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52)
레필리아 레소드-253화(252/398)
레필리아 레소드 253화
마왕의 부활(12)
이미 차갑게 식어가는 리에르.
그의 배를 꿰뚫은 테헤라자드의 단검을 빼야만 했다.
“칼리프 니체 대답 가능해?”
아르미안은 혼자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반응하듯 치지직 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칠흑의 검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직……. 활동…… 가능합니다.
“리에르의 생명 반응 정보 전달해 줘.”
-Mas……. 침묵……. 펄스 신호 전……개 정지…….
아르미안의 부드러운 손길이 단검의 끝자락을 움켜쥐었다. 단검을 움켜쥔 아르미안의 손안으로 치이익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르미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끝으로 온 정신을 쏟아냈다. 이마에서 송골송골 땀이 맺혀지며, 그녀의 손안에 흐르는 녹색 마나가 단검과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켰다.
투둑, 툭.
절대로 빠질 것 같지 않았던 테헤라자드의 단검은 아르미안의 손에 이끌려 나왔다. 아르미안은 자신의 손이 피투성이가 되었어도 무시한 채, 리에르의 뺨을 어루만졌다. 가장 큰 위협이 되는 단검은 빼냈지만, 리에르의 얼굴은 생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절대로 죽게 하지 않아.’
아르미안은 자신의 엄지를 깨물어 보였다. 입안으로 비릿한 피 맛이 흐르고, 엄지에서는 싸리한 통증이 느껴진다. 아르미안은 피가 새어 나오는 엄지를 리에르의 입가에 밀어 넣었다. 이미 말라붙은 리에르의 입술은 아르미안의 피로 촉촉이 적셔지기 시작했다.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상처 난 배를 손으로 틀어막으며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이미 늦었을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리에르는 이미…….”
땅바닥에 주저앉은 에레사는 입술을 깨물며 흐느꼈다.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몸 안으로 계속해서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면서 에레사를 쏘아보며 냉소적으로 입을 열어 보인다.
“원수를 죽였으니 속이 시원해졌을 텐데 왜 울고 있니?”
“…….”
신랄한 비아냥을 듣고도 에레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르미안도 근위병들을 뚫고 전투를 벌이며 왔기에 피로함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원래 회복 마법이라는 것이 어려운 것이기도 했으며, 체력과 정신력을 극심하게 소모했다.
집중할수록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지고, 마력이 소모되어 가지만 리에르는 꿈쩍도 하질 않았다.
“나를 죽이겠다고 큰소리치더니……. 겨우 소꿉친구에게 살해당할 거니?”
리에르가 듣지도 못할 비아냥거림을 하면서 아르미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요……. 내가 죽였어요. 내가……!”
에레사는 아르미안이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넋이 나가버린 에레사를 보면서 아르미안은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페이서스에서 에레사와 리에르, 두 사람이 얼마나 사이가 좋았으며 얼마나 귀여운 커플이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은근히 두 사람이 잘되기를 응원한 적도 있었고, 마음속 한편으로 알지 못할 질투심을 느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린 두 사람을 보면서 아르미안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에레사, 넌 이 아이를 사랑하는 것 아니었니?”
냉랭한 목소리로 차갑게 쏘아보는 아르미안을 보면서 에레사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다물었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보다 마치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고 있다는 말투에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미 일은 벌어지고, 비극만이 남았다.
리에르로 인해서 에레사는 고통스러웠다. 그가 없으므로 이제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네, 사랑했어요.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래. 네가 말하는 사랑은 주변의 환경에 따라 바뀌는 싸구려 같은 물건인가 보네.”
아르미안의 조소에 에레사는 눈썹을 찌푸리며 노려보았다. 지금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세상을 모두 잃어버린 것 같은 심정을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화가 치밀었다.
“당신이 뭘 알아요!”
에레사의 외침에 아르미안은 차가운 눈동자를 열어 보였다. 테헤라자드의 농간에, 엘 파실드의 거짓에 농락당한 그녀가 안쓰러웠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드는 것은 에레사에 대한 혐오였다. 아니, 어떻게 보면 아르미안이 이런 말을 내뱉는 것조차 우스웠다.
리에르의 인생을 가장 망치게 만든 장본인은 자신이었다.
“적어도 너보단 많이 알고 있지.”
아르미안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이체를 띄었다. 일그러진 에레사의 얼굴을 차갑게 바라보며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그녀에게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넌 이 아이가 부모를 죽인 원수로 알고 있겠지.”
