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40)
레필리아 레소드-241화(240/398)
레필리아 레소드 241화
악연(10)
“그 악연의 중심에 네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물론이야.”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아르미안이 답했다. 리에르는 티미가 황제의 측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티미가 교단의 지휘관으로 있다는 것만 알았지, 아키서스의 패전을 책임으로 추방당했단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내 얼굴을 알아볼 가능성이 있다.’
티미는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지만 리에르는 페이서스의 시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자신의 얼굴을 알고, 정체를 알고 있는 인물이 알아보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만약에 티미가 리에르를 알아보고 폭로라도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리에르는 평화로운 터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협박한 루나레이크의 여왕을 살해했다.
죄를 감추기 위해 죄를 더하는 리에르의 모순은 티미를 본 지금 이 순간에도 꿈틀거린다.
‘죽여서 입막음해야 한다.’
맑았던 흑요석 눈동자는 냉랭한 살기를 품었다. 리에르를 보면서 아르미안은 안타까운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리에르의 인성이 변한 것은 아르미안의 탓이 컸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해도 교단에서 받은 주입식 교육을 털어내긴 어려울 것이다.
“연회가 끝나고 자정쯤에 사람을 보낼게.”
“사람?”
“우리 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잖니.”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어깨에 친근하게 손을 올렸다.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은 채, 리에르는 차갑게 웃어 보였다.
“나쁘진 않겠지.”
리에르는 아르미안의 허튼소리에 휘말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소유한 힘에 대해서 부정하고, 죽음을 예고하는 그녀의 허세에 앙갚음을 해줘야만 했다.
아르미안이 어떤 음모를 꾸미든지 간에 그 자리에 그녀가 나올 것이 분명했고, 다른 녀석들을 끌고 나와도 패배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것은 티미뿐만이 아니라 아르미안, 그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단 측의 권력자인 아르미안은 더 이상 리에르에게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돌아섰다. 교단 측의 권력자인 그녀를 찾는 귀족들도 많았고, 아름다운 자태에 속아 넘어간 남성들은 발이 저린 줄도 모르고 멍해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아르미안이 페리안의 사람과 오랫동안 대화 나누는 것은 불필요한 소문을 부를 수 있었다.
“위대하신 대 오트리아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이곳에 모인 귀빈들을 환영하신다 합니다!”
높은 단상까지 올라간 황제를 옆에 둔 채로, 티미 아크우드가 연회장의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황제를 대신해서 발언하는 티미의 패도는 황성 내에서 막을 사람이 없었다. 이미 기울어 가는 황성의 권력도 그렇지만, 심약한 황제는 대신들의 권력 다툼에 이골이 나 있었다.
황제와 아크우드 가문, 교단의 거대한 권력을 등에 업은 티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입지가 커져 있었다. 황제를 우리 안에 가둬놓고 좌지우지하던 루나레이크의 여왕조차도 교단의 힘을 등에 업은 티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었다.
“폐하께옵선 이 광대한 대륙의 일인자로서 당신의 땅에서 탄생한 많은 영웅을 이곳에 초대하였소! 직접 인재를 만나 치하하고자 하니, 폐하의 은혜에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소!”
“황제 폐하께 영광을!”
“오트리아 황제 만세!”
누군가가 잘못 보면 티미가 황제로 보일 지경이었다.
리에르는 티미의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티미는 겉으로 성실함과 부드러움을 보이지만, 속으론 음흉한 인물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리에르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렵게 모신 영웅들을 황송하게도 황제 폐하께서 소개하신다 하오!”
티미는 목청껏 소리쳤고, 정작 황제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 주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오대 강국의 아렌, 대륙 최강 기사단을 이끄는 아렌의 혜성이 황제 폐하를 뵙기 위해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황제의 명으로 인하여 대륙에 이름이 알려진 영웅들이 초대되었단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리에르도 내심 형이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했었다.
“십일검 기사단, 제2대 단장인 파에트 아르빈트입니다!”
연회장 안의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검푸른 머리카락의 청년이 올라섰다. 말끔한 흰색 슈트에 크라바트를 맨 파에트를 보고 몇몇 귀부인들은 어머나, 하는 탄성을 지르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왕권과 작위는 세습제로 돌아가지만, 기사단의 단장직은 실력으로 물려받는다. 자신의 아버지를 뒤따라서 대륙 최강의 기사단을 운영하게 된 남자, 그것도 20대의 젊은 나이로 당당하게 요직에 앉은 파에트는 왕자님 같은 존재였다.
진짜로 왕자 격인 앤 루드비히 오트리아는 금빛의 머리카락을 제외한다면 평범한 마스크에 작은 키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계급을 이용해서 온갖 난봉질을 해대는 데에 반해서 파에트는 잘생긴 얼굴에 매력적인 미소, 그리고 천재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리에르는 오랜만에 형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형은 십일검의 단장이 되어 있었다.
어딘가에 자랑이라도 하고 싶지만, 자랑을 할 수가 없다.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었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다.
“페리안의 고귀한 꽃, 유이 페브리안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유이의 주변으로 귀족들이 한 걸음씩 물러났다. 연회장 안에 모여든 귀족들은 박수갈채를 보내며 그녀에 관한 관심을 떼지 않았다. 유이는 당황하지 않고 가슴께를 손으로 가리며 살포시 고개와 어깨를 숙이며 화답했다.
티미는 파에트와 유이에게 높은 관심을 보내는 청중들을 둘러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명백한 살의로 번뜩이는 티미의 눈길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바로 옆에 있는 황제마저도 티미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한 채, 파에트와 유이를 보고서 만족스러운 듯이 가슴 설레하고 있었다.
