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77)
레필리아 레소드-278화(277/398)
레필리아 레소드 278화
아리아(3)
아르미안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리에르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하지만 리에르는 그녀가 원하는 답을 들려줄 수 없었다.
죽어가다가 겨우겨우 혼미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을 뿐. 그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중상을 입었다.
다시 혼절해 버린 리에르를 보고 아르미안은 다른 생각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였다.
일단은 그가 무사하기만을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르미안은 계속 교단으로 향하면서도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별거 아닌 말이었다.
하지만 아르미안은 조금 전의 리에르가 예전에 알던 누군가와 분위기가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어떻게 보면 그와 리에르는 닮은 부분이 많았다.
어찌 되었든 아르미안은 힘이 다하기 전에 리에르를 데리고 교단에 도착했다.
단 그녀가 도착한 곳은 중앙 교단이 아닌 코스모스의 지부였다.
코스모스 교단은 전부 많은 양의 마력들이 네트워크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록 중앙 교단이 아니어도 아르미안은 자신이 필요한 양의 정보 수집과 마력 채취를 겸할 수 있었다.
아르미안은 지부에 도착해서 리에르의 존재를 철저하게 숨겼다.
지부장이나 다른 고위급 사제들은 의혹을 품는 듯 보였으나, 선지자의 말을 거역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교단에서 가장 높은 교황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선지자였다.
그러니 교리에 몸담은 이들에겐 선지자의 말은 곧 신의 말과도 같았다.
그 덕분에 아르미안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리에르의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다.
리에르는 도중에 한 번 혼미한 정신을 깨웠던 이후로 다시 일어나는 일이 없었다.
거의 죽은 듯이 잠만 자는 리에르를 보며 아르미안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가 이렇게 목숨이 살아 있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루, 그리고 또 하루. 일주일, 또 일주일. 한동안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그동안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아 아르미안의 걱정을 샀던 리에르가 깨어났다.
아르미안은 그가 다시 일어선 것을 보고 감격스러움에 벅찼다.
당장에라도 아르미안은 리에르를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살아나 줘서 고맙다고. 이제부터라도 널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아르미안은 억지로 자신의 심정을 내리깔며 입술을 깨물었다.
침대에 앉은 리에르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공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르미안은 리에르가 어떤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리며 그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리에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된 것인지 따위는 묻지 않았다.
아르미안을 향한 독설조차도 하지 않았다.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그런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짧았지만, 리에르와 항상 함께했었다.
그렇기에 그가 얼마나 에레사를 사랑하고 신뢰하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나 세상에 외면받는 그로서는 에레사의 존재가 누구보다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죽으라는 독설을 받으며 칼에 찔렸으니 누구라도 상실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아르미안은 그런 식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다.
“하하…….”
리에르는 짧게 웃어 보였다.
그동안 제대로 된 것은 먹지도 못했기에 힘이 없었다.
그런데도 리에르는 입가를 벌리며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하!”
짧고도 공허한 그의 웃음은 마치 우는 것만 같았다.
아니, 실제 리에르의 마른 눈가가 적셔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오열했다.
아르미안은 그런 그에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대신했다. 여기서 아르미안은 다시 한번 큰 착각을 했다.
리에르가 지금 우는 이유는 모든 것을 잃었다는 허탈감 따위가 아니었다.
짙은 증오와 분노. 너무나 압도적이고 큰 고통 속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는 것뿐이었다.
테헤라자드의 단검. 그것은 아르미안의 휘광을 잃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사랑 받을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리에르에게는 그와 같은 저주가 걸리진 않았다.
리에르는 혼란스러운 기억들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의 기억은 에레사에게 찔린 일이었다.
회상하자 리에르는 눈가에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자신을 향해 죽으라고 저주했다. 그 순간은 거짓말처럼 잔인했다.
리에르는 성장한 유트와 유이를 다시 만났다.
너무나 기뻤다.
식어버린 심장이 온기로 덮여가는 것을 느꼈다.
혼자서 설원을 걷는다.
느끼지 않아도 살기를 가진 추격자들이 따라붙었다.
포스를 잃었어도 연륜이란 것은 상식을 초월하고 있었다.
아르미안의 명령에 따라 그녀에게 해가 되는 존재들을 배제했다.
리에르는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소중했다.
리에르는 폭주했다.
라에룬이 모든 것을 지배하려 들었다.
사랑스럽고 소중했던 에레사. 그녀의 죽음을 목격한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후우, 하아.”
리에르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이 기묘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마치 주마등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매우 천천히, 매우 느리게.
리에르는 검술 대회에서 우승했다.
기뻤다. 그리고 아르미안에게 검술을 사사 받았다.
강해지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배우지 못한 가문의 검술을 배우고 싶었다.
그래야만 에레사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비록 코흘리개에 지저분한 몰골이라고 손가락질받아도 하루하루 생동감 가득한 나날이었다.
리에르는 형이 부드러운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에레사의 붉어진 얼굴은 보기 싫었다.
리에르는 옆집에 이사 온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토끼 인형을 끼고 앉은 모습은 너무나 귀여웠다.
아니, 그 소녀 자체가 인형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누군가가 리에르의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리에르라고 불리게 되는 것은 너무나 따뜻한 곳에서 자신의 고동 소리를 전해주었다.
항상 노랫소리처럼 속삭이는 다정함 들이 기뻤다.
하지만 시커먼 무언가가 꾸물꾸물 몸을 감싸고 감쌌다.
눈을 떴다. 은발의 잘생긴 미소년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위대한 교단의 지배자시여, 당신은 영원한 제 은인입니다.”
보기에도 소년은 총명하고 긍지 높았다.
소년은 검은 사제를 의부로 모시고 살았다.
그는 매우 위대한 존재였고, 매우 자애로운 인물이었다.
