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74)
레필리아 레소드-275화(274/398)
레필리아 레소드 275화
로빈타 전쟁(3)
교단의 광신도들의 사망자 1만 5천, 그리고 로빈타의 사망자는 2만 2천이었다.
수 없는 목숨이 비안 평지에 죽음으로 밭을 일궈냈다.
마왕 리에르는 치열한 전투가 끝난 뒤, 이틀간의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남은 9천의 교단 군을 이끌고 마왕은 로빈타 왕국을 점령하기 위해 진군을 시작했다. 교단은 모든 것을 짓밟았다.
자신들의 믿음과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였고, 따르지 않는 모든 이를 죽음으로 대했다.
억울함을 호소할 곳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마왕 군에게 학살당하는 로빈타를 도와줄 곳이 없었다.
아렌 왕국은 폭룡 네버 에이지와 사활이 걸린 대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페리안은 자그마치 십여 국의 연합 공격을 받으며 국가 사활이 걸린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로빈타를 구원할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9천에 불과한 마왕 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교단의 선지자인 아르미안이 직접 1만의 정예를 이끌고 찾아왔다.
병력이 보충되자 더는 로빈타의 남은 세력들도 저항이 무의미했다.
비안 평지의 참혹한 전쟁이 끝난 지 약 1개월 만에 강철의 왕국, 로빈타의 왕도는 교단에게 점령당하였다.
로빈타의 왕과 신하들을 모두 귀향시켜 목을 베었어도, 뜻있는 열사들은 검을 버리지 않고 마왕 군과 게릴라전을 펼쳤다.
코스모스의 문양을 그린 군인을 상대로 무자비한 살해 행위.
그것은 로빈타의 수도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대낮의 유혈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마왕은 일반 시민 속에 숨어 있는 게릴라를 굳이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로빈타의 열사들이 활약할 때마다 랜덤하게 뽑은 시민 백 명을 참수했다.
그 다음번에는 이백 명. 그다음에는 사백 명이었다.
로빈타의 게릴라전이 한 번 벌어질 때마다 죄 없는 로빈타 인들은 죽어 나갔고, 자연스럽게 의미 없는 게릴라를 지향하는 열사들을 향한 비난이 쏟아져 내렸다.
죽인 것은 마왕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왕의 심기를 건드린 열사들만이 적의로 간주한다.
결국, 로빈타 독립운동을 펼쳐내던 뜻있는 열사들은 겨우 2개월 만에 마왕 군에게 토벌당하였다.
교단은 조건 없는 학살만 반복한 것이 아니었다.
마왕 리에르는 절대적인 복종을 주문하였고, 그것을 따르고 코스모스의 문양을 걸치면 그들을 같은 백성으로 대우하였다.
복종만 한다면 죽이지 않는다.
그것은 비굴했지만 달콤한 유혹이었다.
처음에는 지독하게도 반감을 보이던 로빈타는 천천히 교단의 식민지로 바뀌게 되었다.
복종을 시작한 로빈타의 국민을 상대로 마왕은 절대적인 안전을 선물했다.
한창 전쟁을 하는 군대는 점령한 상대국에 온갖 약탈과 온갖 범행을 저지르게 마련이었다.
로빈타의 국민이 복종하기 이전에는 교단의 그런 악행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복종이 시작된 이후로 리에르는 일반 시민을 건드리는 병사는 누구든지 전부 참수하였다.
치안을 담당하는 것은 리에르 아르빈트가 특별히 엄선한 자들로만 이루어져 있었고, 명령에 불이행하는 자들은 즉결 심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심판 기사라고 불린 이들은 칠흑의 제복을 걸치며 모든 이들에게 두려움의 상징처럼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직은 돌아갈 수 있어, 리엘.”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핏빛으로 물들었던 로빈타의 왕실.
그 왕좌에 앉아 바깥을 직시하는 칠흑의 마왕 곁으로 진녹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걸어왔다.
교단의 흰색 제복을 상의로 걸쳐도 육감적인 몸매는 감추어 낼 수 없었다. 무릎 위로 제단 된 치맛자락 끝이 간질이는 그녀의 다리.
그것은 남성들의 이목을 옭아매는 마법과도 같았다.