“아렌의 혜성에 지지 않을 용맹으로 북방 열 개의 영지를 점령하고, 혼자서 군대를 돌파했다는 흑사자가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순식간에 연회장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페리안 내부에서도 흑사자의 얼굴은 비공개되어 있었다. 스스로의 무위를 자랑하지도 않았고, 전쟁터가 아니면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흑사자는 힘없는 서민들을 핍박하는 군대와 단신으로 겨루고, 위기에 빠졌던 페리안의 수도를 구해냈다. 또한, 유트 왕의 명령으로 북방 야만족과 전투를 벌여 그들의 열 개의 성을 무혈로 점령한 사내는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자, 나서라. 리에르 아르빈트!’
티미는 이죽거리는 웃음을 입가에 그려냈다.
티미의 생각을 모르는 연회장 안의 사람들은 기대감에 빠져 흑사자의 존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이 뒷걸음질을 했다.
티미는 리에르가 흑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이용한다면 순식간에 페리안을 흔들 수 있다.
대 죄인의 정체가 지금 이곳에 있다고 밝혀진다면 빼도 박도 못하게 된다. 아무리 본인이 리에르 아르빈트가 아니라 해도 먼저 소개받은 파에트와 닮은 얼굴 자체가 증거였다.
밝히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쉬운 일이었다.
‘함정.’
리에르는 안일했던 자신의 행동을 자책했다. 어쩌면 교단 출신인 티미와 아르미안이 손을 잡고 함정에 빠뜨렸을 수도 있었다.
리에르가 어디로 도망칠 수 없도록 일부러 시간을 끌고, 티미가 청중들의 시선을 끌어모아 세상 밖으로 적혈의 악마를 끄집어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리에르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 하나만 파멸하는 것이 아니었다. 눈앞의 유이와 페리안을 다스리는 유트에게까지 고스란히 피해가 전해지게 된다. 최악의 경우 페리안 내부에서 왕에 대한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적혈의 악마에게 피해를 본 모든 국가가 들고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단지 한 명의 살인마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쟁은 대의명분만 있다면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었다. 전쟁에 있어 명분 싸움이란 것은 승패를 가를 수도 있는 중요한 소재였다.
‘그런 일까지 저질렀는데도…….’
리에르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 죄를 짓는 모순적인 행동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 황제 폐하께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소. 축복받은 황성의 신하들이 페리안의 흑사자를 뵙고 싶어 하오. 페리안의 고귀한 꽃이여, 그대의 기사를 부르시오. 황제 폐하께 집정관(Consul)이란 영광을 얻은 나 또한 흑사자의 영웅담을 듣고 싶소!”
리에르의 시야 안으로 유이의 당황스러운 모습이 보였다. 티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인맥이 뛰어나, 집정관이라는 직위에 있었다. 집정관이란 군사와 정치의 가교 역할로 그의 전과와 나이를 생각한다면 엄청난 특혜였다.
썩어빠진 황성의 관리들과 밀약을 맺은 그에겐 어떠한 반론조차 거론되지 않았다.
나가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엄청난 무례였고, 황제의 체면을 구기게 만드는 격이었다.
리에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 있던 아르미안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정말로 악연이 많구나, 리엘.”
아르미안의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에도 리에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갈등이 일어나고, 혼란이 일어날 때 누군가가 단상 위로 올라서는 것이 보였다. 곧 관중들 사이에서 오오 하는 감탄사가 펼쳐지며 박수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갈색 곱슬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레온은 관중들의 박수갈채에 여유롭게 접대용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슴께로 손을 올리며 고개를 숙인 그의 품격 있는 모습에 연회장의 귀족들은 감탄했다.
북방 민족은 미개하다.
지금까지 이들이 알고 있던 편견이었다. 하지만 품격 있는 레온과 아름다운 유이. 두 사람은 고정관념을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티미는 처음 보는 인물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정열적인 붉은색 레이스 상의와 품격 있는 레깅스 바지, 무릎까지 오는 고급스러운 가죽 부츠는 자신이 알던 리에르가 아니었다.
유이는 한순간 당혹감을 품었다가 사람들이 별 의심 없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인 것은 흑사자의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그의 복장이나 특징들이 소문으로 나돌긴 했으나, 파티장에서 그런 부분까지 따지고 드는 인물은 없었다.
‘뭐, 내일도 있으니까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티미는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아 짜증이 났다. 하지만 애써 표정을 바꾸어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짜증은 났으나, 티미는 애써 표정을 바꾸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페리안의 흑사자는 피만 뒤집어쓰는 광전사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패션에 민감한 청년이었군요.”
하하하, 웃는 귀족들의 즐거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레온은 티미의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황제는 소문으로만 듣던 흑사자를 매우 기대하고 있었으나 다소 실망한 듯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멀리서 찾아온 그를 치하해야 마땅하지만,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레온의 사타구니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대가 흑사자요?”
황제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소년의 눈망울을 한 채로 입을 열었다.
대륙을 점령한 천년 제국, 그 불멸의 땅을 다스리는 제왕은 동경을 품고 있던 영웅 중 하나를 본 것에 감명받은 듯 보였다.
“페리안의 용맹한 기사들은 그 누구나 흑사자라 합니다.”
교묘한 말이었다. 언뜻 듣기로는 과분한 호칭을 사양하는 듯 보였지만, 정작 흑사자 리에르를 사칭한 것도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 뜻을 충분히 알아듣는 티미는 최대한 표정 관리에 힘을 쓰고 있어야 했다.
‘쥐새끼 같은 놈.’
처음 보는 레온에게 티미는 속으로만 욕지기를 내뱉었다. 레온이 한 말을 티미와는 다르게 알아들은 황제가 기쁜 듯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