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89)
레필리아 레소드-290화(289/398)
레필리아 레소드 290화
겨울 전쟁(4)
“야, 꼬마. 지금 하는 말 못 들었어?”
헥타르는 우락부락한 얼굴을 나스에게 들이밀었다.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정말 수틀리면 나스 같은 꼬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때려죽일 수도 있었다.
“꼬마가 아닙니다. 루카스의 지휘관으로 오셨다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사샤는 본부 막사에 들어와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냉랭한 목소리를 듣고서 그제야 사람들은 시선을 돌렸다.
헥타르는 그녀를 보고 놀라기는커녕 비아냥거림을 입가에 품어 보였다.
“이야, 유트에게 엉덩이 대주고 온 요조숙녀님께서 무슨 낯짝으로 얼굴을 들고 오셨나? 거의 일방적으로 강간당했다며?”
헥타르의 비아냥거림을 듣고도 사샤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이런 반응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무엇보다 대패를 당했으니 감수할 수밖에 없는 치욕이었다.
“닥치거라, 헥타르. 더 입을 놀리면 이곳에서 쫓아내겠다!”
점잖았던 헬리온이 노성을 지르자 헥타르는 잠시 주춤하였다.
그러고는 입술을 삐죽이며 한발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헥타르 님의 말처럼 대패한 몸, 그 어떤 치욕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사샤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참담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다른 이들은 그저 혀끝을 차 보이기만 했다.
여자가 군대를 이끌다니 잘못되었다.
어차피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와 같은 말들이 오갔다.
나스는 사샤가 온 것을 보고 얼굴을 밝히며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이내 안색을 굳혔다.
나스는 어린 소년이지만 어린 아기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녀의 품에 들어가 있고 싶어도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오도독.
나스는 애써 애꿎은 초콜릿을 세게 물어뜯었다.
“웰던을 쳐야 해.”
다시 시작된 나스의 말에 본부 막사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입을 삐죽거리며 힐난을 뱉으려 했다.
“이번에 실패하면 내 목 줄게.”
나스의 말에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경직되었다.
꼬마의 눈빛은 지금 흐리멍덩하지 않았다.
굉장히 맑았고, 분명했고, 확고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헬리온은 인자하게 타이르듯이 나스에게 말했다.
그는 나스가 굉장히 명석한 아이임을 알고 있었다.
지금 식량의 보급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적의 안쪽까지 들어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이미 유트 왕을 놓쳤고, 그의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무엇보다 연합군은 후퇴하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기가 오른 리즈의 서쪽 대군이 몰려들고 있었다.
“응, 초콜릿 다시 못 먹는 거 말해. 자고 일어나면 눈 안 떠져. 사샤가 양치도, 세수도 못 시켜주는 거 말해.”
생각만 해도 슬픈 일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스는 세상의 냉엄함을 알고 있었다.
“도박 같은 거 아냐. 유트 형아는 온화하지 않아. 하지만 타인에게서 자신이 보이는 것을 생각해.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을 냉정하게 선택해. 빅스터 아찌는 그 누구보다 강해. 근데 강한 게 약점이야. 모든 것을 자신이 알아야만 속이 시원해. 빅스터 아찌는 냉정한 자신과 열정적인 자신, 그리고 이성적인 자신들이 서로의 생각들을 피력해. 서로 다중의 인격들이 싸워. 그리고 최적의 답을 찾아. 그 강함이 유일한 약점이야. 도박 아냐. 전부 계산했어. 전부 예측됐어.”
누구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나마 헬리온은 나스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나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는 연합을 안전하게 철수시켜야 할 마지막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정말 유트를 붙잡아도 지금은 철수가 우선이다.”
헬리온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만에 하나라는 가정만으로 대군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들과 연결된 가족과 지인들. 많은 목숨과 슬픔을 짊어지는 것은 누구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오도독.
나스는 초콜릿을 마저 입안에 넣고 깨물며 헬리온을 바라봤다.
단호한 그의 표정을 보고 나스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애초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나스가 말한 이유는 지금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그럼 이제 연합은 끝난 거네.”
나스의 말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연합은 끝을 맞이했다. 그것도 최악의 형태로.
나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헬리온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할아버지 이제 안녕.”
헬리온은 물론이거니와 헥토르마저 아무 말도 못 했다.
아직 철없는 소년이기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러는지조차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본부 막사를 나서는 나스를 아무도 잡지 않았다.
그저 어린 꼬맹이가 나갔으니 이제 제대로 된 회의를 하겠다는 생각들뿐이었다.
어차피 나스가 있으나 없으나 그들이 해야 하는 이야기는 똑같았다.
그리고 결론마저 똑같았다. 사샤는 차가운 시선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돌아섰다.
등 뒤로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본부 막사를 나가는 조그만 등과 어깨. 나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사샤는 가슴 한 켠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루카스 내에선 입지가 좋지 못한 나스.
지진아 같아 보이지만 천재성을 엿본 용병왕은 부족한 막내아들을 위해 좋은 자리를 마련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씻을 수 없는 참패였다.
루카스에 돌아가면 자연스럽게 나스는 더욱 세력이 약화할 것이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라.’
나스는 애초에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였다.
그리고 형제들 간의 이권 다툼도, 정치적인 부분도 한없이 약한 소년이었다.
그렇기에 그저 낙향해서 한가롭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게 생각되었다.
“도련님, 죄송해요.”
사샤는 나스를 뒤에서 포옹했다. 조그만 몸은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고 여리기만 했다.