진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 리에르와의 관계를 너무도 잘 알고 있자 에레사의 동공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눈물을 떨어뜨리는 그녀의 눈동자 안으로 아르미안이 비아냥거리는 입술이 보였다.
“에레사 레이나드. 네 부모를 죽인 남자는 따로 있어.”
아르미안의 말에 에레사는 고개를 저어 보이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녀의 말에 신빙성은 없다. 하지만, 에레사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녀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만약에 지금 그녀가 내뱉은 말에 조금이라도 사실이 있다면 에레사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성을 이유 없이 살해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평생을 두고도 씻을 수 없는 죄업이고, 마음의 죄로 남아버리게 된다.
단검이 뚫은 살 집에서 다시금 피가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면서 아르미안은 순간적으로 얼굴에 화색을 띠어 올렸다. 가지고 있는 마나를 싹 털어내기 시작하자 조금씩 리에르에게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리에르의 몸은 포스가 소실되고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고, 그녀가 가진 마나도 소진되어 치료하는 데에 애를 먹고 있었다.
언제든 실만 끊어지면 정지되는 마리오네트처럼 리에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리해서 포스를 사용하고, 테헤라자드의 뼈를 갈아 만들어진 단검에 찔렸으니 회생의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거짓말……. 당신의 말은 모두 거짓이에요, 리엘과 같아!”
일그러진 에레사의 눈동자. 그녀는 리에르를 살해하고서 급속도로 정신이 붕괴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 지경으로 밀고 들어왔는지, 범인이 누구인지도 아르미안은 알고 있었다.
아르미안은 약간씩이지만 온기가 돌아오는 리에르의 어깨를 잡고서 천천히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아르미안의 생기 어린 입술이 차가운 리에르의 입술을 적셔온다.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는 그녀의 행위를 보고 에레사는 광기가 섞인 눈동자를 뒤틀어 보였다.
죽어버린 리에르. 사랑하는 그를 자신이 죽였고,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세계를 넘겨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의 세계, 아니, 죽은 연인의 시체에 손을 대는 여성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핏기에 적셔진 아르미안의 입술이 천천히 리에르의 입술에서 멀어진다.
굉장히 미약하지만, 천천히 돌아오는 리에르의 호흡을 들으며 아르미안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 그가 잃었던 힘을 복원시키고 있었다.
칼리프 니체, 아니, 아르카는 전달받은 아르미안의 마력을 분해하고 재구성하여 주인의 몸에 생명 구동 시스템을 가동했다.
그때 아르미안은 뒤쪽으로 살기가 뻗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에레사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진다.
순수하고 자상했던 에레사의 눈동자는 맛이 갔다. 아르미안은 그것을 보면서 입안에 씁쓸함이 느껴졌다.
원망 어린 에레사의 눈동자가 아르미안을 향했다.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호흡이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 낭비를 할 수 없었다. 간신히 생명을 붙잡아 두었고, 만약에 다시 끊어진다면 그를 회복시킬 마력 따위는 남아 있지도 않았다.
“잘 들어, 에레사 레이나드. 네 부모를 죽인 것은 엘 파실드야.”
“뭐라고요……?”
에레사는 아르미안이 내뱉은 의외에 말을 듣고 멍한 얼굴을 지어 올렸다.
“리엘은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고…….”
널 안게 되었지. 하려던 끝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아르미안은 속으로 집어삼켰다.
생각 같아선 에레사를 제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했다간 가뜩이나 사이가 좋지 않은 리에르와 오해와 불신만 쌓일 수 있었다.
“거, 거짓말……!”
“인제 와서 원수가 아니니까 마음이 바뀌니?”
에레사가 천천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오열하는 에레사는 정체불명의 여자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리에르와 자신의 사이를 너무나도 잘 아는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만약 그녀의 말에 조금이라도 진실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이 아이는 네게 진실을 말하지 못한 이유가 뭔지 아니?”
“듣고 싶지 않아요.”
“진실을 알게 된 네가 그 남자에게 죽임을 당할까 봐 두려워서 모든 죄를 혼자 뒤집어쓴 거야.”
또다시 주변에서 전투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명령 한마디라면 목숨을 불사하는 교단의 인형들이 황성 근위병들을 상대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아르미안은 사력을 다해서 리에르에게 남은 마나를 전해주었다. 아르미안의 등 뒤로 칠흑의 깃털들이 흩날리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하나, 하나 리에르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흡수되듯 움직였다.
‘원래부터 네 것이었던 힘, 늦었지만 돌려줄게.’
