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45)
레필리아 레소드-246화(245/398)
레필리아 레소드 246화
마왕의 부활(5)
“남자 보는 눈이 낮아서 고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
쓸쓸한 듯이 웃어 보이는 유이를 보며 멜런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차피 리에르와 연인이 되겠다는 다짐이 있었다는 것도 아니었다. 과거나 지금에나 그저 리에르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왔다.
어차피 리에르의 마음속에는 항상 에레사가 있었고, 성숙하고 아름다운 그녀는 유이의 질투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축하할 일이잖아.’
지금껏 어긋난 사랑을 하던 리에르에게 있어서 에레사와 이어진다는 것은 분명 축하할 일이었다. 그렇기에 유이는 가슴 한편의 시린 감정을 뒤로한 채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럼 다녀올게.”
“네, 공주님.”
유이는 황성 시녀들을 더 기다리게 할 수 없어 밖으로 나섰다.
어제보다 더 화려한 격식을 갖춘 레온이 유이를 따랐다.
멜런은 마중도 나와 보지 않는 리에르를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진짜 마음에 안 드네, 여기가 지들 연애하는 곳인가.’
지금 누구 때문에 유이가 힘들어하는지도 모르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리에르가 원망스러웠다.
유이와 레온이 파티장으로 향하고, 멜런은 소파에 앉아 한가로움을 느꼈다.
유이의 시녀인 그녀로선 황성에 와서 딱히 할 것도 없었고, 페리안에서처럼 일할 거리도 전혀 없었다.
지루하다면 지루하고, 편하다면 편한 일과였다.
멜런의 그러한 편안함과는 다르게 황성 전체는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준비된 화려한 복식을 갖춘 귀족들의 걸음이 시작된다. 유명인을 보기 위해 황성 근처로 모인 시민들은 연예인을 보는 듯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짐을 알현하러 오다니.”
필 루드비히 오트리아는 모여드는 귀족들을 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힘을 얻기 위해서는 형제든 가족이든 죽고 죽이는 세계. 그 흙탕물의 중심에 선 인물은 누구보다도 순수한 감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저 핏줄 덕만 보는 버러지 황제.’
항상 그의 곁을 지키는 티미는 속으로 비아냥거리며 황제의 말에 동의하였다. 비록 아무런 힘도 없는 황제지만 티미가 원하는 위치에 서기까진 그의 존재가 꼭 필요했다.
티미는 성안이 훤히 보이는 테라스 위에 섰다. 그러고는 입성 중인 파에트를 내려다보았다. 학교에서 비록 그와 같은 학년은 아니었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웠던 인물이었다.
그는 페이서스 카에르와 카이샤에서 전설과도 같은 남자였다. 그는 모두가 동경하는 인물이었고, 모두가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티미에게조차 그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그를 닮기 위해 노력했었다.
남자가 보아도 매료되는 남자. 그것은 분명히 파에트라는 이름의 천재를 가리킨다.
티미는 파에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지금은 그를 넘어서고 싶었다.
영주가 될 것이며, 지배자가 될 것이다. 나아가서 왕이 되고, 황제에까지 이를 것이다.
그의 생각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리아 대륙의 인구 절반은 코스모스 교단의 신도였다.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거대 교단인 코스모스 교단에서는 곧 새 교황이 탄생할 예정이었다.
새로운 지도자가 탄생한다면 코스모스는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 교단을 등에 업고서 정치적인 지지를 받아낼 수만 있다면 왕, 아니, 황제가 되는 것도 불가능이 아니었다.
역사의 페이지 속에 길이길이 남을 화려한 영웅.
티미는 자신의 야망을 이뤄줄 디딤돌, 리에르의 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오지 않을 것은 예상된 일이었다. 티미는 음흉한 미소를 머금으며 곧 있을 복수극을 떠올렸다.
연회장에서 한창 파티가 벌어지고 있을 때, 리에르는 객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침대에 누워 조용히 사색을 즐기는 리에르는 일행이 용무를 마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 한구석에 무서운 생각을 품고 있었다.
