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87)
레필리아 레소드-288화(287/398)
레필리아 레소드 288화
겨울 전쟁(2)
또다시 생뚱맞은 말을 시작하는 나스를 보면서 헥타르는 절로 짜증이 났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자 나스는 눈동자를 굴리며 대화 상대를 찾았다.
항상 사샤가 옆에 있었기에 나스는 불편함이 없었다.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닦아주기도 하였고, 잠들기 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줬다.
모든 사람은 나스를 지진아 취급했지만, 사샤만은 그렇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하든지 경청해 주었다.
나스의 천재성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이도 사샤였다.
나스는 이미 잠들 시간이 한참 넘은지라 피곤함이 물밀 듯이 올라왔다.
좋아하는 초콜릿도 자꾸만 감겨 가는 졸음 앞에서는 자연스레 찾지 않게 된다.
하지만 리핀 숲으로 진격했다가는 유트 왕을 놓치고, 패전하리란 것이 보이는 나스로서는 최대한 용기를 짜내야 했다.
자신을 무시하는 헥토르가 말의 고삐를 잡고서 달리는 것을 보면서 나스는 작달막한 손을 들어 올렸다.
“리핀 숲에 가면 안 돼.”
“아까부터 뭔 소릴 하는 거야, 넌?”
헥타르가 공격적인 어투로 답했다. 나스는 대답이라도 해주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유트 형아는 군세가 부족하기 때문에 피했어. 본대와 합류하려면 숲에 숨는 것은 무의미해. 그러니까 함정 있어.”
나스의 두서없는 말에 헥타르는 코웃음을 쳤다.
짜낸 용기가 불발로 끝나자 나스는 사샤를 떠올렸다.
그는 사샤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신중한 그녀의 성격이라면 손쉽게 적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어린 소년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그것은 불안함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평상시의 사샤라면 신중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실패로 끝날지도 모르는 원정길 때문에 무리를 할지도 몰랐다.
“사샤…….”
항상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녀가 없으니 너무도 불안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라면 페리안은 지금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만약 이번에도 당한다면 연합군은 되돌릴 수 없는 괴멸을 당하게 된다.
나스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샤는 잠시 적군의 상태를 지켜봤다.
페리안은 야영을 준비라도 하는 듯이 막사까지 건설하고 있었다.
그들의 행위는 명백한 자살 행위였다. 사샤는 머리가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초콜릿에 중독된 보랏빛 소년. 나스가 곁에 있었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연합군의 본대가 도착한다. 그것을 상대가 모를 리도 없는데 너무나 태평했다.
사샤는 왠지 모를 불안함이 몸을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사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탄력 있는 그녀의 육체가 대지 위에 닿자마자 적군이 주둔하는 숲으로 혼자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대장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무사들은 어, 어? 하는 반응들을 보이며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에 쫓기는 것은 우리야. 설마 페리안 쪽에서 노리고 있던 것은……!’
몸매를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가죽 바지. 그것을 스치고 지나가는 무성한 수풀의 잎사귀들.
이제 음식 냄새도 사그라진 숲의 안쪽.
사샤는 태도를 뽑아 들고서 뛰어들었다.
사샤의 반응이 너무나도 재빠른지라 부하들은 뒤늦게 반응했다.
사샤는 부하들을 기다리지 않고서 수풀을 혼자 해치고 나아갔다. 나뭇가지를 피하며 주둔지에 도착한 것은 예상대로의 광경이었다.
쐐엑, 쐐엑.
불어오는 풀벌레의 소리.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나무 잎사귀를 허공에 춤추게 하며 사샤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혀준다.
흑안의 눈동자 사이로 보이는 적의 주둔지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대로 주둔을 하려던 것으로 보이던 막사들은 간이 천으로 설치만 해두었을 뿐, 텅텅 비어 있었다.
막사의 중앙으로 있는 솥단지들과 아궁이들은 불이 붙은 채로 수북하게 남겨져 있었고, 이미 사람들은 없어진 지 한창은 되어 보였다.
기본적으로 생각해도 겨우 3천 남짓한 군대로 5만 이상의 군대와 싸울 리는 없다.
