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44)
레필리아 레소드-245화(244/398)
레필리아 레소드 245화
마왕의 부활(4)
“아직도 잠을 못 이루는 건가요?”
허리까지 늘어뜨린 붉은 머리카락, 달빛에 반사되어 창백하게 느껴지는 조각 같은 얼굴. 남성이면서도 요염함이 느껴지는 미남자는 테라스에 기대 있는 청년에게 말을 건넸다.
이십 대 중반의 나이로 넓은 북방 대륙을 호령하는 젊은 패왕은 붉은 미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엷게 웃어 보였다.
“생각할 것이 많으니까요.”
“당신의 몸은 당신 하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지요.”
젊은 패왕이 있게 해준 붉은 미남자, 리즈 지센라이드는 유트의 옆에 서서 탁상 하나를 끌어당겼다. 그러곤 손에 들고 있던 핏빛 포도주 잔을 들어 올렸다.
“설마 똑같이 잠을 못 자고 있던 건가요.”
“글쎄요, 주군이 잠 못 들고 있는데 불충하게 혼자 코 골 수는 없으니까요.”
리즈의 말에 유트는 하하,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거무스레한 밤공기에 창백하게 내리쬐는 붉은 달의 광기. 저 달 아래의 모든 생명체에게 음울함을 전해주는 묘한 밤이었다.
“황성에 있을 사람들을 걱정하나요? 아니면 하르츠 반란군의 일 때문인가요?”
“왕이란 걱정 많은 자의 자리이니까요.”
리즈의 말에 유트는 웃음 섞인 대답을 하였다. 황성으로 간 유이와 리에르가 잘 지내고 있을지 걱정되었다. 분명 황성 내부이니 위험할 리는 없겠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졌다.
유트도 일행을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황성 연회에 초대장을 보낸 이가 다름 아닌 티미 아크우드였다. 이전부터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남자였다.
결코, 좋은 의도는 아닐 것이다.
“별일 없을 겁니다. 리엘 군을 이길 수 있을 사람은 이 대륙에서 손꼽힐 정도입니다. 게다가 포스를 사용하면 엘과 저라도 그를 막을 수가 없지요.”
“네, 물론 녀석과 같이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죠. 그냥 쓸데없는 제 소심함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유트에게 리즈는 포도주를 채운 글라스를 그에게 넘겼다. 달의 그림자가 잔 안에 채워져 둥그런 파동을 일으킨다.
보랏빛 액체를 입안에 머금고 혀끝으로 굴리자 달콤한 향기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기분이 좋아진 유트는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시원한 밤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가 상쾌함이 느껴진다.
“하르츠군의 잔여 병력은 금방 소탕될 겁니다. 그를 따르던 귀족들도 무력으로 제압되고 있으니, 복종하든지, 반항하든지 선택하겠죠.”
리즈의 말에 유트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하르츠 후작은 유트에게 죽었지만, 그를 따르던 귀족들은 아직도 많았다.
유트가 왕이 되기 이전부터 북방 대륙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그는 귀족들의 자존심이자 핵심이었다. 하르츠 반란군은 진압되었지만, 하르츠의 뒤를 이은 발론 남작이 반란을 일으켰다.
또 다른 반란군의 일은 이미 군사인 빅스터와 근위 기사인 프세와 텟사가 출진했다. 곧 승전보가 전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의 걱정거리는 따로 있었다.
“베리타스의 혈족…….”
밤하늘에 수 놓인 별자리 아래에서 유트는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연다.
“그야말로 왕의 권능으로 어울리는 힘이죠.”
유트의 중얼거림에 리즈는 포도주의 감미로움을 음미하며 눈을 감아 보인다. 유트는 천천히 눈을 뜨며 리즈를 바라보았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유일하게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는 남자.
리에르는 유트에게 있어서 친구 그 이상의 존재였다.
한때 자신을 인간불신으로 만들었던 진실의 눈동자.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눈앞에 있는 사람의 생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왕의 힘은 그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유트는 다른 사람이면 부러워할 막강한 권능 때문에 사람을 믿지 못했었다.
