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84)
레필리아 레소드-285화(284/398)
레필리아 레소드 285화
로빈타의 횃불(3)
틱, 딸칵.
보랏빛 청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흐느적거렸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기를 준비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저택의 문을 지키는 경비원은 둘 다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아무리 신입 경비원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둘 다 신입을 배치하는 경우는 없었다.
신입은 말 그대로 저택의 사람들을 숙지해도 못 알아보는 경우가 존재했다.
즉 실수하면 안 되는데 실수가 나올 수 있었다.
또한, 문을 지키면 여러 가지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기에 문을 지키는 경비원은 사수와 부사수로 정해져 있는 게 일반적이었다.
또한, 청년의 아버지 피오렛 후작은 정원을 굉장히 아꼈다.
다른 건 몰라도 정원 관리는 수시로 확인했고, 집무가 한가할 때는 몸소 가위를 들기도 했다.
하여 정원 관리는 사람을 여러 명 두어 교대로 항상 볼 수 있도록 했다.
즉 정원에는 항상 사람이 한두 명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청년은 태연을 가장하면서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도련님 가방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응, 그래.”
청년은 옆에서 거드는 하인에게 가방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방 안에 있던 마총을 쥐었다.
하인은 갑자기 마총에 겨냥되자 흠칫 놀래 가방을 떨어뜨렸다.
마총은 굉장히 고가의 물품이었다.
그렇기에 총을 가진 자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사실 검이나 활은 살상력은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마총이 안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또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사용법이 매우 힘들다는 것이었다.
사용법이 어려우면 그만큼 많이 써보고, 많이 숙련시키면 된다.
하지만 그 비싼 탄환을 마구 써댈 정도로 돈이 남아도는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난 굉장히 게을러. 태생이 귀찮은 것을 싫어하지. 난 마탄환 가격이 비싸다는 것을 알고 있어. 마구잡이로 쏘고 싶진 않아. 하지만 그 탄환 값이 내 목숨보다 비싸다고 생각하진 않아.”
“아니, 저…….”
당황한 하인을 상대로 청년은 고개를 까딱거려 보였다.
“후작의 저택에 침입해 올 정도라면 보통 단체는 아니겠지. 교단이냐?”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하인은 당황스럽다는 듯이 뒷걸음질을 했다.
“하기야 교단이라면 광신도를 이용했겠지. 너희들이 순혈이냐?”
“도련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이제 저택의 다른 하인들도 소란을 듣고 서서히 나오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청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고로 일반 서민들은 마총을 보고도 이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몰라.”
“…….”
하인은 앓는 소리 하는 것을 멈추고 입을 닫았다.
청년의 말처럼 값비싼 물건인 리볼버형 마총을 일반인들이 알아볼 리가 없었다.
더 이상 연기할 필요가 없어진 하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년은 그들이 순혈의 기사들이라고 확신했다.
교단의 광신도들이었다면 이미 미션을 위해서라면 자폭 공격도 불사할 것이 분명했다.
청년은 일부러 순혈의 기사들을 도발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는 대략 이해가 갔다.
국가를 봉기시키려는 집단이라면 당연히 제정되었든, 군사가 되었든 지원이 필요하게 마련이었다.
“순혈의 기사단장 맥크웰이냐?”
“…….”
상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은 무기 하나 들고 있지 않았고, 품속에 감춰둔 무기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 하인으로 위장한 순혈 기사들이 여기저기 산개된 상태였다.
“아니면 순혈의 레이디 마리엔느냐.”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로드 샬렛.”
청년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년은 총구를 겨눈 상대가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돌려 버렸다.
실제로는 굉장히 바보 같은 행위나 다름없었다.
“흡.”
청년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흰 블라우스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레이스 치마를 입고 정갈하게 올린 눈부신 금발 머리카락은 누구라도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그녀를 보는 순간 말을 잊고 총을 내려 버리고 말았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예요. 순혈의 기사단, 마리엔느 폰 페를네아브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저택에 계신 분들은 다들 아무 일 없이 무사합니다.”