신앙의 중심이었고, 인간의 중심이었다.
검은 사제는 소년이 패왕으로서, 영웅으로서 성장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의 꽃을 꺾어버렸다.
죽어가면서도 믿지 못하는 은발의 영웅을 보고 검은 사제는 미소를 흉내 냈다.
살아 있음을 느꼈다.
주변에서 익숙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비명과 잠식만이 가득한 대지 위에서 그는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손짓 하나에 몇천, 몇만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침없이 자기 생각을 전파했다.
전파된 그 생각에 따라 수많은 생명의 불꽃들이 꺼져 나간다.
그래도 즐거웠다.
살아 있음을 느끼니까.
천천히 굴러가던 태엽은 빠르게 감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포효하기 시작했다. 그것의 하울링을 듣고서 뒤따르던 그림자들이 나약한 인간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 만들었던 사각 건물들은 두부처럼 허물어졌다.
그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의지에 용서를 구하지 않고 멋대로 둥지를 튼 그것들을.
짓밟힌 토마토처럼 바닥에 소중한 것을 드러낸 인간들.
그것을 보면서 그것은 살아 있음을 느꼈다.
붉은 머리의 미청년은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다시 한번, 그리고 또 한 번 물었다.
그는 분명히 굉장히 강한 존재였다. 그리고 천재적인 인재였다.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어리석은 것이 있었다.
고독이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 정에 굶주리지 않은 척하면서 정에 굶주린 인물처럼 손쉬운 상대는 없었다.
붉은 머리의 미청년은 자신이 어머니처럼, 누나처럼 따르던 마리라는 여성을 되살리고 싶어 했다.
그것이 신의 섭리를, 인과관계의 뒤흔든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렇기에 미청년은 자신을 믿고 있던 존재를, 자신의 곁에 있던 이들을 배반했다. 그리고 그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수면을.
“그만…….”
리에르는 앞 머리카락을 움켜쥐듯이 쓸어 올렸다.
옆구리에서는 핏물이 마르지 않았다. 마치 생명이 빠져나가는 듯 느껴졌다.
“이제 나에게 더 들어오지 마!”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자신이 겪지 않았지만 겪은 그것들은 사정없이 입증하고 증명해 내려 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다시 빠르게 수많은 자신이 지나쳐갔다.
애써 검은 머리의 청년은 눈가를 감으며 그것들을 회피했다.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 순간 자신의 눈앞에 비치는 인물이 아니었다.
설마 하며 바라본 그의 모습은 낯익은 인물이 있었다.
“제발……. 무엇이든 할 테니……!”
칠흑의 청년이 눈가를 억지로 열어 보이며 소리쳤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소중하게 했던 동료들에게 배신당했다.
그는 매우 어리석었다.
자신에게 소중한 이들도 마찬가지로 소중한 이들이 있었다.
그 소중한 이들은 소중한 이들을 지켜야만 했다. 딱히 그 이유가 아니라도 좋았다.
소중한 이들은 마찬가지로 칠흑의 청년을 소중하게 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속으로는 청년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소중한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청년을 비극으로 몰고 갔다.
그런데도 칠흑의 청년은 소원하고 소망했다.
그의 애걸복걸하는 모습이 너무나 즐거웠기에 모두는 잠시 지켜보았다.
그리고 칠흑의 청년이 힘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진영아…….”
칠흑의 청년은 모든 것을 잃은 듯이 오열했다.
모두는 그의 앞에서 전라가 된 여성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그녀의 육체를 닭고기 찢듯이 조각내기 시작했다.
북, 두둑.
잔인하고 소름 끼치는 근육 찢는 소리. 짓밟는 내장의 소리.
칠흑의 청년은 그것을 지켜보며 혼절하지 않았다.
아니, 억지로 혼미해지는 눈동자에 새겨놓고 기억하려 애썼다.
굳게 깨문 입술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온다.
온 핏줄이 곤두설 정도로 지켜보던 청년은 백색으로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기억하겠다.”
백색 청년이 피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똑똑히 기억해 두겠다.”
살아 있음을 느꼈다.
시간의 잔상처럼 백의 청년은 사라졌다.
아니, 주변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진녹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미소하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영광을 내려놓고 타락했다.
오로지 한 남자를 위해서. 그는 이미 다른 여성의 남편이 되어 있었지만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의 휘광을 잃고도 사내를 찾아왔다.
딱히 그가 자신을 받아줄 것이란 착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제는 중독처럼 되어버린 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행복감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진녹색 머리카락의 여성은 설렘을 안고서 그를 찾아왔다.
하지만 그녀를 맞이한 것은 칠흑으로 아려진 섬광이었다.
서걱!
진녹색 머리카락의 여성은 자신의 배에서 분수처럼 쏟아지는 핏물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연분홍 내장들이 사타구니에서 무릎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째서…….’
진녹색 여성의 말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살아 있음을 느꼈기에. 진녹색 머리카락의 여성은 그 죽음을 끝으로 완벽하게 하늘의 버림을 받았다.
한 번 죄를 짓고도 다시 똑같은 죄를 지은 그녀를 신은 용서치 않았다.
그녀는 이름을 빼앗겼다. 그리고 영원히 어둠만이 남는 죄인들의 땅으로 떨어졌다.
자신의 영원한 반려자, 영원의 조력자를 베어도 그는 일말의 슬픔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문득 뺨 위로 떨어지는 물기를 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피가 튄 손에 묻어져 나오는 것은 냉랭한 눈가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었다.
애써 그것을 닦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신선한 감정이라고 느꼈기에.
아리아라고 불리는 그는 귀에 닿을 만큼 찢어질 듯한 초승달 미소를 지어 올렸다.
두근거렸다.
살아 있음을 느낀다.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