웃는 얼굴 뒤로는 독을 품는, 의심과 번민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어두움에 유트는 미칠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고, 그 어떤 자도 유트에게 진실한 미소를 주지 않았다.
자신보다 더 어린 여동생과 함께 도피 생활을 하면서 얻은 것은 인간들에 대한 지독한 불신이었다. 그랬던 유트에게 리에르란 존재는 희망이었다. 인간성을 상실하려는 유트를 바로잡게 해주고,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해준 존재.
리에르는 유트 남매에게 있어서 세상의 중심이었다.
“편리하지만 불편한 힘이죠.”
리에르를 만나기 이전의 자신을 회상하며 유트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리즈는 후후,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리엘 군에게 그 힘을 숨긴 것이 인제 와서 마음에 걸리나요?”
“녀석은 나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거든요.”
목이 탄 것은 아니지만, 손에 있던 포도주 잔은 금세 비워진다. 리즈는 포도주병을 들어 유트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친구에게 힘을 사용할 사람이 아니지 않나요?”
“물론 힘을 제어하고 나서는 녀석의 마음을 훔쳐보는 일은 없었죠…….”
힘의 제어가 불가능했던 어린 시절은 어쩔 수 없이 리에르의 모든 것을 꿰뚫게 되었다.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유트는 얼마나 조심해야 했던가.
“리엘 군에게 미움이라도 받을까 두려운 겁니까?”
리즈는 다소 흥미가 당긴다는 얼굴로 눈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리에르가 절대 자신을 원망할 리는 없었다. 유트가 그를 원망할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정작 그가 무서워하는 것은 균열이었다.
단단한 믿음으로 이어져 있던 사이에 조그만 균열이 일어나면 그것은 메우기가 어렵다.
그 균열은 언젠가 둘 사이에 단단하게 잡힌 우정을 갈라 버리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말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된 기회가 없었을 뿐이죠. 이번에 돌아온다면 제 비밀들도 털어놓을 생각입니다.”
“믿을까요?”
리즈는 다소 장난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 역시 유트와 리에르가 어긋나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 녀석이 믿게 하려면 뭘 해야 할까요……. 아, 좋아하는 여자가 누구인지 맞혀볼까요?”
“그것도 괜찮겠군요. 저도 개인적으로 궁금하긴 합니다만.”
아리아 대륙의 주목을 받는 젊은 패왕과 전설의 한 페이지에 남겨진 머더러의 대화치고는 빈곤하기 짝이 없었다.
유트는 리즈와 대화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불안감을 떨쳐냈다.
친구와 술 한 잔을 기울이며 많은 대화를 하려던 유트의 생각은 결국엔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트리아 제국을 크게 뒤흔드는 대사건의 밤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기에.
* * *
“내 생각은 묻지 않는구나?”
일행들 앞에서 자기 마음대로 선언한 리에르를 에레사는 힐난하듯 말했다.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말하는 리에르의 모습은 에레사에게 있어 의외였다. 아주 작게나마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여전히 이질감이 남아 있었다.
유이를 바라보는 리에르의 시선을 에레사는 질투했다.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서 리에르와 밤을 보내긴 했지만 ‘네, 그렇습니다.’ 하고 넘어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나와 같이 가자.”
“…….”
의자에 앉아 있는 에레사를 마주 보며 리에르는 말했다. 리에르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확실하게 전하려 노력했다.
더 이상의 망설임은 리에르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에레사를 위해서, 그녀를 위해서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이후 힘이 허락된다면 꼭 엘 파실드를 죽여서 에레사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에레사를 이용한 엘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르미안은 그 이외의 정보도 알려주었다.
유트 일행과 함께 페리안으로 향하면서 만났던 엘프 가족들, 가이라와 운디라 모자도 엘 파실드에게 죽었다.
그가 안식할 수 있는 존재, 유트 남매조차도 제거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엘은 리에르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난 너를 원망해, 리엘.”
차가운 에레사의 눈동자. 그것은 이미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항상 곁을 지키며 행복한 감정을 전해주던 사랑스러운 금발의 소녀는 이제 없었다.
일그러진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리에르는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사랑해.”
