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49)
레필리아 레소드-250화(249/398)
레필리아 레소드 250화
마왕의 부활(9)
페리안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리에르는 과거의 죄업들을 잊은 듯 보였다. 지내는 시간 동안은 평화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리엘……!”
유이는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린 리에르를 보면서 울음을 토해냈다. 레온은 잘려 나간 어깨를 붙잡고서 피를 토해냈다.
그의 몸은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차갑게 변해갔다. 진실의 눈으로 본 리에르는 지독한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상대가 페리안이든 아니든 구분하지 않고 누구든 공격한다.
리에르가 원하는 것은 페리안이 적혈의 악마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 적혈의 악마가 페리안을 이용한 거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레온의 팔을 냉정하게 잘라내 버렸다.
유이는 어렸을 적부터 리에르를 보아왔다. 그의 멍청할 정도로 순수한 모습을, 그리고 우스울 정도의 허세를 보아왔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광기와 냉정함은 유이에게 현기증마저 일으켰다.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단 것을 알면서도 리에르는 멈추지 않았다.
유이는 그의 등을 꽉 끌어안고서라도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두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사방에서 역겨울 정도의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절을 하고도 남았다.
유이는 지금의 리에르가 무서웠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그의 모습이, 차가울 정도의 냉정함이, 생각할 수 없을 광기들이 무서웠다.
“고……주님…… 피……해야……!”
레온의 턱밑으로 끈적이는 핏물이 말을 할 때마다 꾸역꾸역 올라온다.
유이는 자신의 드레스 치마를 양손으로 잡고서 쭉, 찢어 보였다. 찢긴 치마 사이로 유이의 흰 다리가 드러난다. 그녀는 레온에게 최소한의 응급조치라도 하기 위해서 상처 부위를 동여매기 시작했다.
레온의 입에서 큭, 하는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콸콸, 흘러넘치는 핏방울들 사이로 유이의 손이 떨려왔다. 그녀 앞에서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무는 레온의 얼굴은 이미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최대한 상처 부위를 묶어서 출혈을 막으려 했으나 가지고 있는 약이 없으니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대로 있으면 레온은 과다 출혈로 사망하고, 리에르의 폭주도 막을 수 없었다.
“오빠…….”
유이는 자신의 친오빠인 유트 페브리안을 떠올렸다. 지금 이런 순간에 유트가 있다 해도 좋은 방도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오빠라면 어떻게든 해결했을 것이다.
“이걸 써.”
유이는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검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잘생긴 청년이 유이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유이는 리에르와 닮은 얼굴을 보고 움찔했다. 자상해 보이는 눈동자. 그녀의 어릴 적 기억에 있는 남자였다.
파에트 아르빈트. 리에르의 하나뿐인 형이었다. 유이는 그에게 시약을 받아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레온의 잘린 어깨에 약액을 뿌리자 물컹거리는 액체가 상처 부위에 달라붙어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레온은 얼마나 이를 악물고 있었는지, 입술이 너덜너덜해졌다.
“리엘…….”
검푸른 머리카락의 청년은 안타까운 얼굴로 ‘마왕’을 바라보았다. 단 하나뿐인 동생의 살육을 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페이서스에서 벌어졌던 피의 축제. 폭룡 네버 에이지의 수하들이 한 마을을 상대로 폭식을 하던 때에 마왕이 각성하였다.
한 식구처럼 지냈던 유격 기사단은 리에르를 막으려다 전멸했다.
동생을 재회했을 때는 악마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오늘 다시 보니 페이서스의 악마가 그대로 본성을 드러낸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널 막아주마.”
파에트는 땅바닥에 떨어진 근위병의 브로드 소드를 들었다.
자신이 사용하던 무기가 아니라서 손안에 이질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무기를 가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파에트는 괴로운 얼굴을 짓고서 전장으로 향하려 했다. 그때 유이가 파에트를 만류했다.
“안 돼요……!”
“어쩔 수가 없어…….”
파에트라고 해서 동생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이는 힘겹게 자리에 일어나서 파에트를 만류했다.
“가지 마세요. 제발…….”
유이는 그렇게 오열하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금의 리에르에게 형마저 적으로 돌아서서 검을 겨눈다면 너무나 가엾었다.
“황제 폐하!”
“누구 좀 나서 보시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핏빛 마왕이 황제 쪽으로 이동한다. 귀족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비록 나약한 황제지만 그들의 권력과 정치력을 연장해 주는 좋은 수단이었다. 하지만 감히 누구 하나 황제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자는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황제는 충성을 바치는 인물이 아니다. 그저 인형에 불과할 뿐.
봉제 인형을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은 없었다.
황제의 심복이라고 불리는 집정관 티미마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갔다. 이미 말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칠흑의 날개를 펼치며 걸어오는 리에르를 보고 황제는 이를 덜덜 떨었다. 검은색의 불길한 복장. 잘생긴 얼굴의 긴 목선 아래로 툭툭, 피를 떨어뜨리며 칠흑의 검을 들어 올리는 마왕.
매혹적이고 아름다웠다. 압도적인 존재감은 실로 경탄스럽다.
황제는 죽음을 예감했다. 하지만 검은 마왕은 황제를 지나쳤다.
그는 집정관 티미를 따라가고 있었다.
“자, 잠깐만 기다려봐!”
티미는 잘려 나간 손목을 끌어안고서 리에르를 향해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넓디넓은 공간이지만 벽에 등을 대고 나니 더 이상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
감당하지 못할 절대적인 죽음의 그림자를 이끄는 마왕이 오고 있었다.
티미는 설마 리에르가 이렇게 강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교단의 개로서 활동했던 리에르는 이미 포스가 소실되었고,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알았었다.