세 번째 포스의 힘, 리에르 아르빈트가 각성시킨 포스 오브 석셔너. 평범한 삶으로 되돌아가길 원했던 청년에게서 앗아간 힘이지만 지금 이 순간 아르미안은 전신에서 그 능력을 뽑아내고 있었다.
두근. 두근. 천천히 리에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죽은 이를 억지로 두들겨 깨우는 것에 불과하다. 리에르가 살아난다면 그것은 기적이다. 기적을 만들기 위해서 아르미안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하고 있었다.
멈췄던 그의 심장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너무나 끊어질 듯 미약해서 아르미안을 불안하게만 했다. 한편으로 불행과 비극만 겪고 살아온 그를 쉬게 만들어주는 것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아르미안은 잠시 하려던 것을 멈추고 무엇이 그를 위한 것인지 고민하였다. 하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근위병들은 들이닥칠 것이고, 힘을 소진한 자신은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죽게 할 줄 알아.”
아르미안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다시 한번 깨물었다. 몸의 기력이 쇠진될 대로 쇠진되어 아픔마저 느껴지지 않지만 선명한 핏빛 혈화는 줄줄 꽃을 피워낸다.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붓 삼아 작은 마법진을 그리는 아르미안 뒤로 에레사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리에르와 같이 불행과 비극을 겪은 금발 머리의 여성, 그녀가 정신적으로 붕괴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르미안은 그녀에게 그 어떤 위로도, 사탕발림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욕구에 따라 움직인 그녀, 어찌 보면 자신과 닮았다고 할 수 있지만, 아르미안은 에레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엘 파실드에게 죽게 되겠지.’
진실을 알게 된 에레사는 엘 파실드에게 말하든, 말하지 않든 죽게 될 것이 뻔했다. 엘은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인물은 가차 없이 죽여 버리는 괴물이었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살아온 미치광이 신, 그리고 그 신을 죽이기 위해 같이 미칠 수밖에 없는 대적자. 둘 중에 누가 절대자의 자리를 차지하더라도 찾아오는 종말은 똑같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칠흑의 깃털은 마치 갑옷처럼 리에르의 몸을 감싸며 녹아들었다. 따뜻한 선혈로 그려진 마법진도 금방 효과를 나타내는지, 바닥에서부터 붉은빛이 아지랑이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둘 다 부숴 버리렴, 리엘.”
어쩔 수 없이 비극을 겪게 만든 남자.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친구들의 곁으로 돌려보냈지만, 결국엔 미치광이들에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두 괴물을 부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리에르 그밖에 없다는 이상한 예감이 찾아들었다.
그것이 비록 좋아하는 이성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리에르……!”
지면에서부터 올라오는 붉은 빛, 그것은 아지랑이처럼 아르미안과 리에르를 감싸듯이 솟구쳐 올랐다. 에레사는 두 사람의 모습이 핏빛 안개로 가려지자 양 무릎을 기면서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에레사의 손끝이 붉은 기류에 닿을 때 즈음엔 이미 아르미안과 리에르는 자리에 없었다.
에레사의 시야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자신이 찌른 상처 덕분에 바닥을 적신 리에르의 핏자국뿐.
“리엘……. 리엘!”
흐느끼는 에레사의 눈동자는 끊임없이 눈물을 일으켰다. 차갑게 식어버렸던 리에르를 끌어안고 싶었다.
리에르를 살리려는 움직임을 보이던 수수께끼의 여성, 그녀의 말이 맞는다면 에레사는 리에르를 찌를 이유가 없었다. 아니, 리에르와 조용한 곳에서 행복한 여생을 맞이했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보다 앞서서 자신의 손으로 찌른 리에르가 차갑게 식어가던 손안의 감각을 떠올리기 싫어서 무릎에 얼굴을 파묻어 버린다.
“리엘……!”
통곡, 비극, 학살을 불러일으킨 아리아력 801년도의 역사 속에서 인류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찌르고 붕괴되는 여성.
사랑하는 동생을 구원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진 남성.
그리고 진실과 마주하게 된 은발의 소녀.
아리아력 795년도 페이서스에서 벌어진 피의 축제로 인해서 대륙은 경악하였다. 그 사건을 벌인 장본인은 겨우 18세에 불과한 소년이었고, 아르빈트 가문의 차남이라는 것은 가십거리로 이용되었다.
아리아력 800년도 흑사자가 태어났다.
페리안의 불세출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그는 빛바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리아력 802년도. 대륙을 공포로 몰아넣는 마왕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