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43)
레필리아 레소드-244화(243/398)
레필리아 레소드 244화
마왕의 부활(3)
“릴 경은 파티장에 오지 않는 것이 좋겠군요.”
레온은 일행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렇게 입을 열었다. 파티의 전야제는 무사히 끝났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던 일도 무사히 넘어가게 되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다.
레온이 흑사자 본인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파티에 초대된 명단만 확인해도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래, 알고 있어.”
레온의 말에 리에르는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티미는 매우 음흉하고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페이서스에서부터 유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그다.
페리안을 엿 먹일 수 있는 일을 그냥 놓칠 리가 없다.
일행이 둘러앉은 방 안의 공기는 무거웠고, 좋은 답안은 무엇 하나 나오지 못했다.
유이는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은 듯, 졸려 보이는 눈이었다. 새벽녘엔 잠든 유이의 화장을 멜런이 지워줬었다.
유이는 멜런의 고생을 치하하기보단 속눈썹에 걸린 졸음을 이겨내기 위해 한창이었다.
“정말 나쁜 사람이네요!”
멜런은 눈앞에 티미가 있으면 한 방 쳐주고 싶다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레온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과 같은 혼란의 시대에는 상대의 비밀이 있다면 캐내야 했고, 써먹을 수 있다면 이용해야만 했다.
티미의 입장에서나 레온의 입장에서나 리에르는 양날의 검 같은 존재였다.
지금은 무수한 전공을 올리며 페리안의 시민들에게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인물이지만, 진짜 정체가 밝혀진다면 정반대의 반응이 나온다.
흑사자는 페리안이 자랑하는 영웅이 아닌, 역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페리안 왕성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더더군다나 유트는 리에르의 정체를 알면서 기용했기 때문에 피해 국가의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자신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왕으로서의 그릇을 가진 유트는 판단에 사사로운 감정을 넣지 않는다.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처벌하였고, 상을 줄 때는 출신에 구애받지 않았다.
하지만 유트는 리에르에 대해서는 한없이 약한 면모가 있다.
유트가 네 번째 근위 기사인 흑사자를 총애한다며 비아냥거리는 귀족이 있을 정도였다.
방 안의 무거운 공기. 그것을 느끼며 리에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언젠가는 찾아올 줄 알았던 죄업이었다.
옆에 앉은 에레사는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에르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에레사의 표정에 당황이 물든다. 하지만 이내 편안한 표정으로 바뀐다.
멜런은 리에르를 보고 힐난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름대로 리에르와 유이가 잘되기를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엉뚱한 인물과 이어지게 되었다.
어젯밤 유이를 기다리기 위해 선잠을 자고 있던 멜런은 우연히 리에르가 에레사의 방에 들어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에레사와 리에르가 한 방에서 밤을 보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차마 유이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그녀로서는.
아니, 무엇보다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다.
유이가 아닌 에레사를 선택한 것도 그렇지만, 지금 상황도 좋지 않은데 애정 행각을 즐기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멜런은 리에르에게 실망감을 느꼈다.
리에르와 에레사 사이의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유이는 말이 없었다. 아직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리에르가 연회장을 떠난 이후에도 유이는 앤 루드비히 오트리아 왕자에게 시달렸었다.
완곡한 거절을 이해하지 못해 노골적인 거절의 뜻까지 보였다.
그래도 앤 루드비히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오늘 또 가야 한다니……. 멜런, 나 대신 드레스 입고 파티장에 가주면 안 될까……. 씻는 것 대신 향수만 잔뜩 뿌리는 아저씨들 앞에서 웃는 인형 노릇도 지겨워…….”
“남자를 쫓는 방향제라도 드릴까요?”
“그것도 좋지만, 의미는 없잖아…….”
유이는 소파에 몸을 잔뜩 기울이고서 칭얼거렸다. 남자 쫓는 방향제가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기껏 사교를 위한 자리에서 남자를 쫓아내서는 꽃이 될 수가 없다.
어제의 연회장에서는 그렇게도 당당하고 화려함을 뽐내던 유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화장 하나 지웠다고 축 늘어지는 것이 일행에게 웃음을 머금게 했다.
레온과 멜런이 웃음을 터뜨리자 유이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그들을 쏘아보았다. 그러곤 아까부터 조용한 리에르와 에레사 쪽으론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움직였다.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은 모습을 보니 유이는 가슴 한구석이 쓰려왔다. 왠지 모르게 숨을 쉬기 불편할 정도로 막막한 기분. 자신이 파티 전야제에서 시달리고 있을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딘지 모르게 리에르에게 싸늘했던 에레사의 얼굴도 누그러진 듯한 분위기였다. 유이의 힘없는 루비 빛 눈동자가 리에르의 흑요석 눈동자와 마주쳤다.
유이는 왠지 콧잔등이 시큰거려서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어제 연회장 이후로 리에르의 분위기는 무언가 이상했다.
“나중에 유트에게도 말하겠지만…….”
잠잠히 있던 리에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페리안에 도착해서 말해도 괜찮겠지만, 상황이 변할 수도 있었다.
리에르는 어젯밤에 생각했던 것을 일행들에게 말하려 했다.
“이번 황성의 파티가 끝나고 페리안에 돌아가면 난 기사 작위를 반납할 예정이야.”
멜런은 리에르의 말에 깜짝 놀라서 유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고 있던 유이는 리에르를 바라보며 동공을 크게 확장했다.
리에르는 에레사의 따뜻한 손을 꼭 붙잡았다.
망설임과 고민은 사라졌다. 이제 단 하나의 결정만이 남게 되었다.
“당신의 과거 죄업 때문입니까?”
“그래.”