포스가 없는 리에르는 무섭지 않았다.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교단의 살인 인형과 근위병이라면 그깟 검사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근위병은 전멸했다.
교단의 전사들은 커다란 검은 안개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기다려 주지.”
티미는 리에르가 하는 말을 듣고 금세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미쳐서 날뛰는 녀석치고는 의외로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그 생각이 착각이란 것을 알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서걱!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티미는 자신의 양쪽 발목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다. 제왕의 길을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갈 자신의 양발이, 값비싼 가죽을 두들겨 만들어진 신발과 함께 핏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네 죽음을.”
티미는 끔찍한 고통이 전신에 감전되듯이 흘러들었다. 티미는 체면이고 뭐고 둥글게 몸을 말고서 비명만 질러댔다.
“죽여 버릴 거야! 이 개자시익아아! 내가, 이 몸이 누구인 줄 알고, 이 버러지야아아아!”
리에르는 티미의 악에 받친 저주를 듣고서 차갑게 미소 지었다. 티미는 눈물과 콧물을 터뜨리며 리에르를 노려보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검은 장발의 꼬마. 코스모스 교단의 유일신인 테헤라자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티미는 이제야 살았다는 얼굴로 흐흐, 웃어댔다.
리에르는 갑자기 티미가 웃기 시작하자 픽, 비웃어 보였다.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서 늘어진 이상 그에게 어울리는 개죽음을 선사해야 했다.
리에르는 광기 어린 붉은 눈으로 손을 뻗어 보였다.
리에르의 손으로 빨려들어 가듯이 땅바닥에 널브러진 장검 한 자루가 날아들었다. 티미는 테헤라자드가 하얀색 손수건을 꺼내 드는 것을 보았다.
테헤라자드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며 티미에게 잘 가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티미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리에르의 손안에 있던 검이 날아든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티미는 입에서 피거품을 뱉어내었다. 손과 다리가 점차 마비되는 것처럼 감각이 사라지고,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티미에게서 쏟아져 나온 핏물. 그리고 함께 나온 똥오줌들이 바닥을 적시기 시작하였다. 리에르는 죽어가는 티미에게서 등을 돌렸다.
-80 Sec. Master, 한계 시간이 다가옵니다. 이곳에서 탈출할 것을 건의합니다.
아르카의 경고음을 들으며 리에르는 깊게 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권력이 땅으로 추락한 황제라 해도 제국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귀족들은 등을 돌렸지만, 그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든 자는 많았다.
곧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근위병들이 몰려올 것이다. 한계가 분명한 리에르가 이들을 전부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파티장에서 살아남은 인원은 반도 안 됐다.
리에르가 소환해 낸 검은 괴물들이 탐욕스럽게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티미를 죽여서 속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마음이 불편하기만 했다.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적혈의 악마와 페리안을 같이 보는 이가 없었다. 아르카의 말대로 이곳에선 도주하는 것만이 선택지였고, 혼자 남겨진 에레사를 데리러 가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리에르는 마음 한편으로 망설이고 있었다. 이제는 적혈의 악마로서 쫓겨 다녀야 하는 신세였다. 그런 자신이 에레사와 함께하는 것은 그녀에게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에렌…….’
너무나 자상하고 아름다운 그녀. 짝사랑, 첫사랑, 옆집 소녀, 소꿉친구.
여러 가지 의미로 표현될 수 있는 에레사. 그녀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뿐이었다.
리에르는 울컥울컥 피를 토해내는 티미를 두고서 파티장의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티미는 흐려져 가는 시야 속으로 리에르를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지독한 고통도 시간이 흐르니 점점 편안해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티미는 눈을 내리감았다.
뼈대 있는 가문과 유능한 언변을 가졌던 남자.
수많은 인맥을 토대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고 싶었던 청년. 티미 아크우드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누구도 감히 리에르를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가는 길을 막을까 봐 벽에 찰싹 달라붙어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후우…….”
피에 적셔진 머리카락이 불편했는지 리에르는 자꾸만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뚝, 뚝.
눈가를 지나고 코끝을 스치는 선명한 핏방울. 목 언저리에 멈추듯이 흘러내리는 끈적임은 불편함만을 전해주었다. 리에르는 핏물을 닦아내는 것보다 더 급한 에레사에게 향했다.
그는 자신의 등 뒤에서 유이의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에게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지금, 유이에게 주는 그 어떤 친절도 독으로 돌아올 것이 뻔한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오해와 악의를 타인이 같이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
리에르는 가족들과 유트 남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울컥, 하고 치밀어 오는 뜨거운 감정은 목구멍을 지나 얼굴을 붉힌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리에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으로 핏물이 스며들어 씁쓰름한 맛이 느껴지는 것과 함께 우울함이 끝도 없이 밀고 들어왔다.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누구보다 리에르가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이렇게 돌아선다면 더 이상 유트 남매와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날 수 없다.
이별의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다시는 웃으면서 한 식탁에서 식사하지도, 담소를 나누지도 못함을 예감한다.
파에트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기 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과 꼭 닮은 동생이지만 닮은 것은 얼굴뿐, 운명은 극과 극을 달렸다. 한 명은 아버지의 위대한 뜻을 이어 대륙의 영웅으로 자리 잡았고, 또 한 명은 대륙의 주적으로서 적의를 불러 모았다.
파에트는 리에르를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유이에게서 들은 이야기만으로 기절할 것처럼 어지럽고 혼미하기만 했다. 하나뿐인 동생의 아픈 심정이 마치 전염병처럼 옮겨붙었다. 일단 옮겨진 고통은 심장을 옥죄이고,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슬픈 예감.
리에르는 모두에게 칠흑의 날개를 펼쳐 보이며 공포를 선사했다. 파에트와 유이는 리에르의 등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질 못했다. 지금 그가 가는 길이 명백한 파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