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58)
레필리아 레소드-259화(258/398)
레필리아 레소드 259화
너의 그림자
「도망치세요……. 유트…….」
아무리 뛰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은빛의 성. 그것은 붉은 화마의 혀끝에서 형체와 광휘를 잃어가고 있었다.
누구나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시종들은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짓궂은 장난을 걸어도 미동도 하지 않았던 기사들은 붉은 카펫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따뜻하고 온화한 얼굴로 안아 주었던 어머니의 향기가 끊어질 듯 아련하게 느껴진다.
「부디…….」
아름다운 어머니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채로 애써 처연한 미소를 지어 올렸다.
눈물이 일어나는 그녀의 눈동자 안으로 죽음의 손길이 치맛자락을 끄집어 내렸다. 사랑하는 아이들의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한다. 당장 죽음이 문을 두드린다 하여도.
은발의 태자를 끄집어내는 손길이 있었다. 아이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가지 않겠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불타는 성을 빠져나오면서 억지로 잡아끌었던 손에서 힘이 풀려가는 것을 느낀다.
추격자들의 화살로 몸을 꿰뚫린 유모가 피투성이가 되어 차갑게 식어간다.
뒤를 막아서며 소리치는 은기사의 외침도 더 이상 귓가에 들려오지 않았다. 은발의 태자는 난생처음으로 풀벌레가 가득한 수풀을 헤치면서 미친 듯이 달렸다.
턱까지 차오르는 거친 호흡 소리. 입안에서 단내가 풍겨올 만큼 달리고 달렸다. 어느새 세상을 붉게 밝히는 여명이 땅끝에서 올라왔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어째서 행복했던 일상들을 이렇게 잃어버려야 했는지 신이라는 존재에게 묻고, 또 물어보았다.
하지만 답변은 들려오지 않았다.
소년은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해져 왔다.
어린 가슴속으로 울컥, 고개를 드는 것은 오로지 복수라는 한 단어뿐이었다.
살아나가야 할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많은 것을 스스로 배워 나가야만 했다.
만약 나약하고 어린 여동생이 없었다면, 살겠다는 용기조차 생기지 않았을 터였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열매를 먹고 몇 일간 속을 게워낸다.
방향도 잘 모르는 길을 헤매며 뒹군다. 겨우 도착한 숙부의 성에서는 최소한의 안락함이 보장되었으리라 생각했다.
북 대륙의 은태자로서 가장 고귀한 모습을 해야 할 유트였다. 거지꼴을 하고서 숙부의 성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려내 주었다.
따뜻한 음식과 보금자리 속에서 유트와 유이 남매는 아주 잠시간의 평화를 맛보았다.
하지만 또다시 남매에게 위기는 찾아들고 있었다. 사리사욕으로 인하여 신의를 저버린 괴물들은 페브리안 남매를 교단에 팔아먹을 궁리에 빠져 있었다.
어차피 지크 페브리안이 죽었으니 더 이상 왕국은 운영될 수 없다. 그의 자식들만 없다면.
교단은 무슨 짓을 해서든 유트와 유이를 수중에 손에 넣으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절대로 사용하면 안 된다던 유트의 힘은 그들 남매를 살리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발동된 진실의 눈은 거짓으로 점철된 자들을 꿰뚫어 보았고, 성에서 도주할 시간을 벌어주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이의 손목을 틀어잡고서 이를 악물고 도주한 유트는 안주할 수 있는 땅을 찾기 시작했다. 한때 아버지의 충실한 부하였던 자들은 이미 교단 쪽으로 몸을 돌렸고, 지크 페브리안의 권위가 사라진 대륙은 그 어디에도 안전함 따윈 없었다.
사라진 왕국과 함께 치안은 엉망이 되었고, 서로 약탈하는 무법천지로 바뀌었다.
북 대륙은 살아 있는 자들의 지옥과도 같았다.
