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88)
레필리아 레소드-289화(288/398)
레필리아 레소드 289화
겨울 전쟁(3)
“혹시 버티면 된다고 생각해?”
테스타롯사는 방실방실 웃으면서 사샤에게 말했다.
“빅스터 씨는 당신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어. 당신들이 복병을 의심하도록 유도했지. 어느 쪽으로 추격해 올지, 어떤 심리 상태로 올 것인지조차 전부 계산되어 있었어.”
“함정에 빠졌다고 해서 알몸으로 있을 수는 없어요. 혹시 알아요? 페리안이 자랑하는 최고의 무장을 잡고 위기를 벗어날지?”
사샤는 눈가를 가늘게 만들며 태도를 우방식(右方式)으로 잡았다.
아군 부대를 후퇴시키는 일은 부관이 잘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주변의 아군이 생을 잃고 사를 얻는 핏빛 혈투도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린다.
적어도 눈앞의 남자는 지휘관도 겸임해서 싸울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모든 전심전력을 기울여 태도에 날카로운 예기를 갖추어 갈고 닦아낸다.
그리고 단 하나의 순간을 포착하여 베어낸다.
사샤는 모든 집중력을 하나로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일단 첫 번째.”
테스타롯사는 헬버드를 세로로 들어 올렸다.
그가 자랑하는 마키나식 헬버드의 자세였다.
“페리안 최강은 내가 아냐. 내 남자는 나보다 강하다고.”
게이의 남자가 누구인지는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두 번째.”
폭발하는 듯한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빛의 잔영처럼 가로로 베어 들어오는 창격.
사샤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내지 않고 몸을 회전했다.
“난 져본 적이 없어.”
빛의 창에 닿는 것은 모조리 부서져서 파편이 되어 흩날렸다.
사샤는 감히 그것을 받아내지 못하고 뒤로, 뒤로 회피했다.
간간이 그녀의 날카로운 반격이 이어졌지만 테스타롯사에겐 어림없었다.
전투뿐만이 아니라 대결도 수세에 몰리자 사샤는 최악의 결말만을 떠올렸다.
죽음. 그리고 부대의 전멸.
사샤는 자신이 죽으면 아무도 나스를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용병왕의 아들들은 차기 권력을 위해 병권을 붙잡고 있었다.
아직 어리디어린 나스는 권력 단 한 톨도 쥐지 못한 채 형제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도 어린 동생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막내가 보여준 천재적인 재능은 형제들을 질투하게 했고, 경계하게 했다.
‘내가 죽으면…….’
사샤는 점점 손에 힘이 풀려가는 것을 느꼈다. 상대의 전투력이 너무 압도적이었다.
일찍이 이런 적은 만난 적도, 만날 일도 없었다.
전술 운용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꼬마 천재는 형제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병력을 전부 잃고 돌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막내아들에 대해 잠시 걸었던 기대를 접고,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 실망은 더 이상 막내아들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사샤의 눈동자에 힘이 돌아왔다.
콰과광!
세로로 내려친 헬버드가 대지를 부수고 돌 파편을 파생시켰다.
제자리에서 뛰어오른 사샤는 헬버드를 밟고 올라서서 검 끝을 가로로 내질렀다.
공기를 가로지르는 파공음. 예상치 못한 반격에도 테스타롯사는 얼굴을 뒤로 회피했다.
그 순간 눈앞에 시커먼 것이 나타났다.
퍽!
베어내기와 동시에 돌려찬 발차기가 테스타롯사의 안면을 타격했다.
상대에게 대미지가 들어간 것을 보고 사샤는 태도를 다시 한번 고쳐 잡았다.
땅에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대각선으로 베어버린 검의 곡선.
붉은 혈화를 피워 올렸다. 하지만 공격이 얇았다.
-미드하이헬 식(式) 마키나 기요틴(Guillotine).
위에서 아래로 내려 찍히는 단두. 살기를 느끼고 사샤는 뒤로 회피하였다.
으깨지는 나무와 흙먼지. 그 사이로 대머리 남성의 육중한 체격이 보였다.
아래에서 위로. 옆에서 옆으로. 대각선, 세로, 가로, 곡선.