스스로의 감정을 어쩔 줄 모르는 여성은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에레사는 리에르를 사랑하는 마음만큼 죽이고 싶었다. 이름 모를 이상한 소년에게 받은 단검도 항상 품에서 놓지 않았고, 언제든 리에르를 저주하려 했었다.
리에르는 에레사를 조용히 안았다. 부모님을 죽인 원수가 엘 파실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더욱 위험할 수 있었다. 선하게 웃는 얼굴 뒤로 자신의 목적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면 제거하는 하얀 괴물.
그 하얀 악마는 에레사의 폭로를 막기 위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그녀를 죽일 것이다.
엘을 죽이기 전까지는 에레사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없다.
“고마워, 절대로 널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리에르는 에레사를 안은 어깨가 축축이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당돌하던 유이의 얼굴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떨어지던 모습이 떠오르며 리에르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에레사는 리에르에게 있어서 첫사랑이었다.
그녀는 곁에 있어주지 않으면 부서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반대로 유이는 강인함이 있었고, 그녀를 지탱해 주는 많은 것들이 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리에르는 에레사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유이와 다시 재회했을 때의 그 설렘.
얼마 전까지는 잘 알지 못했지만, 리에르는 그녀에게 반해 있었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시간 동안에.
그 마음을 더욱 확실히 깨달은 것은 당돌하기만 했던 유이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도, 타인 때문이라도.
“괜찮아…….”
리에르의 흑요석 눈동자는 천천히 증오로 물들기 시작한다. 자신의 운명을 농락한 아르미안과 엘 파실드의 파멸을 생각하면서.
* * *
“무리해서 나가실 필요가 있을까요?”
“대신 나가고 싶어?”
“가능하다면요.”
멜런은 파티장에 가기 위해 드레스를 차려입는 유이를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어제는 파티의 전야제에 불과했었다. 모두가 먼 길을 온 것은 바로 오늘의 파티를 위해였다.
멜런은 정상적이지 못한 유이의 컨디션을 걱정하고 있었다.
어제 유이는 울다가 잠이 들었고, 일어나자마자 파티장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멜런은 페리안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고, 왕성이 건설되면서부터 유이의 시녀였다.
처음 멜런이 유이와 대면했을 때에는 얼음같이 차갑고, 냉랭해 보이는 인상에 주눅이 들었었다.
유이는 말수도 극단적으로 적었고,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아서 붙임성 좋은 멜런도 고생했었다.
하지만 그녀를 알면 알수록 차가움보다 순수하고 여린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은근히 허당 같은 모습으로 멜런을 웃게 한 적도 많았다.
자신의 실수를 보고 웃는 멜런을 보며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쏘아보아도, 정말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란 걸 알아가는 기쁨이 있었다.
유이와 친해지고 대화가 많아질 때부터 항상 들어왔던 이름이 있었다.
페이서스에서 소꿉친구로 지냈던 남자아이, 리에르 아르빈트. 그의 바보 같은 행동을 이야기하는 유이는 잔뜩 열이 올라 말을 했지만, 굉장히 즐거워하고 있었다.
항상 바보 원숭이의 이야기를 하는 유이를 보면서 멜런은 알 수 있었다.
도도한 공주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첫사랑은 그 바보 같은 소년이란 것을.
어깨부터 가슴께까지 훤히 드러난 흰색 드레스를 입은 유이는 머리카락 색과 옷이 조화롭게 보였다. 머리를 틀어 올려 드러난 유이의 매끄러운 하얀 목은 파티장의 남성들을 눈부시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공주님은 남자 보는 눈이 낮아요.”
멜런은 리에르의 뒤통수를 때리지 못한 것이 한이라는 듯이 주먹을 부르르 떨어 보였다.
“그래서 나도 걱정이야.”
“오늘은 능력 좋고, 가문 좋은 귀족 자제분들도 많이 모이니까 그중에서 골라보세요.”
멜런은 유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농담조로 말을 하였다. 실제로 지방 귀족들의 파티는 퇴폐적인 것도 많았다. 그리고, 황실에서 열리는 파티에서 눈이 맞아 결혼하는 낭만적인 이야기들도 없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