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75)
레필리아 레소드-276화(275/398)
레필리아 레소드 276화
아리아(1)
턱에서 목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그의 입술로 만들어지는 애무가 왠지 모를 치욕감마저 일으킨다.
애정을 확인하기 위한 행위가 아닌, 악의를 보여주는 리에르의 손길에 아르미안은 거부감을 일으켰다.
품 안에서 벗어나려는 아르미안을 리에르는 힘으로 팔목을 붙들었다.
마력도, 무력도 모든 것은 이제 리에르가 그녀보다 우월했다.
그렇기에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품 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과도 같았다.
“이제 됐으니 그만해!”
핏빛 왕좌에 앉혀진 채로 리에르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아르미안이 작지만 단호하게 입을 열어 보였다.
리에르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임은 알고 있었다.
리에르에게 몸을 얼마든지 허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그저 차가운 증오만 품었고, 애무하는 손길은 마치 짐승이 물어뜯는 것처럼 아프기만 했다.
이전과 같은 두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없다는 의미.
지금의 리에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몸으로 보여주고, 걷잡을 수 없는 괴로움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였다.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아르미안은 잘 알고 있었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거부 의사조차 밝힐 수 없는 인형에 불과했지.”
차가운 루비 빛 눈동자가 증오를 품는다.
적의만이 가득한 리에르의 눈동자 안으로 아르미안은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핏빛의 왕좌 위로 헝클어진 진녹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제멋대로 찢겨나간 제복 사이로 흰 속살이 드러나 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추하고, 현실성을 깨닫게 만든다.
추한 자신의 모습을 담은 루비 빛 눈동자가 점점 가까이 확대되는 것을 느꼈을 때 촉촉한 입술이 포개어졌다.
아르미안을 능욕하려는 속셈치고는 부드럽고도 농밀한 키스였다.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아르미안은 눈을 감지 못했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안구 사이로 리에르의 루비 빛 눈동자가 비친다.
무심하고 차가운 눈동자.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의 증오를 품고 있지 않았다.
무엇이라 설명하기 어려운 그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연민.
포개어졌던 입술을 떼어냈을 때, 아르미안이 느꼈던 감정들은 모두가 착각이라는 듯이 리에르가 차갑게 웃어 보인다.
“죽이기 전에 사라지면 곤란해.”
리에르의 말한 의미가 무엇인지 아르미안은 잘 알고 있었다.
테헤라자드의 저주들 덕분에 몸을 유지할 수 없는 그녀.
강한 마력을 주기적으로 공급받지 못한다면 아르미안의 몸은 사라지게 된다.
예전에는 리에르와 동침을 통해 공급받았었다. 이제는 리에르와 그럴 일이 없어 차츰 마력이 옅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 봬도 그건 신의 물건이니까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될 거야, 하하.”
둘만 있던 공간 안으로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르미안은 흐트러진 옷을 감싸 안고, 리에르의 시선은 뒤편에 나타난 장신의 남성에게 향했다.
마치 성게를 연상시키는 길고 뾰족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는 손뼉을 치면서 아르미안과 리에르에게 흰 이를 드러내 보였다.
“무슨 일로 그 더러운 낯짝을 보이러 왔나?”
신경질적인 리에르의 살기를 느끼면서도 뭐가 유쾌한지 뾰족한 붉은 머리의 장신은 연신 하하, 웃어 보였다.
“난 자네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이거 너무 하구만. 그분은 은근히 질투가 심하거든 말이지.”
“테헤라자드 놈의 심부름을 왔으면 할 말이나 내뱉고 꺼져.”
이 세상의 신. 절대자인 신을 비아냥거려도 붉은 남자는 언짢은 기색 없이 맑게 웃어 보인다.
미치광이 신 테헤라자드를 보좌하는 네 마리의 수호신장.
그중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를 보며 리에르는 달갑지 않은 시선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가 리에르에게서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아르미안에게 향하였다.
