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78)
레필리아 레소드-279화(278/398)
레필리아 레소드 279화
아리아(4)
리에르는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이 방금 벌어진 일처럼 생생하기만 했다.
인류 최초의 영웅 아리아 오트리아 리제로서 겪은 모든 신화는 거짓말처럼 사실적으로 느껴졌다.
리에르는 애써 힘겹게 여며진 입가를 열었다.
“아르카…….”
-네, Master.
리에르는 몇 일간 제대로 된 음식은커녕 수액만으로 연명했다.
덕분에 전신에 힘이 하나도 없었기에 입술을 여닫는 것조차 무거운 추가 걸린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 가진 의문들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네가……. 아리아가 가졌던 칼리프 니체냐.”
-아르카 System은 마검 칼리프 니체라는 개체명으로 불린 적이 있습니다.
리에르는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리아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황금의 샘에서 목숨을 걸고 소환했다는 전설의 마검.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쉽게 알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아르카는 투박해 보이는 색이지만 그 어떤 명검보다도 예리했다.
아울러 강도는 그 어떤 물질보다 단단했다.
또한, 필요성에 따라 형체가 변환되고, 여러 가지 보조 시스템이 사용자의 전투력을 올려주었다.
이런 평범하지 않은 무기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내가…….”
리에르는 잠시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었으나 궁금한 이야기였다.
잠시 고민했던 리에르는 결국 입가로 질문을 내보이고 말았다.
“내가 아리아와 동일 인물이냐?”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아리아와 리에르는 다른 인물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리에르는 아르카에게 질문했다.
어쩌면 그것은 답변을 듣고 싶어서 한 질문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끼익.
리에르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소리를 낸 주인이 누구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리에르가 마실 물을 침대 맡에 놓았다.
그러고는 먹을지 안 먹을지도 모를 죽을 가져왔다.
아르미안은 리에르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가 어째서 자신의 이명을 알고 있는지, 어째서 칼리프 니체를 잘 운용하는지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르미안이 리에르의 검, 칼리프 니체를 몰라봤을 리가 없었다.
그녀 자신이 인간으로서 죽었을 때, 살해당했던 무기가 칼리프 니체였기 때문이었다.
“아르미안.”
리에르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아르미안은 갑자기 리에르가 입을 열자 흠칫했다.
그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침묵만을 지키고 있던 그였다.
“그래, 말하렴.”
아르미안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아 보였다.
비극적인 일을 경험한 그는 정신이 붕괴하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어떤 폭언과 비난이 쏟아져도 전부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에르의 입에서는 믿지 못할 말이 튀어나왔다.
“이번에 목숨을 빚졌다.”
“아니야…….”
예상치 못한 리에르의 말에 아르미안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르미안은 리에르가 어딘가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물론 그는 지금까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던 그는 질투하고 좌절했다.
또한, 그는 육체적으로 강해졌을 때,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소중한 존재들에게 기대고, 자신의 존재감을 잊는다.
맹목적으로 누군가에게 방법을 바라고 도움을 요청한다.
그냥 적당히 응석만 부리면 어떻게든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매우 참담했다. 그리고 오히려 정신은 피폐해지기만 했다.
썩어 문드러져 가는 정신 속은 도덕심도, 법칙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날 원망하렴.”
아르미안의 처연한 눈동자가 리에르를 향했다.
정말 해맑았던 소년은 지금 마왕의 눈동자로 뒤바뀌게 되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아르미안 자신이 가진 소망, 즉 테헤라자드가 걸은 저주는 그녀가 광기에 살게 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저주.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녀는 리에르를 향한 죄책감을 표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쪽의 눈동자로는 리에르를 소유하고, 포박하고 싶었다.
아르미안은 리에르가 에레사에게 배신당하고, 친구들에게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된 것을 분명히 기뻐했다.
이율배반적인 그녀의 몸과 마음도 이미 망가질 만큼 망가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 부분에서 보자면 그녀도 리에르와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어비스의 창부. 그녀가 그런 칭호로 불리게 된 것은 모두 사랑을 위해 마음을 팔고 몸을 팔아서라도 고독을 지워내려고 한 부분에 있었다.
“당연히 원망하겠지.”
리에르는 힘없이 입가를 열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아르미안을 똑바로 직시하였다.
