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71)
레필리아 레소드-272화(271/398)
레필리아 레소드 272화
2차 대륙전쟁(13)
연합군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빅스터 나이브만에게 농락당했단 것을 인정해야 했다.
아무리 적군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지만 적보다 많은 숫자의 대군들이 힘없이 무너졌단 것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연합군 지휘관들은 다른 지휘관들, 그리고 타국의 힘이 부족했다고 떠넘기기에 바빴다.
그 모습은 그들이 패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말이 연합이지, 그들은 같은 목적과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단체였다.
자신들에게 모든 일이 유리하게 돌아가면 끝없이 위세가 높지만, 위기가 찾아온다면 금방이라도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마는 그런 관계였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리즈와 빅스터는 적의 10만이라는 대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루 만에 리즈가 이끄는 서 페리안 군에 궤멸당한 서 연합군은 각자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고, 그 정보를 듣게 된 동 연합군은 급격히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쪽 연합이 대패했다는 사실을 아무리 비밀로 두려 하여도, 일단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순간 그것은 일파만파 퍼져 버린다.
“회군밖에 없군요…….”
갈라파고스의 대장은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렸다.
갈라파고스는 아직 국가 선포를 하지 못한 대영지에 불과하였다.
영지민들의 숫자는 다른 곳에 비하면 적었다.
이번에 원정 나온 대군을 잃는다면 갈라파고스는 군사력을 모두 소실하게 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이득을 취하려던 갈라파고스 대장은 이제 무사히 퇴각하는 것에만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번번이 나스를 두들겨 패줄 것처럼 굴었던 다혈질 피리네오 대장도 전쟁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면서 술을 독째 들이붓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싸우기도 전에 패배한 거나 다를 바 없었다.
다른 지휘관들과는 생각이 다른지, 연합군 대장인 헬리온은 풀 죽은 지휘 간부들을 향하여 망설임 없이 내뱉는다.
“후퇴는 하지 않겠소.”
당연히 퇴각하리라 생각했던 지휘관들은 갑작스러운 헬리온의 발언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 관문에서 동 관문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이, 삼일 안으로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기에 조금만 시간을 끈다면 퇴각마저 못 할 수도 있었다.
그런 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퇴각하지 않는단 헬리온의 말은 다른 지휘관들에게 노망을 의심하게 했다.
“리즈 지센라이드가 4만 대군을 이끌고 온다는 것은 뼈아프나, 우리에겐 아직 유트 왕을 사로잡을 기회가 있소!”
다른 나라처럼 다른 혈통의 왕이 즉위할 수 있는 편리함 따위는 없었다.
페리안이라는 나라가 페리안으로 있으려면 패왕의 유일한 혈족인 유트가 있어야만 했다.
그가 없는 페리안은 더 이상 국가가 아닌, 그저 무력 집단에 불과해진다.
“그렇지 않으냐?”
헬리온은 이번엔 제장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멍한 시선으로 초콜릿을 먹는 아이에게 누런 이를 드러내 보인다.
보랏빛 머리카락의 소년은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다행히도 적이 철수한 지 얼마 안 되어 발견했으니, 금방 뒤쫓을 수 있을 것이오. 추격대로 루카스의 경기병에게 부탁드리고 싶소.”
지휘관들은 다소 불만 섞인 얼굴도 있었다.
추격대를 가장 선두에 보낸다는 것은 공을 독차지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실수를 해서 보급품을 전부 소실한 피리네오와 갈라파고스는 헬리온의 명령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헬리온이 루카스가 경기병으로 추격하는 것을 제안하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는 대륙에서 가장 기동성이 뛰어나고 위협적으로 알려진 것은 다름 아닌 루카스의 경기병이었다.
그들은 어렸을 적부터 말을 타고, 생활해 왔기 때문에 마상 전투에 굉장히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루카스 경기병은 로빈타 중기병과는 굉장히 대조적이었다.
그들은 다른 기병과는 다르게 가벼운 가죽 갑옷만을 걸쳤다.
당연히 전투 방식도 판이하게 달랐다.
로빈타의 기병은 중무장을 한 채로 랜스 돌격을 주 전략으로 삼았다. 루카스의 기병은 로빈타와는 달리 마상에서의 파상 공격을 주 전략으로 했다.
일찍이 유트 페브리안이 아키서스 성에서 빅스터와 결전을 벌였을 시에 사용했던 경기병 전술도 용병왕 니드의 장기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나스를 무시했던 헬리온의 자상한 배려의 뜻도 있었다.
그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스는 초콜릿만 오도독거리며 눈을 끔벅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졸린 듯이 보여서 헬리온은 왠지 모르게 입가에 실소가 머금어졌다.
“저기…….”
흑발 머리카락의 호리호리한 소녀가 쑥스러운 듯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모습에 헬리온이 시선을 건넸고, 머뭇거리던 그녀는 겸연쩍게 입을 열기 시작한다.
