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36)
레필리아 레소드-237화(236/398)
레필리아 레소드 237화
악연(6)
희귀하디희귀한 은회색의 긴 머리카락, 보석 같은 루비빛 눈동자에 흰 피부를 가진 유이는 여자인 멜런이 보아도 아름다웠다.
남성에게 서투른 유이라 해도, 황성에서 열리는 화려한 사교장이라면 얼마든지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이지.”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유이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녀가 보기에 리에르와 에레사의 모습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너무 정다워서 질투까지 났었다. 하지만 지금은 둘 사이에 뭔가 이상한 기류가 있었다.
“가실 시간입니다.”
손톱 손질을 끝마친 유이를 향해 레온이 부드럽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유이는 그의 에스코트에도 불구하고 혼자 일어났다.
다른 사람 같으면 다소 민망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레온은 유이의 성격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쓴웃음만 머금고 만다.
도도해 보이는 그녀의 행동은 그저 순수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차가워 보이는 표정은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5년 전, 하르츠 영지에 그들 남매가 찾아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처음에 그녀는 그저 붙임성 없는 꼬마였다. 그런 그녀가 점점 아름답게 성장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 온 레온은 어느새 그녀에게 마음을 홀딱 빼앗기고 말았다.
그렇기에 레온은 유이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아도 기다리고, 또 기다릴 수 있었다.
준비를 마친 리에르가 건너편 방에서 걸어 나오자 레온은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유이의 마음을 휘어잡기 위해서 몇 년간 시간을 들였지만, 엉뚱한 방해꾼으로 인해서 지독한 수치심마저 느껴진다.
리에르라는 이름은 레온이 몇 년간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유이를 가로챘고, 왕국 최고의 기사라고 호언장담했던 긍지를 깨뜨려 버렸다.
“그런 옷을 입으려면 배가 좀 나와야 하지 않을까?”
리에르는 레온의 화려한 복식을 보고 피식, 피식 웃고 있었다. 붉은색으로 화려함을 뽐내는 통이 큰 웃옷과 깃이 올라간 셔츠에 감긴 흰색 레이스의 크라바트.
다리에 쫙 달라붙어 불편해 보이는 검은색 타이즈를 보면서 리에르는 손사래를 쳐 보였다. 주로 고위 귀족들이 입는 화려한 복식이었다.
리에르는 기름진 돼지들이 이족보행을 하는 것 같아 웃음을 참기 힘들어졌다.
리에르의 말을 듣고서 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경은 귀족 사회의 구도에 대해서 문외한이군요. 우리는 다름 아닌 이 넓은 제국을 통치하는 단 하나의 황제를 만나는 겁니다. 그에 맞게 격식 있는 몸가짐과 고풍스러운 옷으로 치장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장에서는 무거운 갑주를 걸치지만, 정치적인 자리에선 페리안의 품격을 지켜야 합니다.”
설교하듯이 말을 늘어놓는 레온을 보면서 리에르는 히죽거리는 웃음을 지워내지 않았다.
지금 레온이 입은 바지는 타이즈라서 쫙 달라붙는 재질이었다. 그로 인해 레온의 사타구니에선 뱀처럼 흉물스러운 무언가가 돌출되어 있었다.
“품격을 지킨단 말이지…….”
“경은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으니 이해하겠지만, 다음부터는 어느 정도 지식을 습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응…… 그래, 품격 말이지.”
레온은 리에르가 계속 히죽거리자 기분은 상했지만, 그가 들개 같은 생활을 오래 했던 것을 알고 있으므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며 넘어갔다.
* * *
“빌어먹을,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냐!”
짧은 갈색 머리카락의 남성은 잔뜩 화가 난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결국 화를 이기지 못한 남성은 들고 있던 양피지를 상대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얻어맞은 사내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갈색 남성의 말 한마디면 사무관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일가족까지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하오나, 저희도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닥쳐라, 이 버러지 같은 놈!”