정신이상자와 정신이상자가 만난다.
정신이상자의 범위를 벗어나 버린 광기의 지배자를 잡기 위해서라면 똑같이 미쳐야만 했다.
지금 이 순간 리에르는 자신의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아르미안, 엘 둘 다 그에겐 원망스러운 존재였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들은 오히려 리에르 때문에 망가진 존재들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진실을 알고 난다면 그들의 원망이 리에르를 향할 것이 분명했다.
“그전에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말하렴.”
리에르는 아르미안의 애틋한 눈빛을 보면서 입술을 열어 보였다.
“엘 파실드를 찾아 줘.”
“뭐……?”
아르미안은 예상치 못한 리에르의 말에 움찔했다.
지금 리에르에게 있어 엘은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다.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에레사와 원수로 만든이였고, 뒤에서 음모를 조장하던 인물이었다.
지금 리에르가 그를 찾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원수와의 사생결단.
“지금 몸으론 무리하면 안 돼.”
아르미안이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리에르는 그녀의 말에 가벼운 조소를 흘려냈다.
“최대한 빨리 찾아.”
아르미안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가 지금의 리에르는 굉장히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성을 잃은 리에르가 아르미안을 향해 다짜고짜 공격하고, 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피의 복수를 맹세할 거로 생각했었다.
“그래, 일주일만 기다려주겠니.”
아르미안은 그렇게 말하며 방문을 나섰다.
엘의 행방을 찾는 것은 교단의 마력을 사용한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아르미안이 일부러 시간을 늘린 것은 리에르가 몸을 안정시키고 난 뒤에 알려줄 생각이었다.
“늦어. 이틀 안으로 찾아.”
리에르는 차가운 눈동자로 아르미안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눈동자는 보는 순간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지금의 리에르는 단순히 포스를 되찾았기 때문에 생긴 위압감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그에게 서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상으로 아리아에 대해 재미난 사실을 알려주지.”
“뭐……?”
아르미안은 예상치 못한 아리아의 이름이 나오자 경직되었다.
몸도 마음도 권력도 영광도 바쳤던 단 하나의 이름. 그 이름으로 인해서 아르미안은 모든 것을 잃게 되었었다.
“리엘, 네가 어떻게…….”
아르미안은 얼마 전에 리에르가 진명을 불렀던 걸 신경 쓰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리아와 자신의 관계를 너무나 잘 아는 거로 보였다.
아르미안은 그것에 대한 궁금증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리에르는 더 이상은 대화하지 않으려는 듯이 입을 다물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아르미안은 모든 궁금증을 밀어내고서 방 밖을 나섰다.
리에르는 혼자 방에 남게 되자 물병을 들어 올렸다.
모든 근육이 찢어진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컵에 물을 따르는 가벼운 행위마저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겨우 물을 따른 물컵을 들어 입가를 적시자 사막에 물을 끼얹은 듯 녹아 없어졌다.
미세한 수분이 입가를 채우자 갑자기 끊임없는 갈증이 목을 태웠다.
“그러니까 엄마. 나 맞선 같은 거 관심 없다니까?”
그때 문밖에서 어린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와 발걸음은 점점 리에르가 있는 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리에르는 굉장히 압도적인 기운을 느끼고는 눈가를 찌푸려 보였다.
“아, 엄마. 난 맞선 따위 보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고! 아직 여기저기 털 안 난 곳투성이거든?”
방문이 끼이익 열리기 시작한다.
“한 번 더 보채면 엄마 죽인다? 다 죽인다? 그러니까 인제 그만? 얼레…….”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긴 장발의 어린 소년이었다.
그는 피가 묻은 얼굴로 해맑게 웃으면서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이미 뒈져 버렸네. 데헷.”
테헤라자드. 세계의 주도자. 이 세계의 신인 그는 리에르가 누워 있는 침대를 향해 걸어왔다.
그러면서 그는 해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검둥아, 우리 검둥아!”
“테헤라자드냐…….”
리에르는 상대가 누군지 이미 알 수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위압감. 등 뒤로 보이는 수십 개의 날개는 세어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아릴 것 같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오랜만입니다. 라고 해야 할까?”
“지금의 나한테는 오랜만이란 인사가 맞겠군.”
