니까요.”
레온의 말에 멜런과 유이는 저절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른 도시의 시장들은 한 달에 일주일 정도만 시장이 열렸다.
수도의 시장은 도시에 정착한 상인들이 자신만의 가게를 꾸려 상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장은 마법과도 같은 곳이었다. 온갖 볼거리와 먹거리가 가득하여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는 유혹이 있는 장소.
레온의 이야기는 유이와 멜런에게 반응이 매우 좋았다. 덕분에 레온은 표정으로 드러내 보이진 않았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는지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하였다.
자신이 학업을 위해서 수도에 살았던 이야기들도 가끔 흘러나왔고, 지금 보고 있는 시장은 극히 일부분이란 사실도 알려주었다.
마차 안이 시끌시끌했다.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