갈색 머리의 남성은 의자에 앉은 채로 눈앞의 사무관을 걷어차 버렸다. 불시의 일격을 당한 중년의 사무관은 어이쿠 소릴 내뱉으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당장의 아픔보다는 이후에 날아들 불호령이 걱정되었다.
사무관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손을 올렸다.
다행히도 상관은 씩씩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이외에 다른 움직임을 취하진 않았다.
사무관은 내심 안도하며 감쌌던 팔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밀려드는 짜증을 참아내려는 듯이, 갈색 머리카락의 남성은 미간을 짚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사무관은 황실에서 근무한 지 오래된 인물이었다. 요직을 맡은 적은 없지만,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실수 없이 일해왔다.
황성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그로서는 갖가지 귀족들을 만나보았지만, 눈앞에 있는 상관처럼 이중적인 인물은 처음이었다.
허울뿐인 황제지만 제국의 일인자가 아끼며, 일찍이 제국의 원수(General)를 배출하기도 한 명문가인 남자.
그는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코스모스 교단의 지휘관이 되기도 하였다.
비록 지금은 아키서스 공방전의 패배로 요직에서 밀려났지만,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을 손안에 움켜쥐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포악한 그의 성격을 맞추지 못한다면 하찮은 직위의 사무관은 순식간에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빌어먹을 흰머리 자식.”
짧은 갈색 머리카락의 남성, 티미 아크우드는 사납게 이마를 짓누르며 이를 갈아 보였다.
기껏 멍청한 황제를 설득해서 대륙에 알려진 유명인들을 초대하는 연회를 꾸몄다. 자신에게 개망신을 준 장본인인 유트 페브리안을 암살할 생각에 설렘마저 느꼈었다.
하지만 정작 유트는 참석하지 않았고, 유이 페브리안이 대리 참석을 했다.
유트만 죽인다면 페이서스 카에르에서부터 지금까지 당했던 모든 수치를 씻어낼 수 있었다. 또한, 그의 목을 베어내기만 한다면 신생 왕국 페리안은 순식간에 지휘 체계가 무너진다.
“페리안에서 온 녀석들 명단을 불러라.”
한창 분을 삭이지 못하던 티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명단에 턱짓을 해 보였다. 벌렁 넘어가 있던 사무관은 뚱뚱한 체격에 맞지도 않게 재빠른 움직임으로 땅바닥에 나뒹구는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사무관은 안경을 고쳐 잡으며 재빨리 손님 명단에서 페리안을 찾았다. 그러곤 이내 더듬더듬 입을 열어 보였다.
“아, 아시는 바와 같이…… 페리안은 공주인 유이 페브리안이 대리인으로 참석했습니다. 고귀한 미모는 이미 대륙 널리 알려져…….”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면 그 두툼한 주둥이를 꿰매 버릴 수 있다.”
대번 티미의 불편한 음성을 듣고 사무관은 깜짝 놀라, 말을 중단하였다.
흠, 하는 신음을 흘려 보이던 사무관은 쓸데없는 설명을 줄이고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명단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건국 공신인 하르츠 후작의 자제이자, 페리안 근위 기사인 레온 폴 하르츠와 같은 근위 기사인 릴 에레나드가 함께 왔습니다.”
티미는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의 페리안은 주인 없는 영지를 하나하나 수복해가며 북방의 패자로서 질주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몇 없는 근위 기사들을 둘이나 딸려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유이를 아낀다는 것이고, 황성 입성을 위험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능구렁이 같은 녀석.’
티미는 너무도 짜증스러운 나머지 책상을 한 번 내려쳤다. 그 바람에 애꿎은 사무관만 어깨를 움츠리며 눈치를 보게 되었다.
왠지 에레나드라는 성이 낯설지 않았지만, 굳이 떠올리려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매일 인사를 하러 오는 사람만 해도 수십이다. 일일이 기억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누구에게라도 화풀이하고 싶은 심정에 휩싸인 티미는 인상을 한창 구기다가 갑자기 비릿한 조소를 머금어 보였다.
분명 유트를 살해하려는 계획은 틀어졌지만, 원수 같은 놈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여동생이 자신의 수중 안에 들어 있었다.