하지만 왕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칠흑의 마왕, 리에르 아르빈트는 관심 없는 루비 빛 눈동자로 테라스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빈타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왕좌가 바뀌었다는 것과 나라를 움직이는 대신들이 숙청되었다는 것. 그런 것들 이외에는 일반 시민들은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매일 아침 코스모스의 법도에 따라 예배를 해야 한다는 것과 치안에 관련해서는 잔혹해졌다는 것.
하지만 일반 시민들에게 피해는 없다시피 하였다.
“이미 돌아갈 수 없어.”
공포 정치가 나라의 이름을 빼앗았어도 그것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이전과 같이 물건을 팔고, 요리하고, 내일의 삶을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잊지 않고 있었다.
로빈타를 지키기 위해 병사 2만 중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비안 평지 위에 잠들었다.
“이 이상은 가면 안 되는 길이야.”
“아니, 가야 할 길이지.”
차가운 루비 빛 눈동자. 리에르와 시선을 마주한 진녹색 머리카락의 여성, 아르미안은 안타까움에 입술을 깨물어 보였다.
이미 리에르는 괴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괴물이라고 하는 것은 포스의 힘을 기반으로 한 인간 이상의 무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탈을 쓰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지르는 행동. 자아는 붕괴하고 정상적인 시선으로 삶을 바라볼 수 없는 인격.
그를 이 길로 인도한 것은 아르미안 자신이었다.
“내가…… 세계의 균형자로서 널 택하지 않았다면…….”
아르미안의 고운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가 포스로서 각성하는 것을 막으려 했었다. 그에게 검술을 가르치면서 알게 모르게 정에 굶주렸던 자신.
포스로 각성하게 되면 광기에 지배되어 살리란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결국 방관하고 말았다.
테헤라자드의 지시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르미안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욕심을 부렸다. 그녀 자신의 광기.
테헤라자드에게 저주받은 운명. 자신이 사랑을 주면 저주로 되돌아오는 끊을 수 없는 운명.
그것은 리에르를 갈구하게 했다.
잠시만 놓으면 자신의 곁에 있었던 모든 이들이 배신하고 떠나 버린다.
엘 파실드가 그랬고, 리즈 지센라이드가 그러했다.
리에르를 차라리 자신의 인형으로 만들어서라도 곁에 두고 싶었다.
그가 떠날까 봐 두려웠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입히고, 피로 손을 적시게 하면 그가 있을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자신의 옆자리뿐이었다.
그렇기에 아르미안은 원했다.
파트너로서 함께 있는 것뿐이 아닌 더 친숙하고, 더 깊은 관계가 되기를 갈구했다.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어 버리는 자신의 운명, 저주를 알기에 아르미안은 스스로를 봉인하고 깊은 심연으로 떨어졌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어린 소년과 만났고, 그 소년의 얼굴과 목소리는 몇 년이 지나도 어제의 기억처럼 생생하기만 하였다.
죽음에 이르는 병. 불사의 존재지만 정신적으로 죽어버리는 지독함.
그것은 몸서리칠 정도로 두려웠다.
아르미안은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타인에 의해서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지는 리에르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였다.
“모든 것이 나 때문이야.”
아르미안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속죄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을 바쳐서라도 속죄하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에르는 핏빛의 왕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겉으로 보기엔 가녀리기만 한 진녹색의 여성.
리에르는 그녀의 턱을 향해 부드러운 손길을 뻗어 보였다.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리에르의 손길을 아르미안은 따뜻하다고 느껴졌다.
아르미안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은 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리에르는 차갑게 조소하였다.
“걱정하지 마.”
리에르의 손길이 아르미안의 잘록한 허리를 매만진다.
교단의 제복 겉에서도 느껴지는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
턱에 맺히는 아르미안의 눈물을 닦아주며 리에르는 자상하게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너의 최후도 만만치 않을 테니.”
자상하게 미소 짓지만 차갑고 냉소적인 리에르의 루비 빛 눈동자.
아르미안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자상하게 대해주면 불편할 수 있었다.
리에르의 평화로웠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 것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아르미안의 욕심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리에르는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하게 직업을 갖고, 평범하게 살아갔을 터였다.
검술에 재능에 눈뜨지 않고, 전투와 관계없는 인생.
비록 아르빈트 가문이라는 압박감은 여전하겠지만 오히려 행복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의 평온함을 부숴 버린 것은 아르미안 자신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해서 그런 삶을 부쉈기에 아르미안은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세상에 적의로만 가득한 리에르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증오스럽고,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아르미안뿐이었다.
