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41)
레필리아 레소드-242화(241/398)
레필리아 레소드 242화
마왕의 부활(1)
“그렇다면 페리안의 흑사자,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오.”
“제 이름은 레온 폴 하르츠, 폐하의 위명에 비하면 미천할 뿐입니다.”
북방 대륙의 대귀족으로 군림하던 하르츠 후작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지금의 유트가 왕이지만, 한때는 실질적인 북방의 왕은 하르츠 후작이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페리안의 소개 이후로 오대 강국 중 하나이자, 철의 대공 이실렌 폰 페를네아브를 대신해서 온 사람들이 소개되었다.
로빈타 왕국이 자랑하는 후퇴를 모르는 순백의 기사, 템플 나이트의 에이스(Ace)인 피스 메이커 그리고 이실렌이 너무도 아끼는 마리엔느가 함께 등장했다.
시골 청년같이 수수한 인상을 가진 피스를 보고 귀족들은 실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그의 표정과 행동이 너무나 굼뜨게 보였기 때문이다.
연회장의 분위기에 짓눌린 듯이 보이는 남성이 템플 나이트의 에이스란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물론 전장에서 만나는 피스 메이커와 평상시의 피스 메이커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사복검을 휘두르는 그의 맹위는 그야말로 사신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적의 기사단에서 단장급, 지휘관급만 골라서 제거하는 그는 크샨타 점령의 날에 에이스라는 칭호를 부여받았고, 철의 대공 이실렌이 자랑하는 일등 기사가 되어 있었다.
피스의 대단함을 모르는 귀족들은 그에 대한 갈채보단 그의 곁에 있는 이실렌의 손녀딸, 마리엔느에게 관심을 쏟았다. 결혼 적령기가 되어 그 미모가 더욱 눈부셔지고 있는 그녀는 황성 파티장에서 유이를 위협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로빈타 왕국의 두 사람을 보면서 리에르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에레사와 닮은 여성, 그녀를 구하려다가 오해를 사서 공격을 받았고, 그 결과 생명의 위협을 겪었었다.
페이서스에서 가족을 잃고, 복수로 살아가는 피스를 보자 가슴 한편에서 깊은 죄업이 느껴졌다.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다…….’
리에르는 연회장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걸음을 움직였다. 마리엔느는 오해를 풀었기 때문에 그때와 같은 무모함을 보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본디 선량한 그녀의 성격으로 보았을 때는 사과를 하겠다고 할 테고,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피스 메이커였다.
비록 철의 대공 이실렌과 동맹을 맺은 사이지만, 피스와는 철천지원수였다.
어떤 짓을 할지 모를 시한폭탄과 같은 인물이기에 자리를 피해 몸을 사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데이트 잊지 말렴.”
아르미안이 들고 있던 잔을 들어 보이며 윙크를 해 보였다. 리에르는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의 인사를 무시한 채 빠져나갔다.
유이의 안전을 위해서 함께 왔지만, 오히려 큰 위기를 주게 생겼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순백의 제복, 목에 불편하게 감긴 흰색 크라바트를 풀어 헤치며 리에르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지 않도록 시커먼 옷으로 몸을 가리고 싶었다. 불안한 마음과 약해지는 의지, 그리고 밀려드는 광기를 숨기고, 감출 수 있는 칠흑으로 바꾸고 싶었다.
‘오늘 밤.’
연회장의 문을 나서며 리에르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광기로 중독된 눈동자가 번뜩이며 머리를 어지럽혔다.
‘죽이겠다. 나를 막아서는 불행들을.’
연회장을 빠져나온 리에르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길어지는 새벽을 달래는 연주 소리는 황성 안을 가득 메웠다.
끊임없는 대화와 가식적인 웃음소리가 만연한 사교의 전쟁. 아무 생각 없이 평화로운 그들과는 달리, 리에르는 심하게 뛰는 가슴팍을 움켜쥐며 인상을 썼다.
두려웠다. 그동안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던 평화가, 행복이 무너질 것 같은 조짐이 무서웠다.
떨려오는 오른손. 무섭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감추기 위해 왼손을 들어 감싸 쥐었다. 멈추지 않는 떨림은 리에르를 현실 도피하게 했다.
‘나의 현실을 지켜야 해.’
어두컴컴한 숙소 안에서 리에르는 이를 사리물었다.
후우, 하는 숨을 내쉰다. 조금은 진정이 된 리에르가 입술을 열어 보였다.
“아르카.”
-네, Master.
“아까 그 악녀가 한 말을 어떻게 생각하나?”
평소에 깝죽거리는 것만 제외한다면 아르카는 훌륭한 파트너였다. 그 어떤 강도에도 버텨내는 무기, 강철 갑옷도 베어내는 강력함과 더불어 상황에 맞게 부여되는 다양한 변형 이펙트.
무엇보다 아르카는 때에 따라 필요한 조언도 줄 수 있었다.
-분명한 답을 드리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르카의 말을 들으며 리에르는 차갑게 웃어 보였다. 짚이는 것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처음 리에르가 각성해서 포스를 사용했을 때 몇 시간이고 힘을 뿜어내며 파괴했었다. 하지만 인피니티 포스로서 각성했을 때엔 유지 시간의 한계가 있었다.
그것을 단순히 새로운 힘에 대한 적응력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엘 역시 그렇게만 대답해 주었다.
아르카는 사용자의 건강, 또한 체력을 측정해서 보고하는 기능이 있다.
리에르가 인피니티 포스를 사용할 때마다, 아르카는 한계 시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었다.
“죽는다는 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있단 건가?”
-Master가 포스를 사용할 시 심각한 수준의 Rebound 징후가 있었습니다.
