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60)
레필리아 레소드-261화(260/398)
레필리아 레소드 261화
2차 대륙전쟁(2)
유트는 매번 똑같은 답변을 들려주는 것도 미안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항상 같은 문답이었고, 항상 보게 되는 유이의 실망스러운 얼굴은 유트의 마음 한 켠을 아리게 만들었다.
“공주님, 제가 시원한 마실 것 좀 가져다드릴게요!”
유이가 금세 기운을 잃어버리자 멜런이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내뱉으며 호들갑스럽게 움직인다.
황성에서의 비극이 일어난 지도 벌써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오트리아 제국을 다스리던 필 루드비히 오트리아는 교단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뒤를 이어서 앤 루드비히 오트리아가 대두되고 있었다.
힘없고 나약한 어린 황제는 언제든 살해당할 위험이 있었다.
황성의 귀족들은 희대의 바람둥이라고 불리는 앤 루드비히 오트리아와 학식을 고루 갖춘 렘 루드비히 오트리아 두 파벌로 나뉘게 되었다.
대륙 황제의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전 황제가 갑자기 사망하는 불미스러운 일을 겪은 뒤라 파벌을 이룬 귀족들은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렘 파벌과 앤 파벌로 나뉜 귀족들은 오대 강국과 친해지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흑사자가 적혈의 악마와 동일 인물이란 사실 덕분에 페리안은 큰 이미지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흑사자와 연인 관계라고 소문이 났던 유이 페브리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치적으로 유트 왕과는 반목 상대였던 하르츠 후작이 죽고, 그의 아들인 레온이 영주가 되었다.
아버지가 반란을 저질렀으나, 레온이 그동안 페리안에 충성을 다했던 공로를 생각해서 큰 벌은 받지 않았다. 더군다나 유이를 위해 팔 한쪽을 잃어 기사의 생명이 끝난 그에게는 다른 벌이 너무나 가혹했다.
또한, 반란에 참여했던 페리안의 귀족들은 국왕에게 약점을 잡힌 덕분에 감히 명을 어길 생각도 못하고 허리만 숙이고 있었다.
국왕 유트가 확실하게 군권을 거머쥐고 있었기에 다행이었지, 만약에 다른 왕국처럼 군권이 분산되어 있었다면 또다시 반란의 위기를 겪을 수 있었다.
지금 페리안은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웠지만, 가장 안정적인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곧 찾을 거야, 걱정하지 마.”
유트는 유이의 고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유트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은빛 알갱이는 고운 모래를 연상시켰다.
유이는 천천히 유트의 몸에 머리를 기대며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그 녀석은 나를 좋아해.”
리에르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자신의 모습들, 그리고 시리도록 아픈 감정들을 본의 아니게 훔쳐보았다.
진실의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자신에 대한 리에르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고, 믿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도 그 녀석을 좋아해.”
이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으리라곤 유이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먼저 말하면 지는 것 같아서, 입 밖으로 내뱉으면 왠지 불행이 올 것 같아서 하지 못한 말이다.
“응, 맞아. 난 그 녀석이 보고 싶어.”
불행한 일을 겪고 오로지 리에르만 바라보는 에레사에게 미안했었다.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두 사람이 좋아했단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물러서는 것만이 자신이 해야만 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유이가 바라본 진실은 그렇게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에레사는 리에르를 저주하였고, 두 사람의 관계는 연인이라는 단어보다는 철저한 애증으로 이루어진 관계에 불과했다.
이미 뒤늦은 후회지만 그를 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재회했을 때 도망치듯 떠나려는 그를 때려서라도 말렸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상처받고 일그러지고, 망가져 버린 그에게 예전처럼 투덕거렸었다.
훤칠해진 키, 그리고 준수한 얼굴. 그의 모습이 유이의 가슴을 뛰게 했지만, 한편으로 상처로 빛바래진 그의 미소는 처량하고 서글프기만 했다.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기에 더 소중한 그의 기억들은 유이의 마음을 송곳으로 찌르듯이 아프게만 했다.