“아니야, 오히려 수월해졌어.”
나스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사샤는 나스의 영문 모를 말을 듣고 눈만 끔벅거렸다.
어차피 지금의 연합군은 식량 문제로 인해 진군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기에 나스는 최정예로 이루어진 소수의 기동력을 활용해서 전투할 생각이었다.
“우리 숫자는 몇 개나 있어?”
“죄송해요. 저 때문에 지금은 1만 3천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요.”
사샤는 잔뜩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면목 없어 하는 사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나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뭔가 셈을 마친 나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응, 엄청 충분해.”
“설마 정말로 페리안과 전쟁을 계속할 생각인 거예요?”
사샤는 나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전쟁에 큰 관심이 없던 나스였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전쟁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늦추려 하고 있었다.
사샤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스는 지금 매우 즐거운 상태였다.
병력을 잃고, 얻고 하는 것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머릿속에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테스트해 보고, 어떤 것이 성공하고 실패하는지가 궁금했다.
사샤는 항상 죽은 동태눈을 하고 있던 나스가 모처럼 생기 넘치는 것을 보고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사샤는 지금의 나스가 가진 눈빛이 루카스 용병왕 니드와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분의 자식이니만큼 두 사람이 닮는 것도 당연했을지 몰랐다.
“나 참. 왕께 혼나도 몰라요.”
사샤는 나스에게 핀잔을 주었다.
사샤는 나스를 오랫동안 봐와서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꺾이지 않는단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괜찮아.”
“초콜릿을 한동안 못 먹게 하실지도 몰라요.”
사샤의 말에 나스의 동공이 지진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을 끊는다는 것은 삶에 대한 활력소를 몽땅 빼앗긴단 것을 의미했다.
나스는 연신 끙끙거리는 신음을 내뱉으며 고민했다.
하지만 그래도 한 번 결심한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도 괜찮……진 않지만, 괜찮을 거야.”
사샤는 이렇게까지 나스가 확실하게 말을 하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웰던을 공격해서 어쩌시려고요, 도련님?”
사샤의 물음에 나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유트 형아가 올 수밖에 없게 만들 거야.”
“웰던을 치면 유트가 올 거라고요?”
“응.”
나스는 루카스의 간부 막사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막사의 침대 맡에 있는 과자 상자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안 오면요?”
사샤의 생각은 지극히 당연했다.
뻔히 적의 함정이란 것을 알면서도 오는 것은 바보에 불과했다.
대륙에 이름이 알려진 유트는 젊은 패왕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왕으로서의 리더쉽. 그리고 스스로 전면에 나서는 무력.
아울러 빅스터에게 전술로 한 방을 먹였을 정도로 뛰어난 지력.
그 무엇도 부족하지 않은 천재 중의 천재였다.
“올 수밖에 없어.”
나스는 계피향 나는 과자를 보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것은 한쪽에 밀어 넣고서 초콜릿으로 뭉쳐진 과자를 집어 들어 보였다.
“유트 형아는 타인의 시선에 굉장히 민감해. 아니, 누구나 시선에 민감해. 하지만 유트 형아는 완벽을 좋아해. 아무리 전쟁에서 이겼어도 도시 하나를 적에게 유린당하게 두면 인기가 떨어져. 그건 유트 형아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야.”
오도독.
달콤한 초콜릿이 혀끝을 맴돌자 나스는 행복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사샤는 손수건을 꺼내어 나스의 입 주변을 닦아주며 중얼거렸다.
“온다 쳐도 어떻게 잡을 건데요? 그쪽 사람들 하나같이 엄청나게 강하다고요.”
사샤는 바로 전에 상대했던 테스타롯사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생긴 것은 전형적인 근육 게이에 우스꽝스러운 핑크빛 차림이었지만 실력만큼은 강했다.
사샤도 그 정도로 강해질 수 있다면 똑같이 성을 버려도 좋을 정도라고 생각되었다.
“유트 형아는 완벽주의자야. 실패해 본 적도 없을 거고, 실패할 일도 없을 거야. 유트 형아의 눈을 속일 거고 귀를 속일 거야. 스스로 최고라고 생각할 거야. 자기 생각이 맞는다고 생각할 거야. 누구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거야.”
“도련님. 생각만큼 세상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아요.”
사샤는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리 나스가 머리가 좋아도 상대의 생각과 행동마저 전부 읽어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전쟁을 잘하기로 소문난 인물들이었고, 나스는 이제 처음 전쟁에 참여한 꼬맹이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전략의 신으로 추앙받는 빅스터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유트가 함정에 빠질 리는 없었다.
오도독.
나스는 오물거리며 초콜릿 과자 한 개를 말끔하게 입안에 밀어 넣었다.
이대로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가게 된다면 나스는 소중한 것을 잃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나스는 절대 바보가 아니었다. 사람의 심리를 읽고, 행동 패턴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나스는 어디까지나 권력 투쟁에서 방해물이자, 아무 세력도 없는 약자였다. 그리고 사샤는 루카스에서 매우 뛰어난 무사였다.
그런 그녀를 힘없는 꼬맹이 옆에 두게 할 리가 없었다.
사샤가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더욱 안 좋은 상황을 만들어 협박하고 제안할 것이 분명했다.
“응, 맞아.”
나스는 사샤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사자는 새끼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뜨린다.
용병왕의 가치관이었다.
그의 슬하에 자식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취했다.
그리고 나스의 친모는 그 희생양이 되어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평화는 힘과 능력이 있어야지만 지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