그의 눈꼬리가 유쾌하다는 듯이 치켜 올라간다.
“뭐 하고 다니는 꼴을 보니 지금 당장에 임무를 수행해도 되겠구먼.”
“시답잖은 말장난은 여전하군. 일단 네놈의 더러운 혓바닥부터 잘라놓고 대화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까?”
리에르의 등 뒤로 칠흑의 깃털들이 모여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는 급하게 손사래를 치면서 소리쳐 보였다.
“아, 참아줘! 너랑 싸우면 그분께 혼난단 말이야.”
테헤라자드는 자신의 유흥을 위해 풀어놓은 장난감이 누군가에게 방해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것은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수호신장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허락 없이 붉은 사내는 엘 파실드와 전투를 했다.
그 덕분에 그는 한동안 테헤라자드에 의해서 펄펄 끓는 가마솥에서 삶은 고기 신세가 되어야 했다.
“그분께서 다음 아티팩트를 가동시키라 하신다. 지금껏 즐겁게 구경하고 계신다고 응원의 말씀도 내리셨지.”
무엇이 즐거운지, 뾰족 머리의 사내는 연신 하하, 웃어젖혔다.
그런 그를 향해 리에르는 입가에 픽, 하는 비아냥거림을 품어 보였다.
“내게 참견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리석은 짓 하지 말게. 그분에게 거역하는 것은 좋지 않아. 자네의 힘 따위는 그분 앞에서는 어린아이의 재롱과도 같은 것이지.”
뾰족 머리 사내의 말을 듣고 리에르의 등 뒤로 칠흑의 깃털들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강력한 검은 자장을 흩뿌리며 이내 칠흑의 날개를 이루어 낸다.
펼쳐 들은 네 장의 날개를 보면서 뾰족 머리 사내는 유쾌한 듯이 박수갈채를 쳐 내렸다.
“하하하, 이거 몸만 컸지 아직 애군. 아니, 겨우 23년이면 어리긴 어리군. 그래, 그 강력한 날개의 힘으로 내 목을 벤다면 속은 편하겠지. 하지만 자네도 편치 않을 건데?”
뾰족 머리 사내는 갸우뚱거리며 목을 들이대 보인다.
죽일 테면 죽여보라는 듯한 도발.
리에르는 이를 사리 물으며 아르카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때 뒤쪽에서 팔을 붙잡는 것이 느껴진다.
리에르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자 아르미안의 진녹색 눈동자가 만류하고 있었다.
뾰족 머리 사내가 가진 힘도 보통은 아니었다.
지금은 약하디약한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그것을 벗어 던지고 나면 그는 테헤라자드의 수호신장 중 하나로 탈바꿈하게 된다.
테헤라자드가 만든 이 세상을 마음껏 능욕할 수 있는 존재.
리에르가 마음먹고 싸운다면 못 싸울 것도 없었지만, 적은 그 하나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목적의 근처까지 가기 위해서는 아직 그들과 전면전은 피해야만 했다.
입술을 깨물어 보이며 리에르는 칠흑의 날개를 접어 들었다.
그제야 뾰족 머리 사내는 살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우리 중앙 교단에 위치한 그랜드 크로스 (Grand Cross)가 하나, 루나레이크에서 얻은 문 리버(Moon River), 이곳 로빈타에서 얻은 룬 위시(Rune Wish)까지 셋이군.”
대단하다는 듯이 뾰족 머리 남성은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만세를 해 보인다.
그런 그를 당장에라도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과 살의를 억누르기 위해서 리에르는 이를 사려 물고만 있어야 했다.
“다음은 어디인가? 자네의 아버지가 가진 성검 발락시아(Ballacksia)인가?”
되먹지도 않게 사람 좋은 얼굴을 해 보이며 뾰족 머리 남성은 고민스러운 얼굴을 해 보인다.
자신의 아버지가 가진 아티팩트, 성검 발락시아도 표적 중의 하나였다.