더 이상 흘러내릴 눈물도 말라 버렸는지, 유이는 붉어진 눈시울로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위로하듯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유트는 미소하면서 말했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은 꼭 한 대 때려.”
“응, 정신이 번쩍 들도록 때려줘야지.”
갑자기 기운이 생겼는지 유이의 루비색 눈동자가 힘이 들어간다. 유이는 콧잔등을 찡긋하고는 유트를 올려다보았다.
“당분간은 걱정하지 마. 그 녀석을 죽이려면 나라 몇 개는 사라져야 할걸.”
유트는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유이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유이는 실없는 농담을 들으며 피식, 웃어 보였다.
남매를 향해 봄의 향긋함을 전하는 꽃잎들이 흩날렸다. 그것은 바람의 연주 소리에 몸을 맡기며 춤을 추었다.
유이는 다소 마음이 풀렸는지 유트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감아 내렸다. 유이가 알고 있는 한 리에르 아르빈트는 이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남자 중의 하나였다.
탁, 탁, 탁.
따사로운 봄의 햇살, 그리고 평화로운 페리안 왕성에 다급한 움직임들이 시작되었다.
유트 남매, 그리고 그들의 측근들만 드나드는 왕성 정원에 근위병이 들어섰다. 마침 마실 것을 쟁반에 들고 오던 멜런이 근위병을 막아서는 모습이 두 남매에게 보였다.
하지만 이내 멜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을 보고 유이는 불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유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상한 오빠에서 패왕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플레이트 아머(Plate Armor)를 착용한 근위병은 유트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서 몸을 숙여 보였다.
“무슨 일인가?”
“급보입니다, 베리타스!”
급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왕의 정원에 근위병이 들어올 일이 없었다.
불길함. 그것은 마치 뱀처럼 밑바닥에 몸을 타고 오르내린다.
“말하라.”
유트는 진언할 것을 허락하였다.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근위병은 기다렸다는 듯이 즉답하였다.
“루나레이크 왕국이 신성 코스모스 교단에게 함락되었다 합니다!”
“그래, 그럴 테지.”
유트는 놀랍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리에르가 황성에서 학살을 벌이고 난 뒤에, 교단에서는 성전을 선포하였다.
이 세상을 잉태하고, 자비롭고 자애로운 신의 축복을 거역하는 이들에 대해 천벌을 내린다는 명분이었다.
국가마다 국교가 있고, 각 지역 특색에 맞는 토속 신앙들이 있었다.
코스모스 교단은 자신과 다른 교리를 가진 이에 대해서 배척 행위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무력 행위를 할 수 있는 종교 집단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코스모스는 이미 일반적인 종교 단체가 아닌, 하나의 신성 왕국이었다. 그 예로 코스모스는 성전을 선포한 몇 개월 뒤에 교황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곧 루나레이크에 대해서 전쟁을 선포하였다.
대륙의 절반은 코스모스의 교리를 따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수많은 믿음으로 강력한 힘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힘을 필두로 코스모스는 거침없는 종교전쟁을 펼치고 있었다. 덕분에 황성을 점령하고 있던 루나레이크가 가장 먼저 전쟁을 하고 있었다.
“예상외로 빠르군.”
아무리 교단의 군세가 강하고, 여왕이 급사해서 어수선했다고는 하지만 상식 밖의 일이었다.
루나레이크는 대륙 오대 강국 중 하나였다.
하나의 제국이 수십 개의 국가로 나누어져서 전국을 이룬 이 시대에 대륙의 중심이 되는 다섯 개중 하나라는 것은 큰 힘을 의미한다.
그런 루나레이크가 한 달 만에 함락당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폐하, 코스모스 교단은 루나레이크를 멸망시키고 로빈타 왕국으로 검을 틀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다시 진군에 나섰다는 보고는 유트를 당황하게 했다.
상식적으로 따지자면 전쟁을 하기 좋은 계절은 봄과 가을이었다. 대다수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은 뜨거운 여름이면 더위에 탈진하는 사례가 많았고, 이 경우에는 원정을 나선 군대가 어쩔 수 없이 회군하는 때도 여럿 있었다.
