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64)
레필리아 레소드-265화(264/398)
레필리아 레소드 265화
2차 대륙전쟁(6)
이실렌은 우익의 끝자락에서 흑마를 몰고 오는 칠흑의 남자를 보았다.
‘사선진을 알고서 실행하는 거냐, 아니면 그저 본능일 뿐이냐.’
일반적인 사선진과는 다르지만, 공격력을 극대화 시키는 포진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단에게 잘 어울리는 전술이었다.
돌파력도 뛰어나지만, 방어력도 단단해서 지휘부까지 뚫릴 일은 없었다.
보통 밀집 대형을 부수는 전술은 기병을 잘 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교단의 사선진은 넓게 인원을 포진시키고서 한 번에 몰아치는 공격이었다. 마치 파도처럼 쏟아지는 공격은 날개가 부러지면 상대의 병력을 감싸는 형태로 먹어들어가는 공격법이다.
하지만 사선진을 시행하는 사람은 없었다. 잘 운용하면 포위섬멸이 가능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적의 방어에 막혀서 각개격파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실렌 대공도 사선진의 강점과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익이 무너지지 않도록 그쪽으로 아제리엘의 상급 기사들을 전부 이동시켰다.
좌익을 버리고, 우익에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것도 흔한 전법은 아니었다.
많은 사상자를 부를 수밖에 없는 사선진은 말 그대로 우익의 방어력만 충분하다면 힘을 잃게 된다.
이실렌은 우익 방진이 리에르의 사선진과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타이밍과 속도가 빨랐다.
이실렌은 적의 사선진이 숙련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긴밀하게 움직일 수 없을 테니까.
위험한 전술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전술을 사용한다는 것은 아직 전법이 깨진 적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콰아앙! 푸쉭!
서로의 진형이 부딪쳤다.
적 보병의 목을 관통하는 창날이 핏물로 번들거린다. 창날을 피해 돌진하는 병사의 검이 상대의 얼굴을 반으로 그어 내렸다.
갈라지는 얼굴 사이로 뇌수와 핏물이 수박처럼 으깨진다.
로빈타의 우익이 깎여져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실렌이 지시한 정예 기사가 때마침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
기사들이 병사들의 앞에 서서 호령했다. 직접 검을 들고 적병을 베자, 정예 기사의 등을 뒤쫓으며 로빈타 병사들이 투쟁을 벌였다.
뿔 나팔이 연달아 전장에 울부짖는다.
창공을 휘젓는 깃대의 신호가 어지럽게 눈동자를 괴롭힌다. 아제리엘을 대표하는 다섯 기사가 우익에 도착했다.
피스는 도착하자마자 리에르의 존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피 냄새를 하도 맡아서 술을 마신 듯이 몽롱한 흥분감이 밀려들었다.
원수와 싸울 수 있다는 생각에 피스는 지칠 줄도 모르고 교단의 사선 진형을 미친 듯이 베었다.
“이봐, 피스 경! 그대가 애타게 찾던 목이 저기에 있네!”
전투의 전초전을 담당했던 이리스가 철사 같은 털이 가득 심어진 턱을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아제리엘의 기사 중에서도 가장 호남형인 이리스는 평소에 숫기 없는 피스와 절친한 사이였다.
다른 이들이 보았을 때는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지만 죽이 잘 맞는 사이였다.
같이 검을 연마하고, 같이 술잔을 기울였다. 자연스럽게 그는 피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피스 경, 내가 도와줌세. 저놈 모가지를 따면 거하게 술 사는 거 잊지 말게!”
이리스는 애용하는 바스타드 소드를 움켜쥐면서 피스의 앞을 지나쳐 달려갔다.
피스는 깜짝 놀라 그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말고삐를 움켜쥐어야 했다.
적혈의 악마에게 큰 원한을 가진 자신을 도와주려는 그의 마음은 고맙지만, 상대는 대륙 최고의 괴물이었다.
수없이 많은 병사의 피를 머금었는지, 적혈의 악마가 타고 있는 흑마의 갈기는 이제 붉은 융단 같이 보였다.
마검인 아르카를 휘두를 때마다 둘, 셋 이상의 아군들이 분해돼서 사라졌다.
우익으로 모인 아제리엘의 기사들이 전부 마왕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모두 조심하게! 놈은 말 그대로 괴물이네!”
피스는 의욕이 앞선 아제리엘의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로빈타의 정예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적혈의 악마가 규격 외의 괴물일 뿐이었다.
적혈의 악마가 황실 학살 사건에서 보여준 무위는 무시무시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칠흑의 망토를 흩날리며 미친 듯이 아군을 도륙하는 리에르를 보니 피스는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마치 따뜻한 봄날, 벚꽃 잎이 휘날리듯 흩날리는 핏방울과 살점들.
