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37)
레필리아 레소드-238화(237/398)
레필리아 레소드 238화
악연(7)
이때 리에르와 유이, 그리고 레온은 황성 시녀들의 안내를 받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는 고풍스러운 붉은빛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황금빛으로 은은하게 흔들리는 촛대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황성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복도의 막다른 모서리에 도달하면 지금껏 안내했던 황성 시녀가 배꼽 인사를 하며 물러난다. 다음 복도부터는 새로운 시녀가 길 안내를 하는 식이었다.
“무슨 미로도 아니고…….”
리에르는 아까부터 계속 걷기만 하는 것이 불만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유이는 힐난하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복숭앗빛으로 물든 뺨, 윤기 흐르는 입술. 평소와는 달리 단정하게 말아 올린 은발 아래로 보이는 하얀 목덜미.
꾸미지 않아도 눈부셨던 미모는 옅은 화장과 미용만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유이는 리에르의 시선을 느끼고는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나이트 릴.”
“…….”
유이에게서 존칭을 들은 리에르는 묘한 표정으로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었다. 주변에 보는 시선들이 많았기에 유이는 접대용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두 눈에는 장난기가 그득했다.
어디까지나 유이는 페리안의 꽃이었다. 그렇다면 좋으나 싫으나 타인의 이목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그건 여느 나라의 공주나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리에르는 하하, 웃으면서 입을 열어 보인다.
“공주님의 아름다움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이 못난 사람을 비웃으시면 안 됩니다. 당신의 고귀함은 한순간 정신을 잃을 미약과도 같으니까요.”
“헐…….”
“헐이라니요……. 공주님?”
리에르의 정중한 말에 유이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주변의 시선만 없었다면 대번 발차기라도 해왔겠지만, 유이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부끄럽다는 듯이 억지로 웃었다.
“공주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는 기사로서 자연스러운 거랍니다, 공주님.”
뒤편에서 우스꽝스러운 걸음으로 뒤따르고 있던 레온이 입을 열었다. 얼굴은 매우 진지하고 부드러워 보였으나, 꽉 달라붙는 타이즈 바지 덕분에 걸음걸이는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평소 명예를 중요시하는 그를 생각하니 리에르는 저절로 웃음이 맺혔다.
디너를 위해 모인 사람은 리에르 일행뿐만이 아니었다.
“연회 전야제여도 기품 있는 옷은 필수입니다, 릴 경.”
레온은 당당하게 말하면서 식당에 들어섰다.
식당에는 하나같이 타이즈 옷에 금빛 견장 제복을 찬 귀족들이 있었다. 귀족 세계에서는 당연한 품격일지는 모르지만, 리에르에게 있어서는 신종 괴롭힘 같은 느낌이었다.
“당신은 경험이 부족하니 미리 준비하지 못했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번만은 특별히 예비용 복식을 빌려드리죠.”
“아니, 사양할게.”
리에르는 저런 옷을 입고서 당당하게 얼굴을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무릎까지 오는 부츠에 하늘거리는 레이스 상의.
보기만 해도 눈이 테러당하는 기분이었다.
“릴 경도 페리안의 작위를 받았으니 슬슬 상류 사회에 익숙해지셔야죠?”
“적어도 저런 옷에 익숙해지고 싶지는 않은데?”
레온은 원래 품격 바보라서 그런다지만 유이마저 리에르를 향해 눈웃음을 살살 치고 있었다. 아까의 복수를 해오는 그녀에게 리에르가 반격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파티장의 문이 열렸다. 바깥에서부터 들려오던 잔잔한 음악 소리가 먼저 그들을 맞이했다.
생각보다 넓은 홀 안에 모여 있는 귀족들이 저마다 그룹을 구성하는 것이 보였다.
“대 제국 오트리아의 신하, 페리안의 유이 페브리안이 아리아 오트리아 리제의 긍지 넘치며, 위대한 광명을 유전한 필 루드비히 오트리아 대제께 초대받는 영광을 부여받아 도착하였습니다!”
리에르 일행이 안에 들어서자 문의 양옆에서 대기하던 목청 좋은 남성들은 똑같이 소리쳤다. 연회장 안에 모여 있던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아졌다.
