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50)
레필리아 레소드-251화(250/398)
레필리아 레소드 251화
마왕의 부활(10)
점차 칠흑의 깃털들이 공기 중으로 연소하고 있었다.
타닥, 타닥!
두 장의 날개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칠흑의 기운들이 모두 흩날렸다.
검은 안개 형태의 늑대들도 그 형태를 감추었다.
귀족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숨소리를 죽였다.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빠진 그들은 감히 리에르에게 복수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뚜벅, 뚜벅. 시체의 밭을 넘어서며 리에르가 파티장 바깥으로 나왔을 때 철의 소음들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리에르는 붉은 눈을 천천히 열며 자신을 가로막는 근위병들을 바라보았다. 창과 검을 쥔 그들은 리에르를 보내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리에르는 등 뒤쪽에서도 철의 소음들이 들려오자 돌아본다. 뒤쪽의 통로에서도 앞쪽과 마찬가지로 슈트 아머로 중무장한 근위병들이 보였다. 헬름 사이로 보이는 시선은 이미 각오를 다진 듯 보였다.
리에르는 입안에 스며든 핏물을 바닥에 뱉어냈다. 천천히 아르카를 꽉 쥔 손을 어깨와 수평으로 끌어 올린다.
“먼저 죽을 놈은 누구냐.”
동료들의 수북한 시체, 평범한 삶을 살아오던 이들의 목숨을 참담하게 빼앗은 악적을 눈앞에 둔 근위병들은 이를 앙다물었다. 붉은 견장과 망토를 두른 근위대장은 황금빛 검집으로 수 놓인 보검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대 오트리아 제국의 근위병이여! 너희들의 목숨으로 저 악귀를 베라!”
각오를 다지는 근위병을 보면서 리에르는 왼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수없이 많은 생명을 도륙한 악귀의 손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섬세하고 아름다운 손. 그 사이로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리에르는 시니컬하게 웃어 보였다.
“놀고 자빠졌네.”
리에르의 비아냥거림과 동시에 근위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앞과 뒤쪽에서 밀려드는 근위병들을 보면서 리에르는 냉랭한 눈으로 천천히 아르카에 힘을 주었다.
귀족들은 파티장 바깥에서 벌어지는 혼전을 보고 침을 삼키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로는 목숨을 연명한 것을 신에게 감사드리며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엄마, 엄마! 나 저 미친놈 사고 싶어! 사줘, 사줘!”
파티장의 한 편에서 긴 검은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는 꼬마가 진녹색 머리칼의 여성에 팔을 흔들며 조른다. 굉장히 즐거운 듯이 천진난만하게 소리치는 테헤라자드를 보면서 아르미안은 부드러운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왜, 구해주고 싶나? 응? 아라미아, 오 어비스의 창녀여! 사랑이라는 우스운 감정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야? 아니면 그 잘난 인간들에 대한 자애심”
아르미안이 반응이 없자 테헤라자드는 그렇게 비아냥거리며 그녀의 부드러운 팔을 홱 쳐내 보였다.
테헤라자드는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냉혹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광기 어린 그의 눈동자를 보면서 아르미안은 씁쓸하게 입술을 열어 보였다.
“그런 게 아니에요.”
“하? 아니라고? 손을 잡자고 밤에 애걸복걸하던 년이 누군데. 난 밤에 기어나가기에 발정이라도 난 줄 알았지.”
배를 잡고서 킥킥, 거리는 테헤라자드를 보면서 아르미안은 달갑지 않은 시선을 지어 올렸다.
이 세상을 창조하는 유일신. 그가 알려고 마음먹으면 모르는 일이 없었고, 그가 하려고 하면 못할 것이 없었다.
“걱정하지 말렴, 불쌍한 아라미아. 이 내가 이래 봬도 신인데 그 정도의 자비는 준비해 두었단다.”
“네?”