다채로운 창광이 사방에서 번뜩였다. 사샤는 물러서거나 회피하는 데 급급해 반격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압도적인 공격력은 그녀의 체력을 계속해서 갉아먹었다.
사샤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흐트러지고 땀이 적셔져 오는 것을 느꼈다.
단 한 번이라도 눈꺼풀을 깜박이면 당할 것이 분명했다.
“적의 본 군이 도착했다!”
그때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사샤는 겨우겨우 태도를 붙들고 자세만 갖추고 있었다.
다음 일격을 회피할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테스타롯사는 지금 군을 이끄는 몸이었다. 전사가 지녀야 할 긍지는 결투를 계속할 것을 원하지만, 지휘관으로서는 후퇴를 선택해야 했다.
복병 기습은 어디까지나 적의 예기를 꺾기 위한 전술이었다.
“흥, 지지배. 운 좋았어.”
테스타롯사는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손을 들어 아군의 퇴각을 명령했다.
퇴각하는 페리안의 군대를 뒤쫓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루카스의 대장인 사샤도, 잔존 병력도 전부 죽거나 부상을 입어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더 이상 싸울 힘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샤는 적이 물러가자 부상자와 사망자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말에서 내린 그녀의 부대는 무력하게 당해 참패를 맞이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멸을 면했다는 점이었다.
복병에 당해 궤멸하다시피 한 루카스의 무사들은 상갓집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무사하십니까, 사샤 대장!”
사샤가 회피를 명령했던 부관 중의 하나였다.
그는 어느새 다시 돌아와 그녀를 부축하고 나섰다.
“후미는 지금 상황이 어떤가요?”
사샤는 자신이 명령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쪽도 마찬가지의 상황이었음이 분명했다.
“군의 허리 부분이 끊어져 적에게 유린당하기만 했습니다. 후미는 그저 일방적인 습격에 궤멸하고 있었고요.”
역시나 그녀의 걱정대로였다. 피해 상황을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참패를 당했다고 해서 주저앉아 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 본대에 원군이 왔다고 들었어요. 몇이나 도착한 거죠?”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었지만, 숲을 나가면 제대로 된 전투가 가능했다.
그렇다면 루카스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지금이라도 태세를 빨리 갖추고 추격한다면 유트의 군대를 칠 수 있었다.
“그게…….”
부관은 사샤의 질문에 말끝을 흐렸다.
사샤는 그의 반응을 보고 대충의 상황이 예상 갔다.
원군이 왔다는 말은 거짓일 것이다.
연합군의 숫자와 행군 속도를 생각했을 때 벌써 여기까지 도착했을 리 없었다.
그저 적군을 몰아내기 위한 위장 성세.
그렇다고 해서 천하의 빅스터가 거짓 외침에 속아 넘어갈 리는 없었다.
“원군은 100기의 기병뿐이었습니다.”
“네?”
사샤는 의외에 말을 듣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관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100기의 기병 덕분에 적이 물러간 것은 사실이었다.
본진에서 출정 온 그 기병 부대는 잡목들을 말꼬리에 달고 있었다. 무리해서 깃발을 여러 개 들고 있는 기수를 보니 언뜻 보면 대군으로 착각할 만했다.
사샤가 페리안과 교전을 치르기 전, 연합군에 있던 나스는 리핀 숲 전투가 함정임을 눈치챘다.
하나, 사샤의 부대에 그 말을 전달할 방법이 전무했다.
하여 선택한 것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100기의 기병이었다.
나스가 그들에게 명령한 것은 최대한 소란스럽게 진군할 것이었다.
페리안은 앞에서는 테스타롯사가, 뒤에서는 유트가 샌드위치처럼 에워싸서 섬멸전을 하고 있었다.
100기의 기병은 암울한 아군의 상황을 보고서 고민했다. 아무리 봐도 무모했다.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 있는 아군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나스의 작전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기적처럼 적군은 물러섰다.
빅스터는 본 군이 지금 도착할 리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적의 완벽한 섬멸은 좋다. 하나, 이미 상대를 궤멸시켰다. 굳이 소탕된 적을 전멸시키기 위해서 주군을 가지고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빅스터는 퇴각을 선택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나스도 빅스터가 군을 뺄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나스는 못내 지금의 한 수가 아쉽기만 했다.
