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34)
레필리아 레소드-235화(234/398)
레필리아 레소드 235화
악연(4)
비록 수도에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도적 길드 본사가 있는 곳이니만큼 리에르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유유자적한 마차 안의 사람들과 과거의 악연 때문에 경계하는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그런 마차 안의 사람 중에서 한 명만이 유일하게 대화에 어울리지 않고 창밖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이전 같았으면 가장 활달하게 대화하고 있을 그녀. 하지만 잔혹한 비극에 청초한 웃음을 잃고, 행복한 표정을 잊어가고 있었다.
금발 머리의 여성은 리에르의 시선을 느꼈는지 얼굴을 들어 올린다.
그날 밤 이후로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의 얼굴. 모든 것은 악몽이었다고,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눈꺼풀 안으로 들어오는 진실은 차가웠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고 싶었지만, 리에르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장미 기사단과 베로니카를 처리하기 위해서 잠시 일행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괴로운 머릿속은 정리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함.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것은 에레사에게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갔기 때문이다. 결코, 그녀를 능멸하려는 의도도, 은폐하려는 생각도 없었다.
단지 상처 입었을 에레사를 위해서 그녀의 곁을 평생 지켜주겠다는 의지뿐.
하지만 그것조차 이제는 건너올 수 없는 강을 지나고야 말았다. 그날 밤, 독으로 물든 핏물을 입가에 적신 채 억지로 눈물을 참고 있던 에레사의 얼굴. 복수하기 위해서 독을 품고 살아갈 이의 눈동자와 가련함을 엿보게 된 리에르는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미 모든 것은 되돌릴 수 없었다.
에레사에 대한 동정이 뒤섞인 애정. 그리고 그녀가 리에르에게 갖는 애증.
적혈의 악마라는 절대적인 포식자에 의해서 사라져 버린 페이서스.
원하지 않았지만 이미 적셔진 손은 붉디붉게 물들어 있었다. 씻으려야 씻을 수 없는 과거 때문에 어밴져로서 살게 되었다.
그동안 리에르는 살기 위해서 살기를 휘둘렀고, 그 행위는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아버지 로이스타를 만나 신검을 사사받으면서, 검술의 무거움을 깨달았다.
이름도, 얼굴도 잘 알지 못하는 눈앞의 사람은 단순한 고깃덩어리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가족도 연인도 있으며, 그와 연계된 무수한 인연들이 존재했다.
그렇다고 검을 들지 않는다면 자신이 지켜야 하는 사람들을 다치게 만들 수 있다. 아니, 죽게 만들 수도 있다. 자신 하나만을 돌보지 않고, 무수한 인과관계를 짊어지는 신검을 전수받으니 가치관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혈의 악마라는 악명 높았던 과거를 족쇄로 협박하는 장미 기사단과 여제 베로니카를 잔혹하게 살해하였다.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고, 시체도 전부 불태웠다. 근방에 목격자는 없었기에 들킬 염려는 하지 않았지만, 리에르는 스스로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유트와 유이, 그리고 가족들을 다시 재회하면서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에레사의 차갑고 냉담한 반응에 절대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또한, 그 많은 사람을 전부 죽여야만 했는지, 스스로도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이전과 달라진 그에게 결론은 단 하나뿐이었다.
지인들과 함께하는 이 시간을, 이 평화를 깨뜨리려 한다면 그 누구라도 죽이겠다고.
잠시간 시선을 마주했던 에레사가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재회했을 때에는 단발이었던 금발 머리카락이 어느새 어깨까지 자라난 것이 보인다. 길어진 머리카락만큼이나 두 남녀의 감정은 멀어지고, 또 분열되고 있었다.
“이제부터 황금의 샘을 지나칠 겁니다.”
황금의 샘. 수도 임펠란드의 자랑이자 태양 빛을 그대로 흡수하는 듯이 보이는 조경은 바쁜 행인의 발길을 붙잡는다.
인류를 구원한 초 영웅, 최초의 왕국을 건설한 아리아 오트리아 리제가 여신 아라미아의 축복 어린 성검을 뽑은 장소. 영웅 아리아가 칼리프 니체를 뽑은 자리에서 솟아나기 시작했다는 황금의 샘은 영광의 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유이를 비롯한 여성들은 하늘 높이 튀어오른 태양 빛, 그리고 반사광을 일으키는 샘터를 보고 홀린 듯이 눈을 떼지 못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함유되지 않은 그저 물에 불과하지만, 그들에게는 반짝이는 물 알갱이가 마치 보석처럼 보였다.
페리안의 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에 대해서 알 리가 없는 레온은 그저 웃어 보였다. 마차의 창문 밖으로 황금의 샘만큼이나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그녀, 유이 페브리안이 기뻐하는 얼굴을 보니 피곤함도 씻은 듯이 사라지는 마법을 느낀다.
마치 피크닉이라도 가는 듯 들떠 있는 일행들과는 달리, 리에르는 마음속 어둠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급격하게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가 변질되고, 변형되어 간다.
흐트러지고 어지러운 심정을 누군가가 잡아주길 원해도, 그것은 부질없는 투정에 불과했다.
리에르는 잠시 상념에서 벗어났다.
이질적인 그 무언가가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이 어째서 이런 것을 느끼는지, 어째서 말고삐를 붙들고 있는 손가락이 떨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립고도 증오스러운 향기가 느껴졌다. 손안에 감도는 익숙한 느낌에 리에르는 이를 악물고 손을 움켜쥐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연의 끈. 병기와 소유자라는 입장에서 스승과 제자로, 그리고 친구로 이어진 인연의 그림자.
얽히고설킨 증오의 매듭이 조여지자 리에르는 무언가가 느껴지는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라면 아주 잠깐이었을 찰나의 시간은 매우 느리고, 매우 길게만 느껴졌다.