히죽거리는 테헤라자드의 모습을 보면서 아르미안은 반문하였다. 왠지 모를 불쾌감과 불안감이 그녀의 심장을 두드릴 때, 테헤라자드는 자신의 입에 검지를 대고서 앙증맞게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저 검둥이를 갖게 될 거야. 생각해 보니까 짱 세고 짱 강한 이 몸이 흰둥이를 조지는 것보단, 검둥이랑 싸움 붙이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거든. 너도 좋고 나도 좋고, 고맙지? 응? 응?”
아르미안의 부드러운 양손을 꼭 붙잡고서 테헤라자드는 껑충껑충 뛰어 보였다. 아르미안은 불안함이 현실이 되자 저절로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리에르가 평소의 냉정함을 잊은 채,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리에르의 정체를 폭로하는 데 도움을 준 루나레이크의 기사는 이미 몸이 썩어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미 시체가 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숨이 붙어 있던 것뿐이었다.
대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손가락에 꼽을 수밖에 없었다.
“고맙습니다.”
“데헷, 마음껏 고마워해!”
테헤라자드는 리에르 덕분에 기분이 좋은지, 자신의 눈에 V사인을 그리며 혀를 내밀어 보였다. 아르미안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파티장 복도에서 벌어지는 혈투를 바라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근위병들과 전투를 하는 리에르의 모습.
이미 포스를 유지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배운 레필리아 레소드만으로 싸우는 그의 모습은 광전사나 다름없었다. 이성을 잃어가며 오로지 살육만 찾는 그의 모습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참혹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아르미안은 입술을 꼭 깨물고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르미안이 귀족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 나가는 것을 보고 테헤라자드는 귀 끝까지 찢어질 듯이 미소를 그려냈다. 초승달 형태로 일그러진 그의 눈가는 아르미안이 각오를 다진 것을 보며 유쾌해했다.
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
아르미안은 진녹색 머리카락을 풀어 젖혔다. 한 올, 한 올 풀린 머리카락은 그녀의 흰 목선을 가렸다. 잘록한 허리 아래까지 내려진 긴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걸었다.
이제까지 공포에 젖어 있던 소년 황제는 아름다운 진녹색 여성을 보고 잠시 숨을 죽였다.
설원을 연상하게 만드는 페리안의 아름다운 공주가 청순함과 아름다움으로만 치장되었다면, 눈앞에 보이는 여성은 색기가 흐르는 요염함과 청순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소년 황제는 자신을 마주하고서도 무릎을 굽히지 않는 여성을 올려다보았다.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지만 소년 황제는 그러한 것을 호통칠 기력이 있지 않았다.
파티장은 시체 장이 되었고, 믿고 믿었던 티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무엇에 등을 기대야 하는지,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복잡한 심경에 놓여 있던 소년 황제는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여성을 보고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마치 봄의 햇살처럼 화사한 그녀의 이목구비, 요염함이 깃들인 입술이 천천히 열어지며 섬섬옥수 같은 손이 보인다.
“나를 원망하세요.”
소년 황제는 진녹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었다.
그녀는 검을 높이 감아쥐고서 가볍게 횡으로 그었다.
푸슉!
낯선 소리가 소년 황제의 귀를 간질인다. 갑자기 눈앞의 배경이 미끄러지듯이 기울어졌다. 이내 땅바닥에 얼굴을 뒹구는 소년 황제는 휠체어에 앉아 는 자신의 몸을 올려다보았다.
소년 황제는 어떻게 된 것인지 놀라 소리를 지르려 했다. 하지만 무거운 입술만 떨려오고 말은 나오지 않았다.
소년 황제는 자신의 몸에서 피 분수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천천히 눈을 감아 내렸다. 갑자기 황제가 살해당하자 광장은 경악으로 가득 차올랐다.
‘리에르…….’