그 공간을 창조해 내는 마왕을 향하여 가장 먼저 막아선 것은 오스카였다.
화려한 기교와 창술을 가진 그는 마상 전투의 달인이었다.
자신감 넘치게 뻗어내는 그의 창은 마치 전광석화처럼 칠흑의 마왕을 찌르고 들어갔다.
한창 학살을 자행하던 칠흑의 마왕은 갑자기 찌르고 들어오는 창을 막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렸다.
채엥!
긴 쇠의 마찰음. 오스카는 자신의 한 합을 가볍게 막아낸 마왕을 보면서 이를 드러내 보였다.
“확실히 이름값은 하는가 보군.”
오스카는 자신만만하게 창을 머리 위로 빙글, 빙글 돌려댔다.
칠흑의 마왕은 이죽거리는 오스카를 앞에 두고도 대수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덤벼드는 로빈타의 병사들을 파리라도 쫓는 듯이 검을 흔들었다.
그가 검을 뻗어낼 때마다 쫘악 하는 소리와 병사들이 잘려 나갔다.
오스카의 눈에서 불똥이 튀겼다.
“이놈!”
비록 전쟁터에서 개미만도 못한 목숨일지 몰랐다.
하지만 하나하나 살아 있는 생명이었다.
그들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가족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눈앞의 마왕은 마치 벌레를 도려내는 듯한 무미건조한 움직임이었다.
그 이질적인 모습은 오스카를 대노하게 만들었다.
힘이 잔뜩 실린 오스카의 창이 마왕의 가슴을 꿰뚫기 위해서 찔러 들어간다.
마왕은 옆에서 덤벼드는 로빈타 병사를 베어 보였다.
‘미친놈.’
다른 기사들과는 다르게 창술 하나만 매진해 온 오스카는 자타가 공인하는 쾌속이었다.
그것을 보면서도 막으려는 시늉은커녕 주변에 있는 적군을 베는 데 주력하는 상대는 미친 거나 다름없어 보였다.
분명히 마왕의 가슴을 꿰뚫을 거라 오스카가 확신하고 있을 때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무기도 쥐지 않은 마왕의 왼손이 가볍게 창끝을 쳐내자 돌진하던 오스카의 무기는 허공에 붕 뜨게 되었다.
‘뭐야 이거.’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라 오스카는 전장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잠시 멍한 상태로 있었다.
자신의 창은 단단한 손아귀에서 벗어나 허공에 튕긴다.
무기를 들지 않은 그를 향하여 교단 군의 기병이 검을 찌르고 들어왔다.
오스카는 그제야 다급하게 허리춤의 단검이라도 집어 들으려 했다.
그보다 앞서 교단 군의 장검이 허공에 그어지는 것이 보였다.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갑옷과 갑옷 끈 사이의 노출된 부위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오스카 경!”
뒤늦게 적병을 뚫고서 지원을 나온 동료들의 목소리가 귓등을 때린다.
순백의 아제리엘을 달기 전부터 힘든 훈련과 교육을 받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동료들의 모습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고통을 잊게 해주는 주마등 같은 기억들을 떠올랐다.
아제리엘의 오스카는 말고삐를 움켜쥐면서 낙마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고삐를 단단히 잡고 있던 손가락에 감각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천천히 손이 벌려졌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울어 듯한 느낌을 받으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낙마하여 목이 부러진 오스카는 그대로 숨졌다.
일반 기사도 아닌 순백의 기사가 손쉽게 제거당하자 네 명의 아제리엘들은 일제히 마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리스는 바스타드 소드를 말아 쥔 채로 칠흑의 마왕을 베기 위해 움직였다.
횡으로 그어져 내리는 이리스의 바스타드 소드는 베기 위해서가 아닌, 상대의 갑옷을 부숴 버릴 요량으로 힘을 잔뜩 쏟아부었다.
칠흑의 마왕은 저주받은 검, 아르카를 들어 가볍게 쳐내어 보였다.
이리스는 있는 힘을 잔뜩 쏟아부었다. 하지만 가볍게 튕겨 나간다.
그는 자신의 검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목의 감각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듯한 통증이었다.
이리스가 멈칫할 때, 사슬 추의 명인인 알헨이 히얏, 하는 기합성을 질렀다.
그의 손안으로 손바닥 크기의 추가 사슬에 매달려서 뱀이 포효하는 듯 흔들린다.
칠흑의 마왕은 귀찮은 듯이 추를 쳐냈다.
하지만 알헨의 사슬 추는 튕기는 것과 동시에 아르카를 휘감았다.