‘기회가 되는 대로 티미를 죽여야 해.’
지금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티미를 살려둔다면 유트에게나 자신에게나 이득인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티미는 야비하지만, 실력은 있었다. 또한, 군대를 거느릴 수 있는 부와 명예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교단의 힘이든, 가문의 힘이든.
‘아르미안의 요청을 거절하지 말아야 했나.’
리에르의 운명을 뒤바꿔 버린 최대의 원수, 그리고 자신이 몰랐던 비밀을 이야기해 준 조력자.
아르미안은 리에르에게 동맹을 제의했다.
그녀의 제안은 터무니없는 행동이었다. 얼굴에 철판을 까는 것도 정도가 있다.
「엘보다 더 역겨운 존재가 너다.」
리에르의 선언을 들은 아르미안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마치 우는 듯 보이는 그녀는 ‘그래, 그랬었지.’ 하는 말을 남기고서 돌아섰다.
그녀를 제거하기에는 절호의 기회였다. 리에르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베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의문을 제기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이었다.
사색에 빠져 있던 리에르는 바깥에서 뛰어오는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한 리에르는 문이 벌컥, 열리는 것이 보였다.
“리엘!”
에레사는 무슨 일인지 다급한 목소리로 리에르를 불렀다. 입술 사이로 헐떡이는 그녀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땀에 젖은 그녀의 이마로 금빛의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황성에 문제가 생겼어!”
전 대륙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연회장. 이곳은 그 어떤 곳보다 경비가 잘되어 있고, 삼엄한 보안 속에서 운영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에레사의 모습을 보니 리에르는 사태의 위급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자꾸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던 이유를 생각하며 리에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황성의 파티장에 입성한 유이를 생각하며 리에르는 자리에서 다급하게 일어났다. 리에르의 입에서 튀어나온 유이의 이름을 들은 에레사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그런 부분을 눈치채지 못한 리에르는 불안함으로 인해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지금 황성이 습격당하고 있어.”
“황성이…….”
지금 황성 파티장에 모인 인물들은 하나같이 각 영지의 실력자들뿐이었다. 그런 그들이 한 우리 안에 있으니 이들을 싹 쓸어버린다면 이득을 볼 수 있는 곳은 딱 한 곳이다.
누가 뭐래도 국교로서 최고의 전파력을 가지고 있는 코스모스 교단, 그들은 교리에 미친 신도들로 이루어진 신도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단순한 종교 단체에서 국가와 맞먹는 군대를 이끌고 있기에 그들을 아리아 대륙의 오대 강국이라고도 불렀다.
무엇보다 지금 이 장소에는 코스모스 교단을 이끄는 아르미안이 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지휘관들을 잃은 각 영지에 교리를 전파하고 천천히 집어삼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교단 말고도 또 이득을 볼 수 있는 인물이 존재한다.
‘엘 파실드!’
그의 이중적인 면모를 알게 된 리에르는 교단과 함께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왠지 모를 불안감은 리에르를 걱정하게 만든다.
리에르는 에레사에게 더 설명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방에서 뛰쳐나갔다.
에레사가 오해했다 해도, 설령 유이에게 큰 위험이 없다 해도, 알 수 없는 불길함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리에르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기다려!”
에레사는 리에르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리에르는 지금 타인의 이목을 집중시켜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래도 간다. 사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레사의 눈동자에 차가움이 서렸다.
리에르가 자신에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고 에레사는 그의 심경에 큰 변화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에게 은근한 기대를 품었었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씁쓸한 배신뿐이었다.
마음속에는 다른 여성을 품고, 육체로는 자신을 품은 리에르를 보며 에레사는 냉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네게 소중한 것은 따로 있었구나.”
이미 알고 있었다.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리에르를 마지막으로 믿어보고자 했다.
그녀에게 테헤라자드라고 밝히는 소년이 다시 찾아왔다.