아르미안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지그시 감아 내렸다. 일그러진 리에르의 운명, 그것은 이제 파멸을 향해 내디디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누구세요?」
말썽이 많아 보이는 심술 맞은 입꼬리. 호기심 많은 큰 눈망울을 굴리면서 녹슨 쇠 검에게 말을 걸던 꼬마 아이. 저주받은 운명인 자신과 연관되지 않도록 소년의 기억을 지우고 우연한 만남을 없었던 거로 만들었다. 수십여 년 이상이 지나 날짜도 셀 수 없을 고독의 시간 속에서 깜짝 만남은 그녀에게 즐거움으로 남았다.
「저 머리가 워낙 나빠서……. 7년 뒤에나 기억이 났는데, 너무 화내지 마세요.」
기억할 리 없었다. 하지만 아직 순수함이 깃들은 바보 같은 얼굴로 볼을 긁적이는 소년.
빛도 새어 나오지 않을 나무 구덩이 속에 봉인되어 있던 자신을 향하여 손을 뻗어내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구원이고 희망이었다. 오랫동안 고독과 슬픔으로 뛰지 않던 그녀의 심장이 다시 한번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도 강해질 수 있어요?」
처음이었던 것 같다. 어리숙한 소년이 기쁜 듯이 소리치고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가르친 것은 손쉽게 해냈다. 그동안 둔재라고 불리며 멸시받았던 소년이 발전하는 것을 보면서 아르미안은 기뻐했다.
소년과 함께 있는 짧은 시간은 그녀에게 행복함을 주었고, 만족감을 주었다. 소년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사랑이 아니었고, 자신이 소년을 바라보는 것도 사랑은 아니었다.
「에렌……. 좋아해.」
그동안 짝사랑만 하던 소년은 소녀에게 고백하였다. 소녀 역시 소년을 사랑했고, 그 마음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르미안은 그동안 충만했던 행복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는 단 하나의 세계가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자신에게 있어서 리에르는 단 하나의 세계였다. 식사하는 것도, 여행하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모두 리에르를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리에르에게 다른 여성이 생기고,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릴 것 같은 불안함은 아르미안을 괴롭게 만들었다. 짧은 시간 동안에 느꼈던 행복함, 그것 대신에 오랜만에 다시 고독을 곱씹는다. 아르미안의 내부 속에서 꿈틀거리는 의식은 결국 비극을 불러냈다.
「아르미안, 널 부수겠어!」
살려는 희망이 없던 청년은 자신에게 복수의 눈길을 들어 올렸다. 그런 식으로라도 좋았다. 그가 자신을 잊지 않기를 원했다. 그것이 사랑이든 증오든지 간에.
지독한 외로움과 괴로움 속에서 살아왔던 그녀는 사람에게 굶주려 있었다.
진녹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청순한 여성이 얼굴에 피를 튀긴 채로 검을 늘어뜨렸다. 그 모습은 일그러진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너 혼자 싸우게 하지 않을게.’
아르미안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파티장의 바깥에서 끔찍한 비명이 가득했다. 더 이상 연주되지 않는 음악을 대신하여 울려 퍼지는 근위병들의 비명.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아르미안은 냉랭한 눈동자를 열었다. 그녀는 두려움을 몰아내지 못한 관객들을 상대로 피가 떨어지는 검을 들어 올리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코스모스 교단은 오늘을 기점으로 성전을 선포합니다.”
* * *
“미안하지 않아…….”
침대 위에서 양쪽 무릎을 가슴께까지 끌어안은 에레사는 흐릿한 눈동자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랑을 속삭이는 리에르, 그리고 부드럽게 키스하면서 이마를 쓸어 올려주는 그의 모습은 진실되어 보였다.
부모를 죽인 원수란 것을 알면서도, 에레사는 리에르의 육체를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연결된 것이 행복하기도 했다.
리에르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유이 페브리안으로 향하는 그의 눈길을 에레사로선 막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이 마지막 기회이자 선택권이었다.
그때 에레사는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챙!
검과 검의 굉음. 고막을 찢는 듯한 끔찍한 비명은 에레사를 깜짝 놀라게 했다.
무기를 휴대할 수 없는 황성에서 전투가 벌어진 일은 없었다. 이전부터 없었던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투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에레사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