“잠시 다녀올 동안 저희 도련님 좀 맡아주시면…….”
나이를 먹고 온화해지긴 했지만, 갈테오의 헬리온이라면 우는 아이도 그치게 만든다는 괴인이었다.
자신의 키보다 더 두꺼운 창날을 번뜩이며 마상 위에서 적을 도륙하는 모습이 괴물 같다 해서 장의사라는 별명마저 가졌었다.
그런 그에게 많이 봐야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녀가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이를 맡아 달라 하니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어딜 간다는 건가?”
멍한 눈으로도 초콜릿을 먹느라 정신이 없는 나스를 넘겨받으며 헬리온이 궁금하다는 듯 묻는다.
주변에 있는 지휘관들은 헬리온이 정말로 나스를 맡아줄 것처럼 보였기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올렸다.
“명령을 받았으니 가야죠.”
흑발 머리카락의 소녀는 굳은 얼굴로 눈빛을 번뜩인다.
그러고는 잊은 것이 있다는 듯이 품에서 무언가를 뒤적뒤적하더니 헬리온에게 조그만 양피지를 넘겨 보였다.
무언가 싶어 헬리온이 양피지를 펼쳐 보이자 그 안에는 다소 당황스러운 글귀들이 눈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기 전엔 꼭 양치를 시켜주셔야 하고요, 잘 때 손을 잡아 주지 않으면 도련님은 잠을 주무시지 못하세요. 그리고…….”
나스 사용 설명서. 라고 적혀진 양피지를 받아 든 헬리온은 자신의 흰 수염을 보듬으며 허허 웃어 보였다.
피리네오, 갈라파고스 지휘관들과 그의 부관들은 소녀의 희한한 행동을 호통이라도 칠까 하였지만, 태도가 너무도 당당한지라 입을 잠시 다물고 있었다.
무엇보다 헬리온이라는 노장이 그녀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으니, 옆에서 끼어들기도 뭐했다.
“알겠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흑발의 소녀는 생긋 웃어 보이더니 턱까지 감겨 있던 로브를 훌떡 벗어 보였다.
로브에 의해 가려져 있던 팔은 은은한 달빛에 반사광을 일으킬 정도로 새하얬다.
하얀 어깨에서 팔목까지 그려진 월광의 문양. 소녀는 로브 자락이 움직임에 방해되지 않도록 얇은 허리춤에 묶으며 루카스 군대가 집합한 곳으로 걸어 나갔다.
“설마, 루카스 군의 대장이 저 소녀인 게냐?”
지휘관들은 헬리온의 말에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을 지어 올렸다.
지금 간부급 막사 안에 모인 인원들만 해도 하나같이 우락부락한 사내들뿐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싹싹해 보이는 소녀였다.
그저 용병왕의 어린 아들을 수발드는 시녀에 불과해 보였던 그녀는 능숙하게 흑마 위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루카스의 정예 경기병들을 향해 지시를 시작했다.
“응, 사샤는 강해. 우리나라에서 검의 예리함만으론 최강이라고 아빠가 말했어.”
나스는 멍한 시선으로 사샤의 생기 넘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항상 곁에 있어 주던 그녀가 전장으로 향하는 것은 불안할 수 있지만,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사샤는 자신이 있는 전투에서는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으므로.
나스의 혼잣말을 듣고서 헬리온과 지휘관들은 그제야 소문으로 떠돌던 용병왕 니드의 애제자를 떠올렸다.
곡예와 같은 현란한 마상 검술을 사용하는 루카스의 여성 무사.
어린 나이에도 용병왕 니드의 검술을 마스터하고, 여성 특유의 부드러운 체술까지 익힌 소녀를 루카스의 월광이라고 불렸었다.
루카스에선 기사를 무사라 칭했다.
루카스 내에서도 독보적인 그녀의 입지는 겉 생김과는 전혀 이질적이었다.
“이제 시대도 바뀐다는 것인가…….”
오랜 시간을 전장에서 누벼온 헬리온은 잔뜩 주름진 이마를 구겨 보였다.
그러고는 루카스의 경기병들이 질주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전장에 서면서 승리의 제물이 되는 자, 이슬처럼 사라지는 인재들도 많았다.
타 대륙을 정벌하는 대업을 이뤘던 실 오트리아 대제.
북 대륙을 기반으로 무패의 질주를 달리던 패왕 지크 페브리안.
대륙 제일 검으로서 신검에 달했다는 자, 로이스타 아르빈트.
패왕 지크는 죽어 아들인 유트가 그 대업을 이어 북 대륙을 정벌하였다. 로이스타는 아직 건재했지만, 그의 아들이 대권을 이어받아 십일검 기사단을 지휘하며 국토를 수호하고 있었다.
루카스의 정예를 이끄는 어린 소녀. 그리고 눈앞에 있는 천재적인 소년.