그는 에레사의 번뇌를 씻겨줄 제안을 했다.
「간단하잖아?」
「유이와 너. 물에 빠졌을 때 누구를 먼저 구할지를 지켜보자고.」
「자신 없어? 에헤이. 설마 그를 못 믿는 거야?」
「그거 알아? 검둥이, 아니, 리에르는 네가 원한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단다. 몰랐어? 몰랐구나. 저런. 네가 얼마나 헛된 망상을 품었는지 이제 알았겠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여자와 사랑만을 품은 공주님. 둘 중에 누구를 택하겠어?」
악마의 유혹과도 같았다.
리에르와의 평화로운 나날은 모두 꿈이었다.
리에르가 자신을 선택한 것은 그저 싸구려 동정심에 불과했으니까.
“나를 원망하지 마.”
마지막까지 돌아보지 않는 리에르를 보면서 에레사는 충혈된 눈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울 것만 같았다. 나중에 후회할 것만 같은 생각들이 물밀듯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에레사는 리에르를 마지막으로 믿으려 했고, 믿음은 보기 좋게 깨지고 말았다.
* * *
리에르가 황성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지독한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성을 지키는 경비대는 갑작스러운 공격을 당했는지, 대항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실력이 월등하거나, 예상치 못한 기습. 또는, 공격하지 않을 상대가 일시에 공격했다는 의미가 된다. 널브러진 시체들을 보며 리에르는 인상을 찌푸려 보였다.
‘유이……!’
단 하나의 친우.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 유트는 리에르를 믿었고, 리에르는 유트를 믿었다. 유트 남매에게 섭섭한 부분이 있어도, 그것은 말 그대로 삐치는 정도에 불과하다.
친우의 여동생이 죽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유트의 여동생이 아니라도 리에르에게 유이는 특별한 존재였다.
어릴 적부터 아웅다웅하긴 했지만, 소꿉친구나 다름없는 아이. 그리고 자신의 검술을 연습하도록 도와준 파트너.
당돌한 유이의 얼굴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유이나 에레사가 좋아하는 소설책에서 나오는 주인공.
자신이 그런 주인공처럼 정의롭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니, 싸구려 정의감 따위를 가지고 있었다면 리에르는 이미 예전에 죽어 없어졌을 것이다.
되도록 내일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또한, 구할 수 있다면 눈 안에 들어오는 이들에게 손을 뻗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만만하지 않았고, 처한 환경 또한 쉽사리 싸구려 정의감을 용인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지인들.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며 살아갈 내일을 제시한 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수백 명, 수천 명의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었다.
그것은 리에르만의 정의였으며,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생각이었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지독한 피비린내는 내성부터 연회장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성을 지키기 위한 근위병, 그리고 성안의 잡일과 시중을 드는 시녀와 하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카펫을 붉게 물들인 참혹한 살육 현장을 보며 리에르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리에르는 카펫을 적신 붉은 피를 손가락으로 짚어보았다. 축축이 젖는 손가락. 마르지 않아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리에르는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아르카.”
-유이라고 추정되는 암컷, 생명 반응 양호. 살기를 가진 객체는 50기이며, 곧 전투 범위 안에 들어옵니다.
파티장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시체들의 숫자는 많아졌다. 비전투원인 시녀들까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살해당했다.
이름도 모르는 그들을 동정할 시간이 없었다.
리에르는 점차 자신의 기척을 죽이면서 연회장으로 향했다.
-전투 범위 안으로 들어옵니다.
리에르는 조용히 손을 허공에 뻗어내었다. 건틀릿 형태였던 아르카는 우웅 하는 소음을 뿌리며 검은색 큐브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모습을 감출 생각도 없는지,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인물들이 검을 들고 서 있었다.
리에르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남성은 다섯이었고, 하나같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복면을 쓰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겠지.”
-대답하지 않는다에 제 검집을 겁니다.
“애초에 넌 검집 따윈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