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7)
레필리아 레소드-27화(27/398)
레필리아 레소드 27화
리에르와 유트(2)
리에르는 두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무겁게 열린 눈꺼풀 속에서 세상은 마나의 세계로 뒤바뀌었다.
형형색색의 찬란한 자장이 새로운 손님을 환영한다.
-연소점은 저번에 알려준 대로야. 모든 자장이 모여드는 핵을 부숨으로써 발동시킬 수 있어.
“간단하니 좋네요.”
-말로는 간단하지. 하지만 누구나 이 공간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예전에는 누구나 쉽게 배웠겠네요.”
지금은 마법사가 보기 힘든 세상이었다.
위대한 마법의 명맥은 끊어졌고, 검의 시대가 열렸다.
-볼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있었지. 하지만 아무나 연소점을 부리고, 조합 가능한 것은 아니지. 가끔 인간의 자연발화 사망 현상처럼 운이 나쁜 예도 있겠지만. 이제 다시 시작해 보자.
리에르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결정한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
“네.”
-좋아, 바람의 마나를 폭발시켜서 검에 기운을 모이게 해보자.
이미 한 번은 경험했었다. 리에르는 자세를 갖추고 천천히, 그리고 물 흐르는 듯한 자세로 검을 든 손을 정면으로 향하였다.
하앗!
짧은 기합과 함께 왼발을 내디딘다.
수풀이 리에르의 움직임에 따라 허리를 돌리며 도망간다. 그러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리에르의 무릎을 살짝 공격해 온다.
리에르는 검의 끝을 바닥에서 머리 위로 올렸다.
시원한 밤공기가 비명을 토해내며 나무에게 하소연한다.
그녀가 가르쳐 준 검무로, 주변에 흩날리는 연소점들을 부쉈다.
쐐애액, 쐐애액.
리에르가 한 점, 한 점. 검을 찔러 들어갈 때마다 손에 들린 검은 푸른빛을 내며 웅웅, 하는 소리를 내었다.
-잘하고 있어.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호로.
쉬이이이잉!
이제는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리에르는 검 끝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검 끝에는 녹색으로 아로새겨진 마력들이 아지랑이처럼 휘감아져 있었다.
“이건……!”
-검의 마스터들이 가능하다는 극치의 검, 검기야.
지금 눈앞에 있는 현상을 믿기 힘들었다.
신검이라 불리는 자신의 부친 로이스타 같은 마스터들이 가능하다는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검의 극한에 다다른 자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나, 검에 마력을 굴절시킬 수 있는 행위는 누구나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즉, 리에르의 오러 블레이드는 검의 극한에 다가선 현상이 아닌, 마나를 활용한 변칙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그 효과나 타인에게 주는 공포감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 베어.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에도 힘을 전달하며 전신의 감각을 끌어내!
리에르는 그녀의 말과 동시에 본능적인 이끌림을 따라갔다.
보폭을 크게 하며 왼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양손으로 검을 말아 쥐고서 머리 위의 달을 향해 찌를 듯이 올렸다.
망설이지 않고 수직으로 검을 내리꽂는다.
쉬리리리리릭!
거친 바람의 포효소리. 리에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벤 곳에서부터 바람과 바람이 마멸되며 벌어지는 마나의 폭발음을 보았다.
순간 리에르는 전신에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방금은 공격계 기술인 레소드, 이제 방어계 기술인 레필리아.
아르미안은 검기를 발휘한 리에르에게 쉴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언제 리즈의 습격이 다가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무력하게 리에르가 당하게 할 순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일분일초라도 리에르를 단련시켜야 했다.
-네 몸에 전달되는 검술들은 그저 쉽게 검을 베어들고 쉽게 검을 회수하기 위한 동작들이 아니야. 지금부턴 발을 내딛는 동작 하나하나까지 유심히 새겨 넣어야 해. 네가 내딛는 곳의 마나 점들을 자극하고 일대를 진법화 시킴으로써 여러 가지 유리한 점을 만들어내야 해.
아르미안의 수련은 다른 때와는 다르게 진도가 빠르다.