아무리 실권이 없는 황제라 하여도 대제국의 가장 높은 이가 여는 파티는 귀족들에게 있어서 빠질 수도 없고, 빠져서도 안 되는 자리였다.
귀족에게 있어 파티는 또 다른 전쟁터였다. 저마다의 인맥을 자랑하고, 새로운 친목을 구성한다.
특히나 이번에는 보기 힘든 얼굴들이 많았다.
리에르는 연회장 안은 정적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문제없이 흐르던 음악도 끊어졌다. 주변의 시선이 화살처럼 쏟아졌다. 리에르가 내심 당황할 때, 유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화사한 붉은 깃털이 수 놓인 부채를 펼치며 입가를 가리고 소곤거리는 귀부인들.
빛깔 좋은 포도주가 담긴 잔을들고 대화하는 귀족들.
디너에 모인 귀족들은 페리안의 공주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리에르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유이에게 향하는 것을 느꼈다.
유이는 어렸을 적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심술궂은 말만 내뱉던 꼬마 아이였다.
그러나 지금의 유이는 가슴까지 파인 오프숄더 드레스를 걸치고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다. 예전의 유이를 떠올린다면 지금의 유이와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유이에게 넋을 잃었다.
유이가 앞으로 걸어 나가자 다시 곡이 연주되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연주되는 곡과는 달리 귀족 남성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페리안의 꽃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일 분 일 초라도, 놓치는 것이 아깝다는 듯이.
유이는 너무나도 익숙한 걸음걸이로 연회장을 유영하듯이 움직였다. 회장 안의 사내들이 보내는 시선을 즐기는 듯한 거부감 없는 움직임이었다.
페이서스에서 항상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던 은발의 꼬마. 서로 할퀴고 때리고 뒹구는 두 사람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던 것은 유트의 일과였다.
리에르에게 있어서 유이는 항상 짜증 나는 꼬마에 불과했고, 성장한 뒤에 만났어도 두 사람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미묘한 남녀 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어렸을 적에 투덕거렸던 그대로 두 사람은 앙숙처럼 행동해 왔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유이의 얼굴은 또렷이 뇌리에 박혀 빠져나오질 않았다.
배를 부여잡고 숨소리도 못 내고 웃는 그녀의 얼굴, 화가 나서 붉으락푸르락하며 날뛰는 그녀의 모습, 곤하게 잠들어 새근새근 소리 내는 그녀의 숨결. 그리고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감정이 속상해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감정이 없는 인형 같던 은발의 꼬마 아이는 변화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과 지분거리고 있던 여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얼굴로 연회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마치 피어오르는 꽃과 같았다.
꽃의 향기에 취한 귀족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벌과 나비가 되어 날아들었다.
유이에게 가장 먼저 와인잔을 들고서 다가온 것은 앤 루드비히 오트리아라는 왕족이었다. 스물 중반의 수려한 외모를 가진 그는 지독한 바람둥이로 소문나 있었다.
그는 유이를 보자마자 자신의 팔짱을 끼고 있던 여성을 버린 채 작업에 착수했다. 그의 뒤로 다른 귀족들도 관심을 보이며 모여들었다.
유이는 긴 은빛 머리카락을 말아 올려 고정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유이의 눈부신 목선이 리에르의 시야에 다시금 들어왔다.
그녀가 다른 귀족들과 대화하면서 방긋 웃는 모습이 어색했다.
가볍게 눈웃음까지 친다.
리에르는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깜박거렸다. 자신이 아는 유이가 아니었다. 수줍게 입가를 가리며 웃는 숙녀가 그곳에 있었다.
“연회장에선 너무 공주님께 붙어 있어선 안 되네, 충분히 즐기실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네. 물론 너무 떨어져서도 안 되지.”
레온은 맑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말했다. 잠시 멍해 있던 리에르는 그가 건넨 잔을 받고서 감정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유이에게 남성들이 모여들자, 파트너가 사라진 귀부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그녀들의 시야에 좋은 남자가 눈에 띄었다.