겨울철에는 그 추운 날씨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 그리고 동사의 위협을 견뎌야 하지만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겨울철에는 먹을 것이 적어지기 때문에 식량 보급이 힘들어지고, 대군을 운용하는 데에는 대단한 어려움이 있었다.
역사가 말해 주듯이 대군을 이끌었던 지휘관들도 부족한 식량으로 인해서 적의 수도까지 진출했다가 회군한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시기적으로 전쟁을 하기 좋은 계절인 것은 맞지만, 루나레이크라는 오대 강국을 쓰러뜨리고서 또 다른 오대 강국인 로빈타를 노린단 건 상식 밖의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루나레이크는 여제 베로니카가 사망한 이후였기에 국정이 어지러워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 하지만 철의 대공이 버티고 있는 로빈타는 이야기가 달랐다.
전장에서 이름 높은 강철의 원수답게 쉽지 않은 사투가 벌어질 것이고, 전쟁을 치른 이후 원정을 떠나는 교단 군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결정이었다.
‘서둘러서 전쟁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다는 말인가.’
일 년에 한 번 전쟁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소모되는 전쟁의 물자들은 노획물이 있다고 하지만 죽은 장병들을 메우는 것은 시일이 필요한 일이었다.
물론 함락시킨 상대 국가의 국민을 포로로 삼는 방법도 있지만, 비인도적인 방식이었다. 아울러 망국의 후예들이 순순히 투항할 일도 없었다.
“교단의 지휘관은 누구냐.”
상식 밖의 전쟁을 하는 인물이 궁금해져서 유트는 근위병에게 물었다. 하지만 근위병은 대답하지 못했다.
왕의 명령을 듣고도 대답하지 않는 것은 엄연한 황실 모독이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근위병의 태도를 보고 유트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 불안감은 몸을 타고 목 뒤편까지 올라와 독니를 드러냈다.
“리에르 아르빈트, 코스모스 교단의 총지휘관입니다.”
* * *
오대 강국의 하나, 황실의 휘광을 뒤로 한 채 위세를 떨쳐 보이던 루나레이크 왕국의 멸망은 대륙을 뒤흔들게 되었다.
하루아침 만에 무너질 곳이 아니었다. 여제 베로니카가 없어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지만 대국의 결말치고는 너무나 허망하였다.
리에르 아르빈트.
대륙의 신검 로이스타 아르빈트의 차남이자 십일검 기사단의 2대 단장인 파에트 아르빈트의 친동생.
적혈의 악마라는 칭호를 달게 된 페이서스의 악몽, 그리고 흑사자라는 호칭을 부여받으며 대륙의 영웅으로 시선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 황성의 사람들을 전부 학살하는 비극을 벌이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리에르 아르빈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소문이 있었다. 황성에서의 전투로 인해 이미 죽었다는 소문. 혹자는 부상 때문에 장애를 갖게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한 억측과 소문들은 거짓으로 밝혀지게 만드는 일련의 사건이 벌어졌다.
코스모스 교리를 따르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서 천벌을 내리는 성전이 벌어졌다.
선포한 교단 군을 이끄는 총지휘관은 적혈의 악마, 리에르 아르빈트였다.
교리를 따르는 광신도를 이끌고 출정한 리에르 아르빈트의 첫 공격이었다.
여제 베로니카가 죽고 혼란에 빠진 루나레이크는 제대로 방비를 하지 못했다.
거대한 적이 생기자 당연하다는 듯이 파벌싸움이 중단되었다.
죽으면 신의 곁으로 떠난다는 망상으로 결집한 광신도. 그리고 일찍이 막강한 무력을 자랑하던 마왕 리에르의 조합은 엄청났다.
루나레이크의 국경은 순식간에 뚫렸다. 루나레이크의 명운은 리리아페의 전투에서 결정되었다.
리리아페는 베로니카 여왕에게 매우 뜻깊은 곳이었다. 자신에게 충성을 바쳐서 여제의 길을 선포한 곳이었다.
즉, 성지나 다름없었다. 국민에게나, 장미 기사단에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