두근두근.
대낮에 시커먼 장막을 친 마차는 주변의 모든 것을 위압하는 듯 보였다. 화려한 의복을 갖춘 수도의 멋쟁이들도, 기품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지독한 칠흑을 보면서 두려워했다.
마차의 뒤를 따르고 있는 시커먼 로브, 차가운 심장에 그려진 코스모스 문양이 의미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리에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교단!’
불과 몇 년 만에 교단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얼마 전에 리에르가 살해했던 루나레이크의 여제는 교단과 거래했던 동반자였고, 제국의 황실 역시 교단의 사람들로 득실거렸다.
대륙의 영웅들이 대거 모이는 파티에 교단 사람이 참여하지 않을 리 없었고, 그러한 정치적 자리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었다.
‘아르미안……!’
그녀가 오리란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리에르였다. 교단의 인물들이 올 것을 알면서도 안일하게만 생각했던 스스로의 한심함을 곱씹는다.
리에르는 당장에라도 아르카를 뽑아 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이성은 일행들의 안위를 걱정한다.
만약에 제국의 수도에서 교단의 사람을 해쳤다간 걷잡을 수 없는 일로 번져나게 된다. 지금 같이 있는 일행들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거주하는 페리안, 그리고 아버지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돌아간다.
자신에게 어밴져로서 살아가도록 인도한 그녀가 교단의 마차 안에 있는 것이 느껴졌다.
레온은 수도에 처음 오는 이들을 위해서 운치를 느낄 수 있도록 천천히 마차를 몰았다. 그의 그러한 배려는 리에르에게 있어서 독처럼 느껴졌다. 뒤쪽에서 천천히, 하지만 일행보다는 빠른 속도로 교단의 행렬이 다가서고 있었다.
다그닥다그닥.
마차를 끄는 말굽의 소리, 그리고 코스모스 교단의 로브를 걸친 신도들이 마차의 뒤를 따르며 검은 물결을 만들었다.
큰 도로변이니만큼 그들과 바짝 붙지는 않았다.
리에르 자신도 느끼고 있으니, 교단의 총책임자인 그녀도 인지하고 있을 터였다.
리에르는 언제 무슨 상황이 올지 모르기에 건틀릿 형태로 붙어 있는 아르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잔뜩 경계하는 리에르의 걱정과는 달리, 교단의 마차는 일행들을 지나쳐 멈추지 않고 전진해 나갔다.
교단의 귀빈용 마차는 창문이 열려 있지 않아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하지만 리에르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낯익은 향기, 소름 끼칠 정도로 증오스러운 체취를 느끼며 리에르는 이를 사리물었다.
교단의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에레사의 눈동자가 좁혀졌다. 그녀 또한 교단이 벌이고 있는 갖가지 악행을 알고 있는 터라, 코스모스 문양만 보면 불쾌감이 솟아올랐다.
그녀의 시야가 옆으로 향했다.
오랜 소꿉친구이자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애증 관계의 남자.
자신도 모르게 그날 밤 내뱉은 폭언.
차라리 혼자 안고 싶었던 비극을, 이미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리에르가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단 것이 더없이 슬퍼져 왔다.
자신에게 그 어떤 변명이라도, 그 어떤 핑계라도 말해주길 원했지만, 그는 그 어떤 변명도, 설득도 하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삭여두었던 원한이 폭발하자,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에레사의 무서운 독설을 들으면서 처참하게 무너져가는 리에르의 얼굴.
그런 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슬픔 때문에 차라리 매달리고 싶었다. 오랫동안 마음을 나누었던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싶었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등을 감싸주길 바랐다.
부모님에 대한 복수, 그리고 끔찍한 증오심, 그것들보다 앞서는 것은 조잡한 질투심과 일그러진 애정뿐.
리에르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진 것을 보고 에레사는 급하게 돌리려던 고개를 멈칫하였다. 증오로 일그러진 얼굴.
그런 그의 모습은 에레사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다시 재회한 이래로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고 있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지고, 예전과 똑같은 부분들을 발견할 때면 이상하리만큼 가슴 한편이 시리도록 아팠다.
리에르에게 이전처럼 편하게 말을 걸고 싶어도, 그날 이후로 둘 사이에 대화가 사라졌다. 정말 힘들고 괴로운 사람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오히려 리에르가 큰 상처를 입은 것처럼 느껴졌다.
‘안 돼.’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에레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리에르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그날 밤이 마지막이어야 했다.
두 남녀에게 아물지 않을 아픈 상처를 준 장본인은 유유자적하게 마차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커먼 창으로 제작된 특수한 창문은 바깥에서 안을 볼 수 없지만, 안에서는 바깥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의 꼬마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히죽히죽하며 창에서 눈도 떼지 못했다.
“참 질긴 인연이야. 그치, 아라미아?”
긴 흑발의 꼬마는 이죽거리는 얼굴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싱싱한 진녹색의 머리카락을 말아 올린 아름다운 여성은 양 무릎을 가지런히 모은 채, 그 위에 손을 얹고서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도도해 보이는 그녀의 반응을 본 긴 흑발의 꼬마는 흥, 코웃음을 치면서 으르렁거린다.
“검둥이도 널 느끼나 본데, 네가 못 느낄 리 없잖아? 같은 파장을 지닌 존재들이 힘을 섞었고, 살도 섞었으니 서로를 인지 못 할 리 없지.”
테헤라자드는 유쾌하게 웃었다. 하지만 가늘게 벌어진 눈동자는 살기로 희번덕거렸다.
순수한 어린이의 얼굴로 보이지만, 꼬마의 눈엔 광기가 있었다.
진녹색 머리칼의 여성은 광기 어린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