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42)
레필리아 레소드-243화(242/398)
레필리아 레소드 243화
마왕의 부활(2)
밤바람이 전해주는 환상곡. 자정을 넘어선 시각에도 경쾌한 음악들이 들려왔다.
쐐애액 쐐애액.
풀벌레들이 부르는 밤의 교향곡도 그에 지지 않을 만큼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시커먼 구름이 달의 눈을 가리고, 별의 눈을 막아선 칠흑 같은 어둠. 홀로 창밖을 바라보며 에레사는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지독하게 쓸쓸했다. 건너편 방에선 자신을 싫어하는 멜런이 잠들어 있다. 고독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사람은 호화로운 파티장으로 사라졌다.
신분의 차이가 아니라면, 호화로운 파티장에서 그와 함께 맛있는 포도주를 마시고 춤을 추었을 것이다.
‘무슨 망상인지…….’
금빛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에레사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신에게서 세상을 빼앗아 버린 존재, 그렇지만 단 하나의 세상이 되어버린 그와 로맨스를 꿈꾼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끼이익!
창가에 턱을 괴고 있던 에레사는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서 고개를 돌렸다. 시커먼 그림자를 뿜어내며 방 안으로 들어서는 건장한 남성은 그녀에게도 낯익은 사람이었다.
“리엘……?”
에레사는 파티장에 있을 그가 눈앞에 있는 것이 의아했다.
뚜벅뚜벅.
리에르는 검은 제복을 펄럭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오는 리에르의 얼굴은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마치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리에르는 에레사에게 대답하며 사라질 것 같은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눈앞에 숨 쉬고 있는 에레사가, 생기 넘치는 금발 머리 아가씨가 눈앞에 있었다.
리에르는 천천히 양팔을 들어 올렸고, 이내 그녀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에레사는 벗어나지도 못한 채, 당황스러워하였다. 유이의 곁을 지키고 있어야 할 리에르가 갑자기 자신의 방에 나타난 것도,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도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꽉 쥔 리에르의 팔은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녀를 감싸 안는다. 꼭 붙들지 않으면 손안에서 사라지는 듯이,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이.
리에르가 너무 세게 끌어안은 덕분에 에레사는 답답함을 느껴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리에르의 팔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넌 포스를 되찾았다고 생각하니? 아니, 그럴 리가 없잖니. 엘이 준 마약이 그렇게 편리한 물건이라 생각했니?」
아르미안의 비정한 말이 리에르를 짓눌렀다. 아르카의 반응, 그리고 포스를 사용하면 체력이 고갈되어 버리는 이상 반응들이 이제서야 이해가 갔다.
「그 약이 뭐로 만들어졌을 것 같아?」
아르미안이 재미있다는 듯이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포스를 되찾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한 가지다.
죽음, 그 단어를 의미했다.
“대체……!”
에레사는 리에르에게 소리 높여 말했지만, 끝까지 입을 열 수 없었다. 갑자기 덮쳐져 온 검은 그림자. 리에르의 입술이 에레사가 하려는 말을 막아낸다.
지금은 하고 싶은 말도, 하려는 말도 막아내려는 듯이.
「엘 파실드는 널 속이고 있어.」
아르미안의 슬픈 얼굴,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쏟아지는 믿기 어려운 현실은 리에르를 몰아붙였다.
리에르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에레사가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 거친 행동과는 다르게 따뜻한 손길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부드러운 입술과 혀끝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에레사는 더 이상 리에르를 거부하지 못한 채, 깊고 진한 키스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에레사 레이나드의 부모님을 죽인 것은 네가 아냐.」
자신의 실수로 인해서 모든 것이 불행하게 돌아간다고 이해했었다. 하지만 안일한 리에르의 생각은 산산이 부서졌다.
아르미안은 처연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현실을 깨우쳐주었다.
「죽인 것은 엘 파실드야. 넌 그에게 이용당하고 있어.」
“리엘…….”
에레사의 부름에도 리에르는 답을 하지 않았다.