가족과 싸워야 한다는 슬픔을 뺀다 하여도 아버지는 너무나 강력한 적이었다.
“아니면 자네의 친구가 가진 아티팩트 투 헤븐(Two Heaven)인가?”
“그 어느 쪽이든 둘 다 내가 가질 물건이다, 라파엘.”
“오, 맙소사. 자네는 친구도 아버지도 베는 악마란 말인가!”
라파엘이라 불린 남성은 안타깝다는 듯이 이마 언저리를 짚으며 머리를 저어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리에르의 붉은 눈동자는 살기를 피워 올렸다.
“날 막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베어주지. 그것이 네놈과 네놈의 주인이라 해도 말이야.”
“농담이겠지?”
리에르의 살기등등한 말에 라파엘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입가로 웃음이 그려진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진심으로 유쾌하다는 듯이 박장대소를 하며 손뼉을 쳐 보였다.
“하하하, 과연. 그 미카엘이 발정 나서 따라다닐 만하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 자네는.”
그렇게 말을 내뱉은 라파엘은 웃던 것을 멈추고 진지한 얼굴로 리에르를 노려보았다.
“네놈과 그년, 그리고 패배자 엘 파실드가 무슨 음모를 꾸미든 간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살기등등하게 말을 내뱉은 라파엘은 하하, 웃어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리에르는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역시 이 세계의 신이니만큼 테헤라자드의 눈길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엘 파실드, 아르미안.
이 두 사람과 손을 잡은 부분을 눈치채고 있었다.
테헤라자드의 충견, 그를 위해서라면 천년만년 노동을 지불한다는 라파엘조차 눈치채지 못한 리에르의 진의.
“그래, 어차피 너희들의 손안에 놀아나는 것뿐이겠지.”
리에르 아르빈트의 루비 빛 눈동자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네라는 물건은 가짜에 불과해. 예나 지금이나 말이지.”
라파엘은 빈 허공에 박수를 쳐보였다. 그러고는 힐난하는 눈동자로 속삭였다.
“리에르 아르빈트, 아니.”
라파엘은 테헤라자드가 가장 먼저 만든 수호신장이었다.
그는 항상 테헤라자드가 원하는 것은 가장 선두에 서서 움직였었다.
“아리아 오트리아 리체 다시 만나 반갑다.”
악연은 언젠가 다시 만난다.
* * *
개미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자신의 굴을 만들었다. 그들이 지켜야 할 여왕개미를 수호한다.
지켜야 할 존재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움직였다. 철저한 계급 사회를 통해 그들은 사회를 구성시켰다.
갑자기 개미들은 날씨가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치명적인 열 반사로 인해 그들의 몸은 타들어 갔다.
생존을 위해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었던 안전한 굴로 향했다.
얼마간의 보존식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가 얼른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의 소망대로 뜨겁게 작열하는 더위는 멈춰졌다.
그동안 일하지 못한 만큼 일개미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갑자기 거대한 바위가 굴러왔다.
개미들은 혼비백산하며 대피할 것을 전달했다.
다행히도 몇 마리의 개미 이외에 피해는 적었다.
그런데 갑자기 홍수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분명 그들이 알고 있는 한 이런 물줄기가 생겨날 리 없었다. 그들은 혼비백산했다.
자신의 굴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서둘러 바위로 입구를 막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물이 그들의 굴 안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동료와 가족들은 갑자기 시작된 물난리로 인해 많은 생명을 앗아가게 되었다.
개미들은 갑자기 생겨난 재난에 슬퍼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주변의 다른 개미들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들은 자신들에 비해 매우 거대하고 매우 포악한 개미들이었다.
간혹 약탈을 했던 적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전쟁을 위해 군대를 형성한 것은 처음이었다.
개미들은 신을 원망했다.
하지만 개미들은 몰랐다.
그들의 너무나 평화로운 일상이, 하루하루 똑같은 쳇바퀴 같은 일상이 누군가에겐 고통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