살아남기 위해선 힘을 키워야만 했다. 친절과 욕망 사이를 오가는 괴물들 사이에서 유트는 몇 차례나 팔려 나갈 뻔하였고, 몇 차례나 맞아 죽을 뻔하였다. 개중에는 독특한 성욕을 지닌 사람들에게 강간의 위험을 피해 나간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유트에게 도움이 되어준 것은 어머니가 사용하지 말도록 당부했던 베리타스의 힘이었다.
떠돌이처럼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유트 남매가 본 것은 가식과 기만으로 가득한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친절을 베푸는 이들을 주의하며 살아왔다.
「세상에나 저 남매들의 불길한 머리카락 색은 악마의 저주 때문이라던데.」
「괜히 우리 애들에게 병이라도 옮기는 건 아닌지……. 저 지저분한 몰골하곤, 부모는 뭘 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저 애들 부모가 없어요.」
아무리 먼 곳에서 입을 가리고 조잘거려도, 그들의 눈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진실은 유트의 머릿속으로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확실하게 전해지는 그들의 적의는 유트를 병들게 하였고, 그 누구도 믿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오빠, 저 사람들은 왜 우리를 욕해?」
유일한 혈육이자 아직 어리디어린 여동생의 루비 빛 눈동자가 흐려졌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 아니,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는 저주가 동생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울듯이 물어오는 여동생에게 유트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용하지 마.」
비록 여러 차례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능력이었지만, 유트는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어머니가 어째서 사용하지 못하게 했는지, 어째서 처음 그 능력이 드러났을 때 사람들이 기피했는지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차라리 지옥과도 같은 저주였다. 그러던 페브리안 남매에게도 뜻하지 않은 인연이 찾아오게 되었다.
「이야. 너 머리카락 색 멋지다.」
얼굴에 심술기가 가득 담긴 지저분한 꼬마가 유트에게 말을 걸어왔다.
사람들은 저주받은 아이들이라며 기피 했다. 같은 동갑내기들에게도 왕따나 다름없던 그들 남매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온 아이.
남들에게 흔하지 않은 은색의 머리카락 덕분에 온갖 일을 다 치러야 했는데, 눈앞의 소년은 그냥 되는대로 주워 삼키고 있었다.
적당히 겁을 줘서 내쫓을 생각으로 유트는 지저분한 꼬마를 노려보았다. 동년배 소년들에겐 있을 수 없는 살기. 바닥 인생을 기면서 살아온 유트가 노려보면 웬만한 꼬마들은 엉엉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역시나 눈앞의 꼬마도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고, 시끄럽게 종알대던 입을 꾹 다물었다.
귀찮은 떨거지를 떼어냈다고 생각했던 유트는 계속해서 누군가가 뒤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동생인 유이마저 어설픈 미행을 느꼈던지 자꾸만 뒤로 힐끔거리면서 커다란 루비 빛 눈동자를 굴려 보였다.
그때마다 지저분한 꼬마는 깜짝 놀라며 건물 벽 뒤로 숨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어설픈 모습에 유이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바보…….」
마을의 외곽진 집 앞까지 이르러도 지저분한 꼬마가 어설픈 미행을 계속하자 유트는 처음으로 뒤돌아서서 입을 열어 보였다.
「왜 따라오냐.」
지저분한 꼬마는 뭐가 좋은지 씨익,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여기가 너희 집이냐? 둘만 살기 딱 좋네.」
딱 좋기는커녕 가진 돈이 없었고, 어린 나이에 일할 수 있는 곳은 없다시피 했기에 아무도 쓰지 않는 허름한 폐가를 허락 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겨울엔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없었고, 여름에는 시원한 통풍과 함께 풀벌레들이 득실거리는 그런 집이었다. 말만 집이지 거리에서 잠드는 것과 크게 다르진 않았기에 유트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평소에는 이런 부류의 녀석들이 찝쩍거려도 무시하고 말았는데, 왠지 모르게 눈앞에 보이는 꼬마는 끈질기고, 한없이 귀찮게 굴었다.