하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리에르 본인은 가르쳐 주는 하나하나를 그대로 실현하고 스펀지가 물을 빨아 먹듯이 흡수되는 것을 느꼈다.
‘지금 있는 일들은 전부 꿈인 걸까?’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뒤로 반 회전 하며 검을 휘두른다.
리에르가 지나온 발자국에서 빛의 분자가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기둥처럼 올라선다.
그 기둥은 하나하나가 작은 반응들이지만 리에르가 약 40합 정도의 검을 휘두르자 지나온 모든 자리의 소용돌이들이 하나로 뭉쳐져 거대한 물결을 이루어 낸다.
그 장면이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이자, 리에르는 검술 수련 중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레필리아와 레소드, 이 두 가지를 완벽하게 발휘한다면 널 당해낼 자는 찾아보기 어려울 거야.
“설마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꿈이었다와 같은 허무한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겠죠?”
리에르는 부드럽게, 그리고 화려한 검의 호선을 그리며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자고 일어나서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결말이 남지 않게 노력해야겠지.
아르미안은 미소하면서 부드럽게 응대하였다.
리에르는 하늘을 수놓는 자신의 검술이 꿈이 아니기를 중얼거렸다.
리에르의 턱밑으로 흘러내리는 땀이 목젖에 미끄러져 내려갔다.
“어디 다친 건 아니었구나…….”
집에 리에르가 없어서 그를 걱정하여 찾아왔던 에레사는 우연히 그가 검술을 수련하는 모습을 훔쳐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에도 우연히 보았던 리에르의 검무.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는 듯이 경쾌하고 화려한 움직임을 갖고 있었다.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도 전혀 모르고 있던 모습이었다.
그가 무아지경에 빠져 기쁜 듯이 미소를 짓고 있다.
분명 그는 검술을 싫어했었다.
하지만 지금 검술에 흠뻑 빠진 모습은 도저히 싫어하던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항상 아버지와 형의 그늘에 가려져 검술을 싫다, 싫다 외쳤어도 그는 항상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매일 훈련을 일과처럼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결실을 맞이한다.
뛰어난 검술로 주변을 수놓는 그를 바라보며 에레사는 가슴마저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힘내, 리엘.’
에레사는 혹이나 리에르에게 방해가 될까 두려운 나머지 조심스럽게 자리를 떴다.
마음속으로는 사랑스러운 소꿉친구에 대한 응원을 품으며.
* * *
리에르는 아르미안의 안배에 따라 새벽녘까지 수련했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친 라일라는 잠들어 있었다.
어차피 다녀왔습니다. 인사할 기운도 없었다.
리에르는 발목에 모래 덩어리를 묶은 것처럼 무거운 걸음으로 2층을 향했다.
샤워하고 싶었다. 하지만 피곤함이 밀려드니 만사가 귀찮아지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리에르는 깔끔한 체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리에르는 땀에 젖은 셔츠만 아무 곳에나 벗어 던지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버렸다.
구름에 가려 어두운 하늘 아래 달빛조차 보이질 않는 밤이었다.
-잘 자렴. 오늘 고생했어.
아르미안은 기특하다는 듯이 리에르에게 말하였다.
“응, 네.”
간단한 대답만을 하고서 리에르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아무리 개방된 힘 덕분에 체력과 마나가 월등하게 높아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루는 능력도, 경험도 부족하였다.
아르미안의 계속된 훈련에 리에르는 기절했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숙면에 빠져 버린다. 그리고 검은 구름에 가려졌던 달빛이 고개를 내밀었을 때 리에르의 옆으로 사람의 인영이 드러났다.
환하게 빚을 내는 듯한 긴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소녀가 상황도 전혀 모른 채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저런…….
아르미안도 리에르에게 정신이 팔려서, 침대 위에 제이미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리에르를 바로 깨우려 했지만, 너무나 곤하게 잠들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르미안은 한숨을 내쉬면서 잠시간의 수면을 취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한 소녀의 인생을 일그러뜨리는 비극이 일어나고 만다.
* * *
기분 좋은 새소리에 잠이 깬 제이미는 흐응, 하는 콧소리를 내면서 몸을 움직였다.