차근차근한 마리엔느의 말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자신의 심장이 무사하지 않음을 느꼈다.
피와 혈액을 펌프질하는 기관이 고장 난 것처럼 혼자 뛰기 시작했다.
마리엔느의 뒤에서 청년의 아버지인 피오렛 후작이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마리엔느의 옆을 바라보며 입을 열어 보였다.
“저 녀석을 설득시키면 우리 마탄기단은 당신의 소유가 되오.”
“네, 알고 있어요.”
마리엔느는 잊지 않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피오렛 후작은 처음부터 그들의 손을 잡아줄 수도 있었다.
막역지우였던 대공과의 관계를 보면 당연하였다.
하지만 이미 저택에 잠입한 그들의 그림자를 느꼈고, 거절하면 최악의 수를 쓰려 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괘씸한 생각이 들어 그 나름의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후작 그가 아는 자기 아들은 고집불통에 게으름뱅이라 귀찮은 일은 죽었다 깨도 안 하려고 들었다.
그는 마리엔느가 자기 아들을 설득시키는데 꽤 애먹을 것을 예상하고 고소해하고 있었다.
“로드 샬렛. 방금 후작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저 할게요, 할 수 있어요!”
보랏빛 청년, 샬렛의 말에 마리엔느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의심하게 되었다.
피오렛 후작은 입까지 네모나게 벌리면서 동공이 흔들렸다.
자기 아들이 저렇게 생기발랄한 얼굴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식이고, 아버지였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첫눈에 반하다.
“조건을 바꾸면 안 되겠소?”
“안 돼요.”
피오렛 후작은 놀려주려던 마음을 고쳐 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이 컸지만, 약속은 약속이었으니 별수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마리엔느만이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린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있었다.
로빈타 왕국의 샬렛 찬 크리네스.
마리엔느는 잠자고 있던 천재의 손을 끌어 잡았다.
이실렌 대공과 같은 기적의 밤을 재현했던 천재 전술가. 그와 마리엔느가 손을 잡음으로써 로빈타는 다시 횃불을 태우려 했다.
같은 시각 제국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대륙은 이제 제국의 시대는 갔다고 말했다.
전국시대로 나누어진 전황은 이제 오대 강국이란 이름으로 구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뒤집는 강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코스모스 교단.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많은 인재와 군대를 가진 무장 종료 집단이 오대 강국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교단의 칼날은 대륙 중심부에 자리 잡은 제국의 수도를 향하고 있었다.
더 따르는 이가 없는 제국은 이제 풍전등화와 같았다.
하지만 제국의 불꽃은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불꽃의 여제, 프레이야 비 미드니.”
노년의 남성이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전에 덥수룩하고 강건했던 철날 같은 수염은 기운이 없어 보였다.
모든 이에게 얼굴을 드러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후드를 깊게 덮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긴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황금빛과 붉은빛으로 수 놓인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도도해 보였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마흔을 넘겨도 탱탱한 피부와 소녀 같은 얼굴은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오랜만이구려, 강철의 대공 이실렌 폰 페를네아브.”
이실렌이라 불린 노년의 남성은 후드의 끝을 잡아서 넘겨 보였다.
손님으로 찾아왔는데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야 예의에 한창 어긋난 행동이었다.
이실렌의 얼굴은 상처로 인해 진물이 가득했다.
더군다나 파여 들어간 눈은 매우 심각한 상태로 보였다.
프레이야는 같은 대륙의 영웅으로서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대가 그런 모습을 한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으오.”
“다행이로군.”
이실렌은 허허 웃으면서 입가를 열었다. 원래 노쇠하긴 했지만, 이번 대패를 겪고 치명상을 입은 그는 굉장히 약화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는 프레이야를 향해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내 몰골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싸게 먹히는 셈이지.”