그 순간 순백의 아제리엘 중 하나인 그라잔드가 거대한 핼버드를 세로로 내리찍었다.
검이 묶여서 받아낼 수가 없었던 칠흑의 마왕은 살짝 몸을 뒤로 젖혔다.
그라잔드의 핼버드는 피해내었다.
하지만 그라잔드가 노린 것은 마왕의 몸이 아니었다.
말의 비명이 울렸다.
마왕이 타고 있던 철갑의 흑마는 그라잔드의 핼버드를 맞고서 피가 솟구쳐 흐르고 있었다.
고통을 참기 어려운 듯 앞다리가 주저앉으며 몸을 옆으로 기울인다.
칠흑의 마왕은 낙마를 피하고자 스스로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피스는 채찍 검을 뻗어내 보였다.
티디딕!
공기 중으로 사슬의 소음이 울렸다.
피스의 무기가 늘어나며 허공에 호를 그려 넣었다.
정확하게 마왕의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그의 검 끝.
마왕은 아슬아슬하게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피스는 갑옷을 입고도 순식간에 움직이는 마왕의 반사 신경을 보고 저절로 욕지기가 터져 나왔다.
툭, 투둑.
피스의 검 끝에 날아간 마왕의 헬름이 땅바닥을 뒹굴었다.
얼굴이 드러난 마왕, 아니, 리에르 아르빈트의 이마에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의 피보다 더 진한 붉은 안광을 보는 순간 순백의 기사들은 몸이 굳었다.
피스는 철천지원수의 얼굴이 드러나자 이를 갈며 채찍 검을 들어 올렸다.
사선진은 공격력을 극대화 시키는 진법이었다.
특징상 적의 우익을 돌파하기 위해서 병력이 집중된다.
그런 사선진의 우익이, 그것도 돌파의 핵심에 있는 리에르가 붙들리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로빈타의 절대적인 승리였다.
리에르가 이 자리에서 죽던, 안 죽던.
다른 순백의 기사들은 그 생각을 하며 말을 잃은 리에르를 포위하였다.
피스는 다른 동료들과 다르게 꼭 그를 죽이겠노라 다짐하며 검 끝을 비껴들었다.
“리에르 아르빈트. 네 죗값을 받을 때다!”
피스의 한 맺힌 소리에 리에르는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죽을 놈들이 할 소린 아니지.”
도발적인 마왕의 말에 순백의 기사들은 꿈틀, 하면서 이를 사리물었다.
볼 것도 없이 그를 공격하려는 순간 리에르 아르빈트는 검을 어깨 위까지 끌어올리며 히죽였다.
칠흑의 마왕, 그 존재를 의미하는 칠흑의 망토와 머플러가 천천히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일순간 불어오는 기류에 기사들이 어리둥절할 때, 칠흑의 깃털들이 빛을 뿜으며 리에르의 등 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언 쓸 시간을 부탁할 거면 지금 말해.”
비안 평원은 이제 핏빛의 강을 이루어 냈다.
총 20만의 대군들이 서로 맞붙어서 싸웠고, 비명과 고함, 살고자 하는 강력한 상념들로 아우성치고 있었다.
붉은 대지 위에 칠흑으로 아로새겨진 빛의 날개.
인간에게서 생겨날 수 없는 그 위압감 넘치는 빛을 보고 순백의 기사단은 잠시 얼어붙고 말았다.
칠흑으로 아로새겨진 잘생긴 청년의 등 뒤로 빛의 깃털들이 모여들었다.
자칫 잘못 보면 황홀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잠시만 정신을 놓아도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 당연했다.
위험한 아름다움을 가진 칠흑의 깃털이 전장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놈!”
알헨이 말을 달리며 리에르의 옆쪽에서 사슬 추를 뻗어냈다.
쉬이익!
바람을 찢어내며 날아드는 사슬 추를 보고 리에르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탁!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슬 추는 무언가에 부딪혔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알헨의 두 동공이 크게 열렸다.
리에르의 앞쪽으로 검은빛 자장이 허공중에 물결을 일으키며 나타났다.
알헨의 사슬은 그 자장에 휘말려서 힘없이 튕겨 나갔다.
리에르는 천천히 입가에 미소를 그려 넣었다.
“먹어라, 꺼지지 않는 배여.”
리에르의 등 뒤로 칠흑이 아롱지기 시작했다.
“먹어라. 망자의 시체까지도. 삼켜라, 살아 있는 체하는 모든 것들을!”
붉은 눈을 번뜩이며 웃어대는 리에르의 주변으로 검은 안개가 잔뜩 피워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거대한 늑대의 모습을 갖추며 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