“페리안의 근위 기사라는 것들 강한가?”
“네?”
갑자기 생뚱맞은 질문을 하는 티미를 보고, 사무관은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대답이 늦게 된다면 또다시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기에 망설임 없이 내뱉는다.
“북방의 야만인들이 체력 하나는 괴물이니까요. 아비인 하르츠 후작도 패왕의 오른팔로서 활동했었고, 그 피를 이어받은 기사 레온도 유트 왕의 곁에서 많은 전장을 누볐던 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 그래 봤자 시골 변방의 기사 나부랭이겠지.”
티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를 갈더니 이제는 실실 웃고 있었다. 덕분에 사무관은 불안해서 간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레온이라는 근위 기사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사무관의 말에 티미는 눈썹을 찌푸려 보였다.
“레온이란 놈이 페리안 최강 기사니까 넘버원을 차지하는 거 아닌가.”
티미의 말처럼 왕국의 기사는 넘버에 따라 능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물론 넘버는 무력뿐이 아닌 다방면의 능력으로 평가되는 것이긴 하지만, 티미도 레온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아키서스 공방전에서 기병을 이끌고 무서운 돌파력을 보여주었던 기사, 그리고 불리해진 진형을 수복하는 능력도 뛰어나서 내심 무섭게 생각하던 인물이었다.
“네 번째 근위 기사인 릴은 흑사자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뭐?”
티미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해 버렸다. 릴이라는 기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는 못했으나, 흑사자라는 이명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포진한 교단의 군대를 말도 타지 않고 혼자 돌파해 낸 사건은 대륙의 이목을 집중시켰었다.
더더군다나 교단의 요직에 있었던 티미로서는 그 사건을 일으킨 흑사자의 정체도 알고 있었다.
리에르 아르빈트. 자신에게 여자도, 명예도 빼앗아간 남자. 그리고 포스라는 힘을 소유하고 교단의 검으로서 활약했었다.
적혈의 악마가 흑사자란 것은 교단 간부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름이 다른 것이야 얼마든지 가명을 댈 수 있다.
“에레나드라고 했나?”
“아, 네. 흑사자의 성이 맞습니다.”
티미는 그제야 아름다운 금발의 소녀를 떠올렸다. 페이서스에서 자신에게 죽었던 여성. 오랜만에 떠올리는 그녀였다.
“거짓말이겠지……?”
티미는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흉측하게 느껴져 사무관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보였다.
“저, 정말입니다……. 소문으로는 유트 왕의 총애를 받고 있으며, 첫 출정에서 20개의 소영지를 점령한 이력까지 있는 북방의 괴물입니다.”
“그래, 그놈은 그렇겠지. 괴물이니까.”
짜증을 부려도 시원찮을 판국에 오히려 히죽거리는 티미를 보고 사무관은 점점 알 수 없다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교단에게 버림받아 석셔너 포스를 잃어버린 리에르, 그리고 암살자로서 활약하며 적혈의 악마라고 불린 그의 존재는 아직도 사람들에겐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끔찍한 학살자가 성스러운 황성 안으로 들어온단 사실을 사람들이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왠지 티미는 그 광경이 연상되었다.
흉악한 살인마가 페리안의 이름을 대고 황성 안으로 들어온다.
대륙의 모든 이가 페리안을 뭐라고 생각할 것인가.
“안일했구나, 유트. 대륙은 넓지만 어떤 의미로는 좁지.”
사무관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티미를 보면서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나갔다.
티미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유쾌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내 먹잇감을 보기 위해 가야겠군.”
티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집어 들었다. 대륙 유일의 황제가 있는 성내에서 무기를 지닐 수 있는 것은 근위병뿐이었다.
물론 예외는 존재한다.
착검이 가능하도록 선택받은 자들은 몇 있다. 그중 한 명이 티미였다.
포스를 잃어버린 리에르는 티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검조차 갖지 못한 그를 제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음흉한 음모를 머릿속에 그리며 유쾌해하던 티미가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