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5)
레필리아 레소드-25화(25/398)
레필리아 레소드 25화
핏빛의 날개(3)
“일단 두 마리…….”
저택 안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피로 적셔진 리즈를 보고 경비병들이 깜짝 놀라 무기를 뽑아 들었다.
“무슨 짓이냐!”
리즈는 피가 튄 입술을 혀로 핥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세 마리…… 네 마리.”
푸쉭, 푸쉬익!
가벼운 바람의 마찰음과 함께 리즈와 마주한 사람들은 모두 사지가 절단되어 벽에 붉은 칠을 하였다.
-리즈…….
“열 마리, 열한 마리…….”
-리즈…… 그만해…….
“……마흔 마리…….”
저택은 비명과 찢겨 나가는 살가죽 소리로 가득 찼다.
순식간에 거대한 저택은 시체들의 무덤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주변이 온통 시체투성이였다.
마리의 룸메이트는 리즈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리즈 님…….”
그녀는 리즈의 표정이 냉랭한 것을 보고 입술을 떨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마리는 어떻게 되었어요……?”
그녀의 물음에 리즈는 짧은 한마디로 대답하였다.
“마흔한 마리.”
투둑.
룸메이트의 머리는 몸과 생이별을 하며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아직 상황이 인지하지 못한 머리통만 바닥 핏물에 미끄러지며 벽에 부딪혔다.
-리즈!
아르미안은 리즈를 다시 불러 세웠지만, 그는 차가운 미소만 흘리며 다음 표적을 향하여 천천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새벽이 밝아올 때 즈음에는 저택에서 더 비명도, 부서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리즈는 형상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맞아 죽은 자신의 연인, 마리의 시체를 묻어 무덤을 만들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 * *
리즈는 원하던 대로 대저택을 나왔다.
하지만 목적 없이 그는 흥청망청 살았다.
매일 밤 창부와 살을 섞었고, 밥과 물 대신 술을 마셨다.
태어날 때부터 뒷골목에서 자라왔고, 대저택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리즈는 정상적인 사고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유일한 고향이자 유일한 지옥이었던 저택, 그리고 유일한 희망이었던 마리를 잃은 상실감은 그를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다.
리즈는 저택에서 가져온 보석을 일 년 만에 탕진했다.
돈이 없으니 한량에서 강도로 돌변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불행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저택의 패물 중에 증거도 있었는지, 리즈의 살인 행각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곧 현상 수배범이 되었다.
-리즈.
“오랜만에 불러주는걸……?”
도시에서는 현상범 사냥꾼들에게 쫓기어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씻지도 못했다.
그는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졌다.
하지만 정말로 초췌해진 것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그의 마음이었다.
리즈는 아르미안의 말을 기다렸다.
그동안 아르미안도 리즈의 모습에 크게 실망은 했지만, 그의 불행한 삶에 연민을 느꼈다.
복잡한 심경으로 그를 바라보는 아르미안은 더 리즈가 망가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넌 영웅의 자질이 있어.
“킥……. 푸…… 푸하하하핫!”
리즈는 오랜만에 아르미안이 말을 걸어와서 무슨 이야길 하려나 했다가 배를 잡고 웃었다.
오랫동안 씻지 못하여 머리는 산발이었고, 흐리지만 총명했던 눈동자는 짙은 어둠이 눈 밑을 가린지 오래였다.
미남자의 모습에서 폐인으로 바뀌어 버린 모습만큼이나 그는 달라져 있었다.
“아르, 키킥……. 아르미 제법 재미있는 농담이었어.”
리즈는 턱까지 내려오는 앞머리를 걷어 올리며 나무 그루터기에 머리를 기댔다.
하늘은 맑았다.
더러운 피로 물들어진 눈빛으로 맑은 하늘을 더럽히지 말라는 듯이 수풀의 나무들이 잎사귀들을 흔들며 막아선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리즈는 자조적으로 웃어 내렸다.
그때였다.
“내 눈을 똑바로 봐. 리즈 지센라이드.”
“…….”