에레사는 리에르를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손에 힘을 풀은 채로 허공에 늘어뜨렸다. 안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지독한 애증으로 연결되었다. 서로에게 솔직한 마음을 비치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두 소꿉친구는 뜨거운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에레사는 눈과 귀, 턱으로 이어지는 숨결을 느꼈다.
리에르의 입술이 에레사의 부드러운 목선을 타고 내려왔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허리를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에레사는 부끄러운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몸이 뜨거워졌다. 뜨거웠다. 숨이 뜨거워졌다.
에레사는 어느새 침대 위에 눕혀졌다. 자신도 모르게 몸에 힘이 풀린다. 그것을 인지하자 에레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 잠깐만.”
“응.”
“날…… 사랑하니?”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 리에르에게 무슨 일이 있었든 지를 물어봐야 했다. 어디까지나 리에르는 자신에게 있어서 원수였고, 그와 이어지는 일은 없었어야 했다.
하나, 에레사는 그러한 차가운 현실보단, 리에르의 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비명에 사라진 부모님을 생각하면 깊고 깊은 죄가 느껴져 수치스럽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과 지지 않을 정도로 큰 단 하나의 세상, 리에르에 대한 애정은 그녀에게 그런 말을 내뱉도록 유도했다.
“그래.”
리에르에게서 따뜻한 말은 기대하지 않았다. 애당초 어렸을 적부터 리에르는 섬세한 성격도 아니었고, 솔직한 사람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가 다른 이성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에레사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달랐다. 리에르의 말 한마디에 묘하게 편안함을 느꼈다.
“거짓말쟁이…….”
에레사는 최대한 증오스러운 표정으로 리에르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만 생각할 뿐이다. 슬픔을 일으키는 그녀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리에르는 그녀의 눈물을 훑고, 부드러운 금빛의 머리카락이 내려앉은 이마를 쓸어 올린다.
「유트와 유이, 두 남매는 베리타스 생존자로서 진실의 눈동자를 소유하고 있지. 알고 있었니?」
모르고 있었다.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유트와 유이가 베리타스라는 알지도 못하는 혈족이란 것도, 그들에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을 힘이 있었는지조차도.
「넌 그들에게 투명한 유리구슬이었던 거야.」
「닥쳐!」
리에르는 아르미안의 말을 거부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허무맹랑한 소리란 것은 알고 있으나, 무조건 거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의심쩍은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 엘 파실드에 의해서 부모님을 잃고, 행복한 일상을 누리지 못한 에레사가 불쌍하고, 가련했다.
에레사에게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 그녀가 지독한 애증 덕분에 괴로워하는 것을 벗어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불행을 막을 수는 없다. 원수를 늘린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까.
그녀의 분노를 자신이 안고, 그녀의 복수를 자신이 대신해 주는 것. 그때 가서 말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리에르는 가엾고도 사랑스러운 에레사의 뺨을 어루만졌다.
자신에게는 이제 믿을 것이 없었다. 자신을 도와준다고 생각했던 엘 파실드는 지금껏 자신을 우롱하고, 운명을 뒤틀었다. 그리고, 그가 호의를 보이며 줬던 약품은 마지막 한 점의 생명력까지 쥐어짜고 있었다.
마약을 먹이고 조종하는 것도 모자라서 호의라는 맹독을 그에게 계속해서 주입하고 있었다. 리에르는 당장에라도 엘 파실드를 찾아가 그를 죽이고 싶었다.
물론 아르미안도 두말할 것 없이 철천지원수였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앞선 것은 유트 남매가 자신에게 비밀을 갖고,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은 리에르에게 큰 충격을 불러왔다.
에레사의 눈물 맺힌 눈동자는 아름다웠고 슬퍼 보였다. 그녀를 감싸줄 수 있는 남성은 이 고독한 세상에서 리에르 단 하나다. 리에르의 손이 에레사의 옷깃을 열기 시작했다.
새하얀 살결을 가리고 있는 블라우스 단추가 풀려갔다. 에레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한 번도 남에게 허락하지 않았었다. 에레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리에르의 손길이 부드럽게 가슴을 애무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것을 반복해 확인하는 것처럼 집착했다.