이실렌의 말에 프레이야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말 그대로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하는 강철. 그런 사나이가 누군가에게, 그것도 적대했던 세력에게 약한 소리를 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다.
“천하의 강철이 제게 부탁이라니, 흥미롭군요.”
프레이야는 현재 제국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장군이었다.
지금 제국은 갑자기 황제가 죽는 바람에 황위 계승을 놓고서 서로 대립을 하고 있었다.
제국 희대의 바람둥이라 불리는 앤 루드비히 오트리아와 학식이 높지만 유약한 렘 루드비히 오트리아. 이 두 사람의 황위 계승 덕분에 제국은 난장판이었다.
교단이 쳐들어올 낌새가 보이자 두 왕자는 제국군 출정 장군으로 프레이야를 지목하였다.
서로 간에 이의제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프레이야는 강철의 대공이 원하는 것을 대충 예상하였다.
첫 번째로는 로빈타 왕국을 지원해 주는 것. 어차피 교단과의 전투는 피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도 로빈타의 부활은 환영해야 될 일이었다.
두 번째로는 제국의 군병을 빌리는 것.
아무리 이실렌이 날고 기어도 혼자서 전쟁의 흐름을 만들 수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의 교단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집정관이 있었다.
세 번째로는 제국의 이름으로 교단에 대한 정벌을 전 대륙에게 명령하는 것이었다.
하나 제국은 힘을 잃었고, 그런 권리를 행사할 인물이 없었다.
이실렌의 부탁은 프레이야의 세 가지와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 친구를 제자로 삼아주게.”
이실렌의 뒤편에는 미이라처럼 전신을 붕대로 칭칭 감은 남성이 눕혀져 있었다.
진한 녹색의 염(念)으로 코팅되어 있는 인영을 보고 프레이야의 안색은 굳어지고 말았다.
“강철, 당신의 몸은 지금 정상이 아닌데 저런 강한 정령술을 사용해도 되는 건가요?”
“어차피 난 살 만큼 살았네. 지금은 이 위기를 이겨낼 인재들을 위해서 목숨을 쓰고 싶네.”
프레이야는 이실렌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것이 보였다.
항상 맑은 마력으로 꿈틀거리던 그의 눈동자는 이제 잿빛으로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프레이야가 모를 리 없었다.
“저자는 누구인데 강철이 이리하는가.”
“마지막 순백의 기사라네.”
피스 메이커.
죽음을 경험했던 사자는 오른손에 황금빛 나선이 감돌고 있었다.
“그에게 룬 위시의 진정한 사용법을 알려주게.”
이실렌 폰 페를네아브. 로빈타의 수호자인 그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실렌은 초췌한 모습과는 다르게 안광에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프레이야는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굳은 신념이 깃들어진 눈동자는 이채를 갖게 된다.
그런 눈빛을 보는 상대는 신의를 느끼게 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프레이야는 단순히 눈동자만 보고 수긍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내가 어찌하여 제자를 두어야 하는가?”
프레이야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검지로 꼬아 보였다.
도도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호기심 어린 소녀와도 같았다.
그녀의 생기발랄한 눈동자는 마치 대답이 궁금해서 보채는 듯 보였다.
“정령술이나 마법이라면 내가 제자로 거둘 테지. 내정, 외정, 혹은 군사나 지휘관이었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검술이라면 올라운드 웨펀인 그대를 따를 자가 없기 때문이지.”
프레이야는 겉으로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뛰어난 검술 실력을 자랑했다.
그녀는 무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모두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게 했다.
“못 본 사이에 치매라도 걸린 건가? 내가 어째서 저 사내의 스승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가?”
프레이야는 고개를 까딱까딱한다.
바지런히 움직이는 검지는 연신 붉은 머리카락을 꼬았다 풀기를 반복했다.
마치 지금 이 시각이 너무 지루하다는 제스처로도 보였다.
하지만 이실렌은 서두르지도, 조급해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