일어날 시간이지만 이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제이미는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부리기 위해 베개를 잡아 안았다. 물론 눈은 전혀 뜨지 않은 채로.
순간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그녀의 시야 안으로 보이는 것은 뭉개진 머리에 침을 줄줄 흘리고 자는 리에르의 낯짝이었다.
제이미는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다. 가까스로 손바닥으로 입을 부여 막았다.
아레스트 후작의 영애이자 공주님과도 같은 출신을 지닌 본인이 길거리에 돌멩이만도 못한 사내와 동침을 하고 말았다.
그것은 치욕이며 인생의 종말점이었다.
기분 좋은 아침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아, 아버님……. 소녀 순결을 잃고 먼저 목숨을 끊사옵니다…….’
제이미는 침대보를 말아서 줄처럼 꼰 뒤에 목에 매달았다.
이제는 파에트에게 시집을 가기도 어렵다고 스스로 판단을 하고 만다.
“음냐. 에레사……. 흠.”
잠꼬대하는 리에르를 보면서 제이미는 잠시 멈칫하였다. 그러고는 냉정하게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난 아줌마의 호의를 받아 이곳에 손님으로서 투숙하고 있었어. 그런데 이 불한당 같은 녀석이 멋대로 영애인 내 침대 위로 들어온 것이다.’
사실을 확인한다.
‘이 녀석만 죽으면 그 누구도 모를 일, 동침과 같은 일은 없었던 일이 되는 거다.’
제이미는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맑은 눈동자는 음침하고 사납게 바뀌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리에르를 향해 다가선다.
리에르는 음산한 기운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느끼는지 끙, 끄응…… 하는 신음 소릴 내더니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리에르가 일어나자 음침한 계획을 세우고 있던 제이미도 움찔하였다.
그 순간 제이미는 자신이 속옷 차림이라는 것을 뒤늦게 상기해 냈다.
리에르는 반쯤 풀린 눈을 끔벅거리며 제이미가 서 있는 것을 보고서 잠시 생각하더니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아, 너 아직도 있었냐. 미안하다. 어제 늦게 들어와서 피곤한 상태라 몰랐네.”
리에르는 그렇게 태연하게 말하곤, 하품을 길게 뽑아냈다.
제이미는 다시금 수치심에 몸을 부르르 떨어내기 시작했다.
이 길가의 돌멩이 같은 사내 녀석은 두 번씩이나 자신의 몸을 보고도 여전히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오늘은 시합들이 두 개나 있었지……. 얼른 가야겠네, 하암.”
두둑, 두두둑.
리에르는 어깨에 근육을 풀고서 방 바깥으로 나갔다.
제이미는 그가 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술을 꼭 깨물었다. 너무도 분한 나머지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혀져 버렸다.
“저 녀석……. 죽여 버리겠어. 꼭 죽이겠어!”
제이미는 안 그래도 어제 대회 관계자들을 통해서 억지를 부려 참가 신청서를 냈었다. 원칙적으로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고집을 부린 것은 단 하나의 이유였다.
정당한 방법으로 리에르를 굴복시킨다. 제이미는 시합에서 만나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해치워 주겠노라 다짐하며 복수의 불꽃을 태워냈다.
리에르는 그런 제이미의 분노는 알지 못한 채, 대충 머리를 정리하고 식탁 위에 있는 빵 한 조각을 입안에 집어넣는다.
“아들, 인사해야지.”
“네,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당신의 미모처럼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해가 머리 위에 떴군요.”
“옳지.”
라일라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며 좋은 아침 인사였다는 듯이 답변해 준다. 그러고는 서서 식사를 하는 리에르에게 손가락을 가리키면서 훈계한다.
“아들, 서서 먹지 말랬지.”
“존경하는 어머니, 아들은 사내로서 중요한 도전을 하러 가는 길입니다. 기운 빠질 만한 말이라면 다녀온 뒤에 해주세요.”
“그렇구나, 그럼, 거기 소파에서 자고 계신 엘빈 경도 깨워서 같이 식사하는 건 어떠니?”
리에르는 그녀의 말에 소파를 보았다.
그곳에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의 기사, 엘빈이 소파에 누워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네네, 기운 빠질 만한 말들은 하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