리에르의 대답에 레온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레온은 처음부터 리에르 영입을 반대하는 쪽이었다.
리에르의 존재는 레온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불안했다.
막대한 인기를 등에 업고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는 유트 왕이다. 악명 높은 친구를 기사로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명성이 위축될 것이다.
시민들은 굉장히 단순해서, 백 아니면 흑으로 판단한다. 아무리 그전에 명망 높던 구국의 영웅이라 해도 한순간에 역적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힘없는 시민들의 유일한 힘이자 공격법이었다.
“오빠가 허락할 것 같아?”
유이는 지금껏 힘없는 표정으로 있다가 리에르의 말에 발끈해서 소리쳤다.
잔뜩 찌푸린 유이의 얼굴. 리에르의 표정과 말이 왠지 모르게 타인처럼 느껴졌다.
리에르는 유이가 당연히 반대하고 나설 것이라 예상한 듯이 그녀에게 시선을 건넸다.
도도하고 당당한 붉은 루비빛 눈동자.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바라보는 유이를 보며 리에르는 씁쓸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유트, 유이 남매가 가지고 있는 베리타스의 힘, 진실의 눈동자.
저 아름다운 두 눈으로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었고, 숨기고 싶은 비밀까지 전부 훔쳐보고 있었다.
유트 남매를 알고 지낸 지도 십여 년 이상이 되었고, 언제든지 말하려면 할 수 있었다. 리에르 본인은 적혈의 악마로서의 일이나 그 밖에 모든 것을 유트에게 말해왔고 비밀을 두려 하지 않았다.
아르미안의 말마따나 유트 남매가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서 비밀로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신에게 거짓을 말한다 해도 유트와 유이만은 자신에게 진실만을 말하리라 생각한다. 리에르의 인생에 있어서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친구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어제 보다시피 언제 페리안에게 피해를 줄지 몰라.”
“언제부터 그런 것을 잴 정도로 머리가 좋으셨어?”
리에르의 말에 유이는 빈정거려 보였다. 이대로 대충 말을 마무리하려 해도 유이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분위기였다. 실제로 화가 잔뜩 난 유이는 리에르와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이 말싸움은 저녁 시간대는 되어야 끝나지 싶었다.
“공주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지금 대화에 끼어들어선 안 돼.”
멜런은 괜히 말을 꺼내려다가 유이의 힐난을 들었다. 간밤에 페리안에 큰 피해를 줄 뻔했으면서도 여자와 재미를 보는 최악의 남자. 그런 사람에게 집착하는 유이가 이해되지 않았다.
멜런은 왠지 모르게 섭섭함이 느껴져 입을 앙다물었다.
“릴 경, 아니, 리에르 경의 말이 맞습니다. 그의 말대로 오늘 위기를 피했다고 내일의 위기를 면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건가요? 첫 번째 근위 기사 레온 폴 하르츠 경?”
레온의 냉정한 말에도 유이는 조소를 품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리에르의 말 때문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였다.
그녀의 루비빛 눈동자, 진실을 훔쳐볼 수 있다는 그것을 보면서 리에르는 아름답다고 느꼈다.
유이의 표정은 차가웠다.
리에르에 대한 섭섭함으로 화를 참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확실히 하지 않은 리에르 자신의 잘못이었다.
이 일은 다른 사람이 풀 수 없다. 오로지 당사자만이 매듭을 풀 수밖에.
“잘 들어, 유이.”
리에르의 말에 유이는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본다. 리에르는 그녀의 인상 쓴 모습을 보고 나중에 주름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니, 그 주름을 걱정하기 이전에 다시는 볼 수 없을 수도 있었다.
“나에게는 너희들이 필요해. 하지만 너희들에게 나는 불필요한 존재야.”
리에르의 한심한 말에 유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인제 와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리에르의 말은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주었다.
“난 최대한 빨리 페리안의 작위를 내려놓고, 전쟁이 없는,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떠날 거야.”
“누가 싸우래? 전쟁터 안 나가고 그냥 왕성에……!”
“에레사와 함께…….”
리에르의 말에 반박하려던 유이는 이내 입술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이전에도 한 번 들었던 말이지만 지금은 새삼 그 분위기와 강도가 달랐다. 말을 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리에르의 눈동자. 에레사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떼지 않는 그의 모습은 이전과는 너무도 달라 보였다.
“그……!”
유이는 말을 하려다가 목이 메었는지 도로 입술을 닫아버렸다. 복숭앗빛 나는 그녀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고, 혼란스러운 머릿속은 할 말을 찾고 있었다.
유트, 유이 남매를 아끼는 사람들은 많았다. 예전엔 친구라곤 오직 리에르밖에 없었던 그들이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존경을 받고, 동경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리에르는 부족하디부족한 자신이지만 에레사만 바라보고, 그녀의 모든 것이 되어 살아가고 싶었다.
“그건……!”
유이는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당당하던 그녀의 루비빛 눈동자는 점차 젖어갔다. 고운 뺨 위로 뚝뚝 흘러내리는 그녀의 슬픔.
생각지도 못한 유이의 눈물을 보고 리에르는 가슴 한구석이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지금의 자신은 너무나도 한심했다. 그저 그들 남매가 중요한 비밀 하나를 말하지 않았다고 서운함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심술궂게 말하고 있었다.
일렁이는 유이의 눈동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기 위해 리에르는 에레사의 손을 꽉 붙든다.
유트 남매에게 있어서나, 자신에게 있어서나 이별을 해야만 했다.
다시 페이서스의 시절로 돌아가기엔 서로에게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균열은 일어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알아차렸을 때는 메울 수가 없다.
이제는 분명히 말해야만 했다. ‘안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