리에르의 말에 테헤라자드는 귀 끝까지 찢어질 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검둥아, 검둥아. 완전 짱 재미나지? 응? 쩔지? 기분 완전 쩔지?”
테헤라자드는 신나서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방구석을 때구루루 구르기도, 벽을 타기도 하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자신과 같이 반응해 주지 않는 리에르를 보며 시큰둥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살아 있음을 느끼지 않아? 응?”
리에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소름이 돋을 만큼 살아 있음을 느꼈다.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로 모든 것을 만끽하고 느끼고 있었다.
이런 슬픔, 분노, 고통이란 것을 느끼고 싶어 미쳐야만 했던 때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그때가 되면 또 선택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그것을 광기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응, 응. 역시 배때기 잘 찢어졌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테헤라자드는 리에르의 상의를 걷어 올렸다. 옆구리 부분에 감긴 붕대가 핏기로 적셔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앞으로 얼마나 살게 될 것 같아?”
“모르지.”
리에르는 모든 상처 치료를 받았지만, 에레사에게 맞은 상처는 전혀 치유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혈액은 흘러나왔고 그때마다 찢어질 듯한 통증이 전달되었다.
저주의 단검에 찔린 덕분에 리에르는 피가 멈추지 않는 상처를 얻었다. 그리고 그 저주받은 아티팩트 덕분에 전생의 기억을 되찾게 되었다.
“원래 게임은 타임 리미터가 있어야지 재미있잖아. 그치?”
“그래, 맞는 말이야.”
분명 리에르는 테헤라자드와 대면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테헤라자드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검둥아, 흰둥이들이랑 빨갱이랑 손잡고 나 한 번 조져볼래?”
테헤라자드는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빛내면서 꽃받침을 해 보였다.
리에르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리 파워 밸런스는 맞춰야지. 그치? 검둥아 뭐 원하는 거 있으면 말만 해. 너희들 밸런스 얼마든지 조절해 줄게. 전략게임 해보듯이 화끈하게 해보자. 아, 근데 전략게임이란 건 과거에 E 스포츠의 흥행몰이를 한 장르 게임이야. 아 게임이란 건 말이야……. 아, 시X. 대충 알아들어, 짜증 나게 내가 그딴 거 하나하나 설명해야 해?”
테헤라자드는 갑자기 벽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이마가 깨질 줄 알았더니 오히려 벽이 깨져나가 구멍만 뚫리게 되었다.
집을 거의 부숴놓듯이 한 테헤라자드는 다시 점잖게 표정을 가다듬어 보였다.
“아니, 네가 직접 나설 필요 없어.”
“응? 그럼 시작하기도 전에 GG 치겠다는 거야?”
테헤라자드는 리에르의 말에 실망했다는 듯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는 자극적인 놀이를 즐기고 싶었는데 이렇듯 허망하게 끝나면 충격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겠다.”
“네가?”
테헤라자드는 리에르의 말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엘 파실드와 리즈 지센라이드들과 대전을 벌이지.”
“헤에? 왜에?”
테헤라자드는 리에르의 말에 싱글싱글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나서면 무슨 재미냐? 네가 아무리 스스로를 하향시켜도 개미와 코끼리 싸움이잖나.”
“그건 그래.”
테헤라자드는 강하게 긍정하면서 머리에 안전모를 착용하고 턱 끈을 매었다.
“엘과 리즈를 고립시킬 방법들은 이미 생각해 뒀다.”
“근데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을걸? 흰둥이 졸라 세. 지금 나한테 통제 걸려서 그럴 뿐.”
테헤라자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시멘트 반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너보다 강하진 않겠지.”
“크큭.”
리에르의 말에 테헤라자드는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자신이 부순 벽면에 벽돌을 깔고 시멘트 반죽을 작업하며 보수를 시작했다.
“그래, 대신에 내 수호신장을 데리고 가.”
“감사히 받지.”
리에르는 예상했다는 듯이 대답했다. 수호신장들은 테헤라자드의 친위대. 즉 네 명의 천사들을 의미했다.
이들의 힘은 하나하나가 포스와도 비견되는 강력함을 지니고 있었다.
“꿀잼 보여줘야 해. 검둥아?”
“기대해도 좋을 거다.”
리에르는 차가운 눈동자를 들어 테헤라자드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테헤라자드가 깊은 생각을 할 일은 없었다.
우선 그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해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