「다시 묻는다. 왜 쫓아 오냐고 물었어.」
말을 안 들으면 이번에는 무력으로 쫓아낼 생각을 하면서 유트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숨어 사는 처지였기에 소란을 부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타인과 불필요한 접촉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음……. 사실 아까 그 녀석들이랑 나랑 전쟁 중이거든. 그런데 녀석들이 치사하게 한꺼번에 덤벼서 말이지……. 혹시 나랑 동맹할 생각 없냐?」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유트는 불끈 말아 쥐었던 주먹이 자신도 모르게 풀려 나가는 것을 느꼈다.
살기등등했던 은회색 소년의 차가운 표정이 서서히 풀리자, 콧잔등에 상처가 있는 꼬마는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동맹을 하자 이거지. 난 혼자서도 상관은 없지만 넌 동생을 지키려면 혼자 힘들지 않겠어? 뭐 안 맺어도 상관은 없지. 그런데 이 몸이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한 번 이야기해 보는 건데 거절해도 상관은 없지만 거절하지 않는 편이 이득일걸?」
꼬마는 콧잔등을 긁으면서 딴 데로 시선을 돌렸다.
유트는 상대를 보고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녀석은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하지만, 사실 동맹을 맺고 싶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속이 빤히 보이는 녀석이 있다니.
「뭐 아까 나랑 그 녀석들 분위기 봐서 알겠지만. 난 네 적은 아니란 거지.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 모르나? 서로 상생하는 관계가 좋다는 거지. 거절해도 상관은 없어. 어차피 이 몸은 영웅이 될 몸이기 때문에 저런 녀석들은 혼자서도 한 방에 해치울 수 있거든. 아까 내 화려한 발차기 봤냐? 아까 나에게 맞은 녀석이 쿠레드라는 녀석인데 걔네 아빠도 오크같이 생겨서 오크부자라고 불리지. 내가 그렇게 강하다 이거지.」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고 있지만 사실 동맹을, 아니, 친구가 되고 싶다는 거다.
유트는 타인과 교류가 없었다. 덕분에 친구도, 지인도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도 모르게 외로움을 느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꼬마는 너무나 솔직했다. 꾸밈없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다보며 유트는 호기심이 일어났다.
아무런 적의 없는 얼굴로 칼을 품은 자를 보았다. 선의로 가득한 얼굴로 온갖 악행을 일삼는 존재를 마주했다. 유트는 예의 진실의 힘을 꺼내 눈동자를 열었다.
진한 금빛으로 여물어져 가는 유트의 눈동자를 보며 지저분한 꼬마는 콧등에 난 상처를 긁적이며 영문을 몰라 하고 있었다.
유트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 한쪽이 균열이 일어났다. 겉과 속이 다른 존재들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보았던 그에게 있어 이렇게 바보 같은 인물은 처음이었다.
「‘저 황금빛 눈동자도 멋지다! 부럽다! 저 얼굴이면 에렌도 날 좋아해 주려나?’」
검은 꼬마의 바보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전해지자 유트는 큭큭,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정말로 단순 무식할 정도로 순수한 녀석이었다.
아직 어린 소년들이었기에 티 없이 순수한 것은 당연했지만, 눈앞에 있는 녀석은 유트 자신을 이용하려는 마음도, 은회색 머리카락에 대한 거부감도 전혀 없었다.
「그래, 친구가 되지.」
「그래, 친구가 되어야지! 응……? 친구?」
동맹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 이야기를 꺼내니까 리에르가 깜짝 놀란 얼굴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지는 않은가 의문을 품는 표정이 보였다.
오늘 처음 보는 녀석이지만 유쾌한 녀석이었고, 속으로 생각한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단순한 바보였다.
하지만 유이에게는 오빠인 유트가 자신 이외의 상대에게 반갑게 말하는 것이 달갑게 보이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유트의 뒤에 숨어 한쪽 눈만 내민 유이가 오빠에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원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