헬리온은 스스로 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얼마든지 젊은 기사들과 맞붙어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많은 젊은 일이 날개를 펴는 모습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꼈다.
피식, 헬리온은 입가에 주름진 웃음을 머금으며 지휘관들에게 소리쳤다.
“자, 유트 페브리안을 잡아 이 전쟁을 승리로 바꾸시오!”
화가 치밀어 술잔을 기울였던 피리네오 지휘관도, 병력이 손실될 것을 우려하던 갈라파고스 지휘관도 새삼 바뀐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함께 가는 거다, 나스야.”
비록 체구는 작지만,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느끼는 아이였다.
헬리온은 나스를 번쩍 들어서 자신의 어깨에 목마를 태우며 웃어 보였다.
갑자기 높은 곳에 올라와서 어지러운지, 나스는 조그만 입을 조개처럼 꼭 다물었다.
불리한 전장의 흐름.
하지만 연합군에게는 아직 건재한 대군이 남아 있었고, 설사 리즈의 4만 대군이 몰려온다 하여도 정면 대결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빅스터 급의 지략을 가진 소년과 유트 급의 검술을 가진 소녀의 조우가 시작되는 달빛은 유난히도 밝고 크기만 하였다.
다시 전장의 서막이 피워 오르는 페리안의 반대편으로는 강철의 대공 이실렌의 로빈타, 그리고 마왕 리에르 아르빈트가 이끄는 코스모스가 격돌의 아침을 열고 있었다.
* * *
대지를 뜨겁게 달구는 해가 꾸물거리며 올라올 때, 로빈타와 코스모스 양 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양 군은 일주일간의 정적을 깨뜨리고 비안 평지 위에 재격돌을 준비하였다.
첫 대전의 대패를 잊었는지, 코스모스는 교단의 찬양가를 부르며 사기를 올리고 있었다.
그것을 방해하려는 듯이 로빈타의 중장병들은 두꺼운 갑옷의 가슴을 두드리며 전통적인 군가를 소리쳤다.
지휘관에서 장급, 일반 병졸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의심하지 않았다.
이번 격돌로 이 전쟁의 종지부가 찍혀질 것이란 것을.
“당신이 팔을 망가뜨려서 도와드릴 수 없잖아요.”
금발의 곱슬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은 귀염성 있는 얼굴을 찡그리며 칠흑의 청년에게 투정을 부린다.
그의 말마따나 전투 망치를 사용하는 오른팔은 붕대로 감긴 채, 어깨에 고정 끈을 달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카는 칠흑의 마왕이 이끄는 전투를 보기 위해 나왔다.
“네 도움 따윈 필요 없어.”
루비 빛 안광을 열며 리에르는 차갑게 내뱉었다.
미카는 당장에라도 자신을 베어버릴 것 같은 강렬한 살기 느꼈다.
하지만 그는 공포보다는 흥분에 도취하여 몸을 떨어 보였다.
미카는 알고 있었다. 저 차갑고 시크한 얼굴이 곧 일그러질 터였다.
저 매끄러운 목선으로 적들의 혈흔이 적셔질 터였다.
미카는 리에르가 광기에 적셔질 때 얼마나 매혹적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테헤라자드의 오른팔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각하, 설마 이번에도 사선진을 사용하실 생각입니까?”
교단의 책사인 핀란드는 톱니 같은 이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긴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흉흉한 모습의 그를 보며 리에르는 차갑게 일소했다.
“아니.”
처음부터 리에르는 사선진을 일회성으로만 사용할 생각이었다.
사선진을 사용한 그의 목적은 적에게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의 정예를 베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번 전투는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정공법으로 싸울 생각이었다.
“뭐, 좋습니다. 당신이 저의 지식이 필요할 때가 오기를 바랍니다.”
참모 핀란드는 자신을 신용하지 않는 리에르에게 으르렁거리듯이 말을 내뱉었다.
리에르는 모든 전투에서 오로지 힘으로 제압을 해왔다.
루나레이크에서 사용한 복병, 그리고 기습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전략적인 공격들은 리에르의 ‘예감’ 하나만으로 파훼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상성이 전혀 맞지 않는 불리한 진형으로도 상대의 전술적 진형을 영락없이 부서뜨렸다.
리에르 아르빈트는 아무리 상성 상 불리한 진형이라도 적의 약점을 찾아내는 것이 천부적으로 빨랐다.
코스모스의 참모인 핀란드 같은 지략가들에게는 가장 싫은 상대이자 가장 경계해야 할 상대였다.
책사들이 아무리 잘 짜놓은 시나리오를 갖고 덮을 준비 하며 함정을 파놓아도 그저 본능만으로 돌파해 내는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어떤 행동을 할지, 어떤 방법으로 올지 알 수가 없는 상대만큼 힘든 적은 없었다.
“그대로 이실렌의 목을 벤다.”
리에르 아르빈트는 붉은색으로 꿈틀거리는 눈동자를 들으며 차갑게 조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