리즈는 잠시 하늘을 본 사이 눈앞에 진녹색 머리칼의 여성이 나타나자 움찔하였다.
가냘픈 팔과 다리, 허리를 감싸는 긴 머리카락과 크고 맑은 두 눈동자.
아름다운 여성은 핏빛으로 더럽혀진 자신에 눈을 직시하고 있다.
킥, 리즈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아르미. 이젠 내가 미쳤는지 당신이 사람으로 보여.”
아르미안은 리즈의 눈을 가리고 있는 손을 잡아당겼다.
“참 멍청한 남자야, 당신은.”
아르미안은 리즈를 껴안았다.
그녀에게서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마지 전신이 녹아들 것처럼 부드러웠다.
핏빛으로 물든 리즈의 두 동공이 순간 크게 떨렸다.
아르미안의 입술이 생기를 잃은 리즈의 입술을 감쌌다.
마치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는 것 같은 입맞춤.
그 잠시간의 입맞춤을 떼면서 아르미안은 웃어 보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현실을 회피하지 마……. 네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너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
“당신…….”
리즈는 전신에 힘이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이 미쳤는지 정상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온기가 남아 있는 입술을 여미어 움직여 보였다.
“아르미……인가, 정말로?”
“아직 힘이 부족해서 오래 있을 수는 없지만.”
아르미안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리즈는 엷게 웃었다.
“난 내 파트너의 제대로 된 모습도 몰랐군.”
“나도 마찬가지야. 너를 오래 봤지만, 너의 위험한 힘도 몰랐으니까.”
리즈는 살육의 밤 이후로 꿈틀거리는 광기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
“내가…….”
“…….”
“내가 당신을 지켜주겠어.”
아르미안이 그렇게 고백했다.
리즈는 아르미안의 맑은 눈동자를 보고서 눈가를 가렸다.
“검이 사용자를 지키면 말이 안 되잖아.”
리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처량하게 웃었다.
계기가 필요했다.
가구를 수리하기 위해서는 못과 망치가 필요하다.
도구가 준비되면 그저 망치질해 준다.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리즈는 이후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과거를 떨치고, 새로운 이상을 그리기 위해 움직였다.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힘낼 수 있었다.
리즈의 핏빛 눈동자는 서서히 제 색깔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강도질과 뒷골목 세상과의 이별을 고하고 오트리아 제국으로 떠났다.
자신의 고향이었던 루페스 왕국에서 떠나, 롬벨스 해역을 건넜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페이서스 항구도시였다.
세 개의 주요 항로를 잇는 번잡한 교역의 도시. 페이서스는 사람은 많고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었다.
활기찬 사람들의 교역 도시.
리즈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활력이 생기는 것 같은 현장. 지금까지 그가 걸어왔던 살육의 길과는 다른 곳이었다.
“이것 봐, 아르미. 이 긴 코를 단 물고기를 봐. 마치 창을 닮은 것 같지 않아?”
-어머, 나도 이런 건 처음 보네.
리즈는 생전 처음 보는 생물들을 보며 어린애처럼 좋아하고 있었다.
대저택에서 항상 어두운 모습에 조용하고 점잖은 말만 하며 스스로를 억제하고 있던 때와는 달랐다.
그런 그의 변화에 가장 기쁜 것은 당연히 아르미안, 그녀였다.
“어이구, 형씨. 안목 좀 있으시구먼. 이 청새치가 남자들 밤일하는 덴 죽인다오. 한 접시 썰어드릴까?”
해적처럼 두건을 하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남성은 청새치라는 물고기의 꼬리를 들어 흔들어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리즈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이며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아쉽게도 제 동행은 오늘은 같이 식사 못 할 듯해서요.”
“……?”
리즈는 웃으면서 생선 가게에서 멀어졌고, 아르미안은 조용히 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인다.
-마력만 다시 모이면 인간화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아직 모이진 않았지.”
리즈의 말에 아르미안은 흐응, 하는 콧소릴 내어 보였다.