식사를 위해 만들어 놓은 아궁이는 아직도 타닥타닥 재를 날리고 있었다.
모닥불도 꺼뜨리지 않은 채 사라진 것을 보면 마음먹고 기만하려는 의도였다.
‘당했다.’
사샤의 고운 얼굴이 살포시 일그러진다.
사샤는 다급하게 부관을 통해 지도를 건네받으며 페리안의 도주 경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숲의 내부는 비교적 넓었다. 그렇다고 해도 추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서둘러서 적을 추격합니다!”
이제 곧 연합 본대가 도착할 터였다. 유트 페브리안의 군대는 시간이 촉박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오히려 강수를 보여주었다.
허장성세(虛張聲勢).
빅스터라는 유명한 전략가의 이름에 속아 대어를 놓쳤다.
신군이 아무런 대책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리 없었다.
전투에 익숙한 사샤마저 빅스터의 농간에 놀아나서 주저앉아만 있었다.
‘적에게 눈치채지 못하게 병력을 조금씩 빼서 후퇴한 건가.’
처음부터 그런 방식을 사용했다면 유트의 본대는 이미 한창 후퇴했을지도 몰랐다.
사샤는 겨우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서 경기병을 출동시켰다.
사샤의 부대는 곧바로 적의 흔적을 확인하고 그들이 빠져나간 숲의 통로를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숲이긴 하나 이미 만들어진 길을 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장, 뭔가 이상합니다.”
사샤는 자신의 부관이 옆으로 말을 달리며 하는 소릴 들었다.
그녀는 지금 눈앞의 대어를 놓칠 수도 있다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만들어진 길?’
사샤는 손을 들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경기병들은 전부 속도를 멈춰 서기 시작했다.
숲에서 인위적인 길이 생기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인간이 통행을 편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길이 넓은 이유는 간단했다.
통행하는 인원이 많기 때문이었다.
지금 사샤의 군대가 달리는 길은 산행을 하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길치곤 넓었다.
그녀의 부관도 그런 부분을 인지하고 입을 열었던 것이었다.
이미 준비된 길.
‘복병.’
그것에 머리가 미치자 사샤는 주변에서 들려와야 할 풀벌레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느꼈다.
숲이라면 마땅히 들려야 할 새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인위적인 정적을 느끼는 순간 뜨거운 불꽃이 쏘아져 내렸다.
화르르륵.
뜨거운 불길이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칠흑으로 둘러싸인 숲의 나무는 우수수 소리 내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더운 공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주변의 수풀에는 짚들이 숨겨져 있었다.
불꽃을 머금은 화살촉은 사방을 불태우고, 재로 만들었다.
쐐에엑.
사방에서 기괴한 파공음이 쏟아졌다.
진열은 흩어지고, 어지러워졌다.
갑작스러운 기습을 받자 사샤의 부대는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불꽃이 그려지기 시작한 숲을 빠져나갈 곳은 보이지 않았다.
“전원 빠르게 전진하세요! 뒤로 가면 오히려 휘말립니다!”
적의 기습을 맞아 살기 위해 후퇴한다 해도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사샤는 오히려 길을 신속하게 빠져나오기 위해 전진을 명령했다.
대장인 사샤가 정면으로 달리자 그 뒤를 따라 루카스의 군대가 뒤따랐다.
복병의 공격에 당할 때, 화살에 의한 죽음보단 우왕좌왕하는 아군에 의해 밟혀 죽는 일이 더욱 많았다.
살기 위해서는 오히려 전진해야만 할 때가 있다.
불 소나기를 피해 달려간 그들의 앞에는 새로운 장애물이 놓여 있었다.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길목을 막아서고 있었다.
더는 기마를 통해 이동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사샤는 위기를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과 사의 갈림길 속에서 단 하나의 판단으로 궤멸하는가, 생환하는가가 달려 있었다.
“전원 전투태세!”
결국, 사샤의 선택지는 힘으로 활로를 뚫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들의 강점은 빠른 기동력을 통한 과감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기동성이 막힌 현재, 자신들의 장기를 빼앗겼다. 지독한 열세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부관들은 전부 후미를 지휘하여 후퇴를 시작하세요. 적의 공세를 버티고 빠져나갑니다!”