부서질까 봐 두려운 듯이, 사라질까 봐 괴로운 듯이.
아니, 약탈자의 모습이기도 했다. 무서울 정도로 에레사의 몸을 탐닉하였다.
백도를 깎아낸 듯이 흰 살결이었다. 옷으로 가려졌던 곳을 하나하나 확인할수록 감정이 고양되었다. 방 온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에레사, 불행한 운명에 붙들린 그녀를 구해내고 싶었다. 이전부터 말해왔던 대로 조용한 곳에서 그녀와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겠단 꿈을 떠올린다.
복숭앗빛으로 물든 에레사의 입술에서 천천히 거친 호흡이 흘러나왔다.
* * *
“빌어먹을!”
무르익은 연회장에서 빠져나온 짧은 갈색 머리의 청년은 욕지기를 내뱉으며 직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페리안의 커다란 약점을 찾아 헤맸지만, 어디에서도 리에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히 생각이 있는 놈이라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티미가 몰라볼 리가 없으므로.
페리안의 공주, 유이는 인기가 좋아서 많은 사람이 친해지려 했다. X신인 황제마저도 유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것을 보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 녀석의 정체를 드러내기만 한다면……!”
리에르와 유트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렇게 허망하게 날릴 수는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귓가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좀 도와줄까, 꼬마야?”
굉장히 앳된 목소리였다.
티미가 돌아보자 작은 꼬마 아이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넌 뭐야? 누군데 감히……!”
가뜩이나 짜증이 나 있는데 지저분한 꼬마 하나가 반말을 한다. 티미는 대번 눈앞의 꼬맹이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어쭈?”
꼬마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음을 지었다.
우두둑.
티미는 귀에 전달되는 소리를 의심했다. 갑자기 팔뚝에서 통증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작은 꼬마의 손이 티미의 두툼한 팔뚝을 가볍게 뒤틀었다.
근육이 비명을 내지른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몸을 두들긴다.
땅바닥을 나뒹굴면서 티미는 비명을 토했다.
“내가 누구인지 몰랐으니 이 정도로 해주지.”
기가 막히게도 꼬마는 봐준다는 말투였다.
티미는 사시나무처럼 떨어댔다. 검은 머리의 꼬마 아이, 테헤라자드는 긴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면서 포식자의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는 축축하게 젖어 들은 티미의 사타구니가 보였다.
“완전히 오줌싸개가 따로 없군.”
테헤라자드는 과연 티미가 이용 가치가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티미는 입술을 부르르 떨면서 다친 부위를 감싸 안았다.
“너 이 자식…… 감히 집정관인 나에게!”
티미는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테헤라자드를 향해 이를 드러내 보였다.
“X신, 무서우면 눈 깔어. 허세 부리지 말고.”
테헤라자드의 말에 티미는 얼굴을 붉혔다. 상대는 조그만 아이지만 일반인이 아니었다.
티미는 검을 오래 갈고닦았기에 절대 허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린아이에게 비틀려 손이 부러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티미가 테헤라자드를 보고 두려운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너…… 리에르냐?”
티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성인인 리에르가 이런 어린아이일 리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소년은 리에르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테헤라자드는 티미의 말에 굉장히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록 그 자신이 시스템을 운영하기는 하지만 인간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알고리즘은 수없이 많은 데이터를 축적하며 다양한 경로값을 제시한다. 테헤라자드는 티미의 반응을 상당히 신선하게 받아들였다.
오로지 유희를 위해 살아가는 테헤라자드에게 있어서 잠시간이라도 흥미를 준다는 것은 대단히도 고마운 일이었다.
“인마, 정신 차려라.”
테헤라자드는 티미의 뺨을 몇 번 갈겼다.
티미는 몇 대 맞았다고 눈앞에서 별이 보이는 것 같았다.
“누, 누구십니까……?”
티미는 이제야 겨우 존대가 튀어나왔다. 테헤라자드는 티미의 반응을 보고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너에게 빨간 약을 줄까, 파란 약을 줄까? 골라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