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86)
레필리아 레소드-287화(286/398)
레필리아 레소드 287화
겨울 전쟁(1)
늦은 밤을 나타내는 검은 암영의 밤.
어스름한 달빛을 가리는 먹물 진 구름을 짜내면 시커먼 빗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풀벌레들조차 잠들어 버린 깊은 밤.
대지를 흔드는 요란한 말굽 소리를 경계하듯 부엉 거리는 새소리.
그것을 뒤로하며 1천의 기병대가 질주하고 있었다.
일찍이 대륙의 용병왕 니드가 자랑하는 루카스의 경기병은 가장 선두에서 달리고 있던 인물이 손을 들어 올리자 일시에 멈추어 섰다.
칠흑의 밤에 염색된 듯한 흑발의 여성은 매혹적인 얼굴을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넘실거리자 여성은 불편함을 느꼈다.
잠시 멈춰선 여성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묶어 올렸다.
“적이 지나간 지 30여 분 정도 된 듯합니다.”
루카스의 무사 한 명이 바닥에 팬 말굽 자국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흑발의 여성은 보고를 받고 말의 안장에서 날듯이 뛰어내렸다.
탄력 있는 그녀의 움직임은 생김과 달리 동물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부드러운 손길로 대지 위에 남은 흔적들을 살폈다.
땅에 팬 발자국의 부드러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발자국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이대로 달린다면 수십 분 내로 루카스와 페리안은 따라잡을 수 있었다.
흑발의 여성은 고민을 시작했다. 뒤에서 쫓아오고 있을 군대를 기다릴지, 아니면 선공을 가할지.
분명 선제공격을 가하는 것이 전술적 이익이 분명하다.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 하여도 불의에 기습은 치명적인 피해를 만들었다.
흑발의 여성, 사샤 매그넘은 자신이 이끄는 경기병은 대륙 최강의 부대임을 자부할 수 있었다.
그녀는 비록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뛰어난 무관이었다.
그녀는 용병왕에게 전술을 배웠고, 뛰어난 전투력으로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전을 얻은 바 있었다.
제아무리 대륙에 알려진 신군의 빅스터라 해도 생각지 못한 기습일 수밖에 없었다.
빅스터가 모르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그것은 연합군이 서로의 이해득실을 위해 모인 임시 세력이란 것이었다.
실제 그의 생각이 맞긴 맞았다. 하지만 연합군에는 나스라는 천재가 존재했다.
아직 대륙에 빛을 발휘하지 못한 어린 천재의 존재를 빅스터가 알 리 없었다.
그리고 그 꼬마 천재는 빅스터의 생각을 예견하고, 기습을 감행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단 한 수로 인해서 페리안은 외통수에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북방의 패왕이라.’
사샤는 말로만 듣던 또래의 천재를 떠올렸다.
유트 페브리안.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무력과 지휘력으로 순식간에 세력을 형성한 행운의 왕자.
왕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유트는 매우 뛰어난 기사였다.
아무리 사샤가 루카스의 으뜸 무사라 해도 유트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 지지 않아.’
사샤는 몸에 갑주를 두르고, 검을 든 이상은 남녀의 구별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검을 든 순간부터 그녀는 전사였고, 패배는 죽음을 의미함을 알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기에 지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었기에 승리하고 싶었다.
사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야생마처럼 탄력 있는 몸매가 달빛에 반사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무사들을 돌아보며 날카로워진 눈동자를 열어 보였다.
“거리를 벌린 채 계속 적을 추격합니다.”
사샤의 명령과 함께 루카스의 경기병은 다시 페리안의 뒤를 쫓기 시작하였다.
현재의 병력으로 페리안을 잡을 수 없다면 연합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괴롭히는 것이 좋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밤은 피비린내를 풍기는 듯한 달빛에 반사되어 암운을 불러왔다.
사샤는 매혹적인 달빛과 전투를 앞둔 설렘으로 묘한 흥분감에 빠져 있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사샤는 나스의 보모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나스와 함께하는 평범한 삶도 나쁘지는 않았다.
어릴 적, 양친을 잃은 그녀로서는 나스가 가족이었다.
하지만 전사로서, 그리고 검의 달인으로서 그녀는 전투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시야 안으로 무언가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본 것은 착각이 아니라는 듯, 부관들이 곁으로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부하의 보고처럼 나무가 우거진 숲의 안으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야밤에 보이는 연기는 산불 같은 것이 아니었다.
사샤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손을 들어 경기병들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였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은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지만, 먼 거리도 아니었다.
사샤는 부하 중 한 명에게 턱 끝을 들어 보이며 입술을 열었다.
“확인해 주세요.”
“넵!”
그녀의 명을 받아 들은 경기병 둘이 말안장 아래로 내려왔다.
그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중갑 이음새를 틀어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적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샤는 잠시 휴식을 취하며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어차피 적과의 거리는 좁혀졌기에 전투를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숲의 한 가운데 솟아난 연기는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마치 여기에 자신들이 있다는 노골적인 신호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숲이 아닌 다른 곳으로 빠져나간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사샤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만 침착하게 상황을 관망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정찰을 갔던 무사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이 다소 묘해 보였다.
“페리안이 있나요?”
“네. 지금 숲에 주둔 중입니다.”
사샤는 그들의 보고에 다소 의아함을 느꼈다.