리에르의 손이 아르미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은 가느다란 허리.
다른 한 손으로는 볼록한 그녀의 가슴께로 다가가 제복의 깃을 쥐어틀며 조소했다.
“넌 그저 네 욕망대로 날 이용했을 뿐이야.”
리에르의 루비 빛 눈동자가 아르미안을 직시하였다.
비웃는 듯한 리에르의 말에 아르미안은 그 어떤 변명도 늘어놓지 못했다.
리에르는 아르미안의 팔을 낚아채서는 자신이 앉았던 왕좌에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아르미안의 제복 깃을 쥐고서는 잡아 틀어 보였다.
깃을 잡아당기자 아르미안이 입은 얇은 블라우스가 눈 안에 들어온다.
리에르는 그녀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천천히 순백의 크라바트를 풀었다.
희고 매끈한 목선, 그 아래로 보이는 쇄골을 리에르의 손끝이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움찔하는 아르미안의 반응과는 관계없이 리에르는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들을 투둑, 툭. 끊듯이 털어내었다.
매듭이 끊어진 블라우스의 틈새 사이로 아르미안의 흰 피부가 드러나고 육감적인 가슴 언저리가 탐욕의 시선을 끌어낸다.
아무것도 감싸지 않은 그녀의 맨살을 리에르의 손이 어루만졌다.
“내 기억에 족쇄를 걸고, 마음껏 욕정을 채웠을 때의 기분은 어땠나? 흥분이 돼서 참을 수가 없었나?”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빈정거림에 아무런 대답도 하질 못했다.
그녀의 대답 따위는 기다리지도 않았다는 듯이 리에르의 얼굴이 아르미안의 가슴으로 향한다.
윤기가 흐르는 듯이 풍만한 가슴의 언저리로 리에르의 입술이 닿는다.
아르미안은 전기가 오는 듯한 느낌에 입술을 사리물었다.
타액을 머금은 리에르의 혀끝이 아르미안의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향기가 흐르는 듯한 살결. 그것을 느끼는 리에르의 다른 손이 아르미안의 허벅지 사이를 타고 들었다.
그녀의 몸이 천천히 반응을 보이는 것이 손끝으로, 혀끝으로 느껴졌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살결이 부드럽고 음험하게만 느껴진다.
입술을 사려 물고만 있는 아르미안의 미간이 찡그려지는 것을 보고 리에르는 묘한 쾌감을 느끼며 비아냥거림을 품었다.
“네가 좋아하는 행위가 아니던가?”
이를 드러내는 리에르의 얼굴을 보면서 아르미안은 처연한 얼굴로 바라본다.
그가 용서를 빌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가 싸우다 죽으라고 하면 싸울 수 있었고, 몸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로 인도한 자신의 책임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질 수 있다면.
하지만 리에르가 생각하는 이유가 그런 것이 아님을 알기에 아르미안은 서글픈 얼굴로 입술을 꼭 다물었다.
“말했잖아.”
그런 얼굴 하지 말라는 듯이 리에르는 유들유들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르미안의 귓가로 가까이 다가오는 리에르의 입술.
그것은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의지를 전달한다.
“너희가 나를 이용한 만큼, 나도 너희를 이용하겠다.”
“그래, 알고 있어…….”
“너희에게 받은 만큼 모든 것을 되돌려 주겠다.”
“응, 그랬었지…….”
리에르가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뒤덮었던 그 날의 밤.
아르미안의 손을 잡기로 한 핏빛 달이 뜨던 날의 밤.
리에르는 아르미안에게 말했었다. 자신의 운명을 일그러뜨린 모든 존재에 대해서 갚음을 하겠노라고. 그 원한에서 아르미안의 존재도 자유롭지 못했다.
리에르의 기억에 속박을 걸고, 그의 육체를 가졌던 날의 밤.
자신의 욕심 때문에 한 소년의 인생을 일그러뜨렸다.
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옆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 행복해야 하는데 서글픔만 찾아들었다.
지독한 번뇌가 아르미안을 사로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아르미안 자신의 말을 절대 거역하지 못하는 인형.
그것은 아르미안의 의지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지만 단 한 조각의 진실도 담지 않았었다.
그를 곁에 두어도, 그의 육체를 가져도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르미안은 그 인형에게서 따뜻함을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