레온의 주변으로 귀부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시선에는 쉽게 만나볼 수 없는 북방의 기사, 게다가 품격까지 갖춘 레온의 모습은 흥미를 끌기엔 충분했다.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며 말을 걸어오는 귀부인과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하는 말을 시작으로 레온은 연회장으로 녹아들었다. 이런 귀족들의 사교 모임에 익숙하지 않은 리에르만이 멀뚱멀뚱 서 있는 꼴로 유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리에르가 알 리 없는 앤 루드비히 오트리아라는 인물은 벌써 유이와 친숙해지기라도 한 듯 손을 허리에 감으며 어딘가로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리에르는 삽시간에 얼굴이 붉어지며 눈을 찌푸려졌다.
그러나, 한때는 검술을 연마했던 유이답게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손길에서 벗어난다. 그녀가 미소 짓고 말하는 모습이 보인다.
앤 루드비히 오트리아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가 이내 불쾌감이 씻어졌는지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리에르는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들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유이의 얼굴을 보는 것은 불쾌했다. 또한, 그녀에게 친근한 듯이 말을 붙여오는 남성들은 혐오스럽게도 느껴졌다. 계속 보고 있으면 폭발할 것 같아서 리에르는 고개를 돌리고서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리에르는 스스로의 감정을 정립할 수 없었다. 그저 불쾌감을 맛보고, 그것을 잊기 위해 억지로 입술 사이로 포도주를 흘려보냈다. 혀끝에 향긋한 액체가 굴러들어왔다. 불쾌함이 씻겨져 내려갈 것 같았는데 여전히 혀에 감돌았다.
무의식적으로 유이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차라리 리에르는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
적혈의 악마라는 과거, 한심한 스스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본인과는 달리 주변 사람들은 성장하고 있었다.
유트는 왕이라는 운명을 택했고, 페리안을 대륙의 오대 강국 중 하나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 유이도 자신의 지위를 망각하지 않고, 그에 맞는 품격을 숙련되게 보였다.
리에르 스스로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유트와 유이 남매는 이미 자신의 손에 닿지 않는 멀고 먼 존재가 된 것 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강력한 요인 중의 하나는 리에르 자신의 죄업이었다.
하지만 리에르는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금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감정의 정체는 그것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Master, 질투합니다. 그냥 주변에 있는 것들 베어버립니다?
갑작스러운 아르카의 말에 리에르는 깜짝 놀랐다. 주변에서 아르카의 음성을 듣지는 않았나 자신도 모르게 두리번거렸다.
물론 의미 없는 행동에 불과했다.
의심스럽긴 하지만 아르카는 최소한의 지능은 있었다. 들키면 안 되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들리게 하지는 않았다.
“고철, 또 헛소리냐.”
-아르카는 근거 없는 발언은 하지 않습니다. Master는 은발 암컷이 발정 난 수컷들에게 둘러싸이고 나서 소유욕을 뽐내고 있습니다? 아르카는 확신에 차서 말합니다.
생각 같아선 아르카를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사람들의 이목만 끌 것이다. 리에르는 억지로 화를 참아냈다.
“자꾸 헛소리 늘어놓으면 정말 갈아버리는 수가 있다?”
-아르카는 Master를 비웃습니다. 하하하.
아르카의 빈정거림도 많이 늘었다. 이제는 리에르의 협박도 통하질 않았다. 슬슬 대장장이 약발도 떨어진 것이다.
리에르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꼭 버릇을 고쳐주리라 이를 갈았다.
-Master, 은발 암컷이 위험합니다.
갑작스러운 아르카의 경고음에 리에르는 고개를 돌렸다. 깜짝 놀란 리에르의 시선 안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고 있는 유이가 보였다. 아르카의 경고음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역시 Master는 은발 암컷에게 욕정이 있습니다.
“황성에서 볼일이 끝나는 대로 너만을 위한 시간을 만들어주마.”
그제야 아르카에게 낚였다는 것을 눈치챈 리에르가 얼굴을 찌푸리며 격노했다. 억울함을 느끼기 이전에 리에르는 유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흔들리게 한단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무기조차 소지할 수 없는 황성, 그것도 많은 귀족이 모인 자리에서 유이가 위험할 일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도 아르카의 말에 휘둘린다는 것은 유이를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