리에르는 코웃음을 쳐 보였다. 포스를 잃었던 그때처럼 몸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쪽이 거짓말 같았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잃을 것이 없던 시절의 죽음은 달콤한 자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즐거운 일이 반복되고 있다. 내일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그 모든 것을 잃고 암흑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때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름에 가려진 달은 자정을 의미하듯 은은한 빛을 흩뿌린다. 피할 것은 없기에 리에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보였다.
처음 보는 남성이 인사를 하며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입을 열어 보였다.
“모시러 왔습니다.”
리에르는 대답 없이 제복 상의를 걸쳤다. 연회장에서 입었던 백색의 제복은 침대 위로 던져놓았고, 에레사가 감아주었던 크라바트는 짓뭉개져 있었다.
리에르는 지금 말 그대로 흑사자라는 이명에 걸맞은 얼굴과 차림새로 바뀌었다. 그는 아르미안의 심부름꾼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내성에서 떨어진 숙소에서도 은은히 들려오는 연주 소리. 그것은 사교를 목적으로 먹고 마시는 파티가 아니라, 그윽한 음악의 향수를 맡기 위해 만들어진 연주회로 착각되었다.
그 밤의 향연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울려 퍼지고, 점차 그 소리가 멀어지고 들리지 않는 위치까지 오게 되었다.
“선지자께서 기다리십니다, 흑사자 님.”
“고맙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교단의 심부름꾼을 향해 리에르는 차갑게 웃어 보였다. 그와 동시에 그는 오른손을 허공에 털어내며 기류를 끌어모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심부름꾼이 다급하게 방어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이미 리에르의 손안에서 시뻘건 칼날이 만들어진 지 오래였다.
턱!
둔탁한 소리와 함께 리에르의 손은 심부름꾼의 가슴을 강타했다. 시뻘건 칼날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날카로운 핏빛 칼날은 절대적인 죽음으로 손짓했다.
순식간에 찾아온 죽음. 그것을 거부하려는 듯이 심부름꾼은 끔찍한 비명을 토해내려 했다. 하지만 리에르의 다른 한 손이 입을 틀어막으며 냉소하였다.
“시끄럽게 굴면 곤란하잖아.”
“끄우으, 끄아아아아악.”
심부름꾼에게서 눈물과 핏물이 뒤엉켜져 나왔다. 사내가 몇 차례 간헐적으로 몸을 흔들다가 축 늘어지는 것을 보고 리에르는 그를 놓아주었다.
쿵!
리에르는 땅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인제 와서 한두 사람 더 죽인다 해서 죄책감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교단의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리에르는 감정 없는 눈으로 허공에 피 묻은 손을 털어 보였다.
거무스름한 달빛 아래 붉은 광기를 싣고 있는 눈동자. 어둠 속에 녹아드는 듯 보이는 칠흑의 제복을 흩날리며 리에르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르미안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릴 정도로 악랄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대화를 하자고 불렀어도, 또 다른 함정에 빠뜨릴 위험이 있었다.
리에르는 주변에 숨어 있을 적들을 생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이상할 정도로 주변이 적막했다. 아무리 황성이라지만 연회장에 온 시선이 쏠려 사람은 없었고 모든 것이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간혹가다가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아니라면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춰 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어둠이었다.
어둠 속 낯익은 진녹색 머리카락을 보고 리에르는 경계의 눈빛을 그려 보았다.
“같이 온 사람은 제거했니?”
“그 친구와 얼굴을 마주하고 묻는 것도 좋겠지.”
리에르는 오른팔을 어깨까지 수평을 그리며 뻗어냈다. 칠흑의 어둠 사이로 검은색 큐브들이 리에르의 손목과 손등에서 회전하였다. 이내 어둠에 녹아든 장도가 달빛을 반사하며 리에르의 손에 쥐어졌다.
아르미안은 자신을 향해 학살자의 눈동자를 빛내며 다가오는 리에르를 보고 처연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할 말이 있어, 리엘.”
“부르지 마라, 괴물아!”
분노가 표출된 리에르는 살벌하게 아르카를 들어 올렸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에라도 그녀를 토막 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리에르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지독한 일을 당했지만, 절망적인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 수도 있었다.
그런 리에르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르미안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평소처럼 요염하지도, 청순하지도 않은 그녀의 미소는 처연할 정도로 슬퍼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리에르는 한순간 분노가 흔들렸다. 어째서 저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불렀는지 알 수 없는 그녀의 행동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너에게 모든 것을 말해줄게. 네가 알지 못하는 것, 그리고 네가 알아야 할 것들까지.”
그녀의 슬픈 눈동자는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리에르는 이를 악물고 아르카를 쥐었다.
처음부터 다정함으로 다가와 자신을 이용할 만큼 이용하고, 죽도록 버려두었던 것을 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르미안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리에르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고, 그가 삶의 의지를 버리지 않도록 유도해 왔다.
“그래, 잘난 변명을 들어나 볼까?”
지껄이고 싶은 대로 지껄이라 하고, 자신은 필요한 정보만 얻으면 된다.
리에르는 비아냥을 품으며 그녀를 베려는 것을 멈췄다.
아르미안은 힘없이 웃어 보였다. 자신의 가슴께로 손을 가져가고, 다른 한 손을 들어 리에르에게 손을 뻗어낸다. 그녀는 애처로워 보였다.
“나와 동맹을 하자, 리엘.”
“뭐?”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리에르는 화도 내지 못하고 얼이 빠져 있었다. 진녹색의 머리카락은 밤바람에 흩날리며 가냘픈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찬 밤바람은 마치 앞으로 있을 폭풍을 예고하듯이 천천히 일었고, 서늘함이 몰아들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루비빛으로 물든 리에르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