병력을 한쪽으로 집중한 덕분에 유트 쪽은 군세가 부족했다.
즉,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능력이 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적이 상황을 알아차리기 전에 최대한 멀리, 최대한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가롭게 주둔을 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지금 전원 무장 해제를 하고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정찰 무사도 어이가 없었는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의 말에 사샤는 사그라지지 않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숲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식사를 준비하느라 생성된 연기였다. 숲의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음식 냄새까지 풍겨오고 있었다.
사샤는 대륙 최고의 경기병을 은밀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적이 잘 들을 수 있도록 대놓고 추격전을 시작했다.
즉, 적군이 바보가 아닌 이상은 적의 존재를 알 수밖에 없었다.
사샤의 목적은 섬멸이 아닌 승리였다.
기습으로 적을 궤멸시키지 못할 바에는, 압박을 주어 흐름을 깨뜨리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적의 발을 붙잡으면 곧 본대가 도착할 거고, 승리는 마땅히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기습할까?’
사샤는 순간적인 유혹에 흔들렸다.
아직은 연합군이 유리한 카드를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지금까지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페리안의 재상, 리즈 지센라이드가 본대를 이끌고 진격 중이었다.
서로 대등한 군사력이라 해도 사기에 있어서 그렇지 않았다.
리즈의 대군과 맞닥뜨리면 연합군에게 남은 것은 대패뿐이었다.
연합군의 패배는 곧 나스의 위험을 초래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죽음, 혹은 포로가 될 수 있었다.
‘숲에 주둔한 이유는 매복을 위해서겠지.’
사샤는 유트 왕의 곁에 신군의 빅스터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천하 다섯 영웅 중 하나라고 불리는 신군이 아무 대책 없이 휴식을 취할 리 없었다.
사샤는 적이 매복을 준비했어도 돌파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기습할 것인지, 아니면 본 군을 기다릴 것인지 고민을 시작했다.
‘이럴 때 도련님이 계셨다면.’
사샤는 그의 존재가 그리워졌다.
항상 멍한 꼬마는 겉과는 달리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야를 갖고 있었다.
지금 같을 때 나스가 있었다면 사샤는 든든한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일단 적의 동태를 더 살피고 정하겠어요. 잠시 모든 부대는 휴식하세요.”
“네!”
결국, 사샤는 위험한 도박은 하지 않았다.
루카스의 경기병들은 잠시간의 달콤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사샤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말 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상태에서 연기가 피는 숲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찰병의 숫자를 더욱 늘리면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경계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시간으로 끝나는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유트를 놓치면 사기도, 전력도, 식량도 떨어지는 연합군은 참패.
하지만 적의 지원군이 오기 전에 왕을 잡으면 승리로 끝맺음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싱겁게 대승할 것으로 여겼다.
덕분에 긴장의 끈까지 풀렸던 연합군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남은 연합의 수장들은 긴장과 이완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현재 루카스 무사단장 사샤 매그넘 부대가 리핀 숲 인근에서 적과 대치중이라 합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기에 보고를 들은 지휘관들은 오오, 하는 탄성을 내지르며 기뻐하였다.
페리안은 겨우 5천의 군대밖에 없었고, 연합군은 자그마치 5만의 대군이었다.
서 연합군이 리즈가 이끄는 서 페리안 본대에 궤멸당하긴 했지만, 아직 동 연합군의 군세는 충분하였다.
단, 그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은 식량이었다.
식량 부대를 탈취당한 그들은 보급을 줄일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병사들의 불만은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빠른 속전속결이야말로 연합군이 원하던 바였으니 지휘관들이 기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스는 다소 멍한 시선으로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합군 총지휘관의 부관이자 손자인 헥타르에게 물었다.
“리핀 숲……? 그게 어디야?”
헥타르는 대번 눈살을 찌푸렸다. 곧 큰 전투가 벌어질 판국이다. 그런 상황에서 보모 역할을 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지도라도 대령할까?”
백전노장인 할아버지의 휘광 아래 자라온 명문가의 자제.
헥타르는 그 이력에 걸맞게 거만하고 고자세였다.
누구보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존재는 치켜 올라간 눈매를 게슴츠레하게 뜨면서 비아냥거림을 품었다.
탄탄대로를 달리는 헥타르로서는 보랏빛 머리의 꼬마가 영 시원찮게 느껴졌다.
전쟁은 어디까지나 말로 하는 것이 아닌 칼과 창으로 하는 것이었다.
단풍잎처럼 조그만 손을 내미는 것을 보고 헥타르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헥타르는 성질 같아선 꼬마를 확 집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존경하는 할아버지가 말하는 것을 거역할 수는 없다.
별수 없이 급조된 페리안의 지도를 넘겨 보였다.
나스는 던지듯이 지도를 건네는 헥타르에게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는 멍한 눈을 끔벅거리며 지도의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곧 적이 눈앞이다, 이대로 진군 속도를 올린다!”
총지휘관인 헬리온의 명령에 오오, 하는 연합군의 함성이 울렸다.
“아찌.”
헥타르는 나스가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인상을 구겨 보였다.
그는 전형적인 전사의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동안은 아니었지만, 아저씨라는 호칭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대였었다.
“유트 형아는 리핀 숲에 숨어 있어. 그러니 가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