빅스터라는 걸출한 영웅에 대해서 유일하게 우위를 취하고 있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쪽에도 전세를 읽는 전략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면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스에게 있어서 사샤의 목숨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일찍이 용병왕의 막내로 자라나 형제들에게 목숨의 위협까지 받으며 살아온 삶이었다.
그에게 있어 사샤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녀가 없다면 나스는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것이었다.
‘도련님…….’
사샤는 나스가 보낸 100기의 기병을 듣자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전과를 올려 공을 세워 나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대패로 인해 오히려 큰 책임을 지게 했으니 마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사샤는 패잔병을 이끌고 연합 본대에 합류하였다.
이미 연합군 내에서도 사샤의 대패 소식이 전해졌는지 분위기가 험악한 상태였다.
초췌한 사샤와 부대원들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이 전쟁에서 패배하게 만든 전범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눈빛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연합군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던 전투였다.
그 마지막 기회를 만들어 낸 것도 루카스였지만, 망친 것도 루카스였다.
사샤는 그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이제 가까이에 보이는 본진 막사를 보니 무거운 마음만 찾아 들었다.
“뭐라고?”
막사에 다가서자 젊은 사내의 고함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사샤의 기억 속에도 있는 목소리였다.
동 연합군의 연합장인 헬리온의 손자인 헥타르였다.
그는 갈테오에서는 유망 받는 실력자였지만 굉장히 다혈질이었고 성격이 급했다.
“조용히 하거라.”
점잖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화하기로 소문난 갈테오의 헬리온은 유일하게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유트를 뒤쫓던 추격군이 대패를 당했다는 사실은 보고를 받은 터였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의 전투가 무의미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것은 전쟁의 마무리를 결정짓기 위해서였다.
“더 이상은 저 꼬마의 꿈 꾸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제 현실을 떠올려 봅시다. 우리는 북방 야만인들에게 대패했습니다. 더 웃긴 것은 한 국가를 상대로 여러 나라가 옹기종기 모였어도 실패했다 이거죠. 지금 우리는 대륙에서 가장 우스운 사람들이 되어 있을 겁니다. 각자 왕국으로 돌아가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은 지금 앉은 자리에서 해임되면 다행일 겁니다. 지금쯤 우리의 왕이 저희를 위해서 단두대를 친히 닦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국왕의 바짓가랑이를 잡고서 살려달라고 구걸하는 연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저 꼬마의 우스꽝스러운 말 덕분에 그나마 살 수 있는 길도 버릴 생각입니까?”
“나 역시 같은 생각이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나 지금 서 연합군은 거의 박살이 난 상태지. 우리는 그나마 병력이 거의 온전한 상태이니 지금 돌아간다면 참수만은 면할지도 모르지.”
“그건 짧은 생각이오! 서 연합 쪽에선 동 연합이 멍청하게 병력 빠져나간 것도 모르고 2만도 안 되는 유트 군대를 놓쳤다고 패배의 전범 취급할 게 뻔하오. 어쩌면 이번에는 페리안이 아니라 서 연합과 전쟁을 치를지도 모르는 일이란 말이오!”
본부 막사 내에는 동 연합의 중심인물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로 보아 내용은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전쟁을 시작할 때도, 끝낼 때도 이유가 있어야 했고,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필요했다.
승전했다면 모를까, 패전했으니 당연히 분위기가 좋을 리는 없었다.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초콜릿을 오도독거리는 꼬마만 흐리멍덩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꼬마는 그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다시 한번 말했다.
“웰던을 쳐야 해.”
웰던. 페리안의 소도시인 이곳은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지금 식량도 거덜 난 판국에 거기까지 가자는 꼬마의 말은 누구도 들을 리 없었다.
“웰던으로 가면 유트 형아를 잡을 수 있어.”
꼬마는 안 좋은 분위기 속에서, 어른들의 위협적인 눈빛에도 불구하고 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이 보이는 꼬마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 돌아가면 자신을 가족처럼 여겨주는 사샤가 위험해지리란 것을.
그를 위해서라면 패왕을 잡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