리즈는 그녀의 심통 맞은 목소리를 듣고서 하하,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갑자기 시장이 소란스러워졌다.
“디타 해적이다! 디타 해적이 나타났다!”
디타 해적.
페이서스 항구 근처 섬들에서 정박하며 루페스와 페루, 오트리아 삼 개국의 항구를 틀어막고 노략질을 일삼는 해적들이었다.
아녀자들은 모두 납치하여 노리개로 삼거나 노예로 팔아버리고, 자신들에게 덤벼들 수 있는 사내들은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상어 밥으로 만들어버린다.
잔인하기로 이름난 이 해적단들이 평화로웠던 페이서스 항구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리즈!
“그래……. 아르미.”
펄션과 도끼를 든 해적들의 숫자는 대략 사십 명. 이들은 미처 경비병이 없는 사이에 마음껏 약탈하고 있었다.
경비병이 도착한다 해도, 살육에 익숙한 이들을 피해 없이 막는다는 것을 불가능에 가까웠다.
공포에 젖은 사람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도망갔다.
시장 상인들은 물건을 다급하게 챙기지만, 이미 코앞까지 칼을 휘두르고 나서는 해적이 있다.
리즈는 검을 들었다.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빛에 투영되는 검신이 눈이 아릴 만큼 맑았다.
“죽여도 되는 거겠지, 아르미?”
리즈의 선과 악 개념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없다.
아르미안이 정의를 상정해 줄 테니까.
아르미안의 미소하는 듯한 목소리가 리즈의 귓가로 스며들어 왔다.
-사람들을 지켜줘. 그것이 신의 재능을 가진 네가 갈 길이야.
리즈가 천천히 약탈에 정신 팔린 해적들을 향해 걸어갔다.
페이서스의 사람들에게 전설과도 같은 역사의 한 페이지.
이후 그는 페이서스 사람들에게 바람의 기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 * *
“바람의 기사? 학살자의 정체가 바람의 기사라고요?”
리에르는 제법 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그래. 포스 머더러가 된 것은 그 이후의 이야기야.”
아르미안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내리누르며 중얼거렸다.
결국, 리즈는 비정상 각성의 후유증을 완벽하게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는 결국, 파멸을 택했다.
아르미안은 그런 그를 지켜보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뭔가 현실감이 없는데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네가 가진 힘을 나쁜 쪽으로 빠지지 않도록 도와줄 테니.”
아르미안은 맑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리에르는 왠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근데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예요?”
리에르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주저앉아 두리번거렸다.
“심상 세계라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나가느냐고요.”
리에르의 말에 아르미안이 피식, 웃었다.
“일어나면 되잖아, 바보야.”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찍어 밀었다.
그와 동시에 리에르는 한순간 주변이 어두워진 기분이 들었다.
“리엘! 정신이 들어?”
“리엘, 괜찮아?”
리에르는 눈가를 깜박였다. 아직 시야가 흐릿해서 사물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은발 머리카락의 잘생긴 미남자와 금발 머리카락의 어여쁜 미인이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음…….”
“선생님 불러올게요, 에레사.”
유트가 다급하게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리에르는 필요 없다고, 괜찮다고 말하려 했으나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몸이 매우 무거웠다.
리에르는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리엘.”
사랑스러운 긴 금발 머리카락의 소녀.
리에르가 다칠 때마다 봤었던 그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에르는 자신의 손을 잡은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의 여자라도, 자신에게 아무 감정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리에르만의 에레사였다.
“울고 있으니까 더 못생겼어.”
“리엘……. 입원 오래 하고 싶어졌어?”
에레사의 반응에 만족하며 리에르가 입꼬리를 올렸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리에르의 시야에 낯선 것이 보였다.
방 안의 모든 사물은 마나로 이루어져 있다. 의식하지 않는 한, 보이지 않던 그것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공기가 무거웠다. 그것들은 명백하게 리에르를 향해 두려움을 표하는 듯 보였다.
“리엘?”
“응.”
리에르는 의아해하는 에레사에게 대답해 보였다.
자신의 안에서 뭔가가 달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