사샤는 천천히 태도를 꺼내 들었다.
사방에서 점점 모여드는 적들의 기세는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나, 대장은……!”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부관은 상관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넓은 평지에서 기병 전투를 치렀을 때 이야기다.
“최대한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텨주겠어요. 부대가 포위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빠를수록 저도 안전하겠죠.”
사샤의 말에 부관들은 더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예를 취해 보였다. 그러고는 부대의 꼬리 쪽을 지휘하기 위해 이동했다.
사샤를 지키고 선 무사들은 곧 있을 전투를 예감하고 태도를 꺼냈다.
나무 그루터기 장벽들의 속에서 하나, 둘씩 페리안의 은기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도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함정들 덕분에 기마를 운용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백병전에 있어서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인물이 나왔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화려한 분홍색 갑주를 걸친 대머리 남성이 나서자 사방에서 창과 검을 쥔 페리안의 군대가 보였다.
“으아악!”
루카스의 무사들이 비명을 토해내었다.
양옆에서 수풀을 해치고 나오는 창날은 순식간에 적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샤는 앞에 선 페리안의 기사가 누구인지는 대략 알고 있었다.
“페리안에 괴물 같은 게이가 있다고 들었어요.”
“응? 실례야. 게이라니.”
사샤의 노골적인 말에 대머리의 남성은 심한 무례를 당한 것처럼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사방에서 난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페리안의 포위 섬멸전이 시작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사샤는 자신의 부관들에게 생사의 길을 걸도록 명령했다.
그 명령이 수용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곳에서 살아남아야만 가능했다.
‘빈틈이 전혀 없어.’
사샤는 눈앞에 있는 사내가 보통의 실력이 아님을 깨달았다.
겉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곰처럼 우람한 체구에서는 강력한 기운이 쏟아지고 있었다.
“잘 알아둬. 싸우는 소녀는 강하다고!”
테스타롯사 미드하이헬.
그는 육중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제자리에서 뛰쳐나가듯이 돌진해 왔다.
거대한 헬버드를 들은 그의 모습이 잔영만 뿌리며 돌격하는 것을 보고 사샤도 태도를 고쳐 잡았다.
챙!
철의 굉음이 숲에 울렸다. 날카로운 사샤의 검을 테스타롯사는 창대로 받아냈다.
“사랑스러운 유트 씨를 위해서 냉큼 죽어줘야겠어.”
“죄송하지만 저도 쉽게 당할 수 없거든요.”
사샤는 태도를 비껴 잡으며 창대를 타고서 검을 뻗어냈다.
테스타롯사는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헬버드를 뒤로 뺐다.
“아니, 당하게 될 거야.”
테스타롯사의 작은 중얼거림. 그와 동시에 뒤로 뺐던 헬버드가 잔영을 일으키며 대각선으로 파공을 그려냈다.
“사랑에 빠진 소녀는 강하거든!”
붕!
호쾌한 창격은 듣는 이로 하여금 오금을 저리게 만들 정도였다.
사샤는 큰 무기가 이렇게 빠르게 날아드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
헬버드를 마치 장검 다루듯이 하는 인물은 대륙에서 쉽게 보기 힘들었다.
사샤는 일단 회피하기로 했다. 그녀는 상반신을 낮춰 창격을 피하고서 반격했다.
핼버드는 대형 무기이기 때문에 파괴력이 강한 대신, 회수가 늦다. 사샤는 그 찰나의 틈을 노리고 태도를 뻗었다.
“흥!”
테스타롯사는 가볍게 사샤의 태도를 막아냈다.
그는 헬버드 자루 끝에 달린 가죽 끈을 돌려 무기의 곡선을 조절했다.
생각지도 못한 기교에 사샤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양손 무기를 자루 끝에 달린 가죽 끈만으로 조종하는 것은 보통 근력으로는 불가능했다.
‘기마 위라면 모를까, 평지에서는……!’
사샤는 기교와 무력을 동시에 지닌 괴물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