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9)
레필리아 레소드-29화(29/398)
레필리아 레소드 29화
리에르와 유트(4)
거구의 사내도 이곳까지 올라섰다면 보통의 실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엘빈과 함께 시합에 나서는 제이미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패기가 넘쳤다.
제이미는 검의 손잡이를 잡고서 발검 자세를 취했다.
“똑같군……. 파엘 형의 자세와.”
유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 유이와 리에르도 싸우던 것을 잠시 멈추고 시합장을 바라봤다.
거구의 사내는 괴성을 지르며 바스타드 소드를 들어 위에서 아래로 그어 내렸다.
마치 하찮은 바퀴벌레를 책으로 내려치는 듯한 공격법이었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스타드 소드는 땅을 내려찍는다. 그리고 제이미는 허리춤에 찬 검을 검집에서 꺼내지 않은 채로 손만 대고 옆으로 피해냈다.
“보통 검을 저렇게 땅으로 내려찍으면 손이 저려서 연속 공격은 어렵지……. 하지만.”
유트의 말은 예언이 되었다.
거구의 남성은 땅을 내려쳤던 검을 바닥에서 튕기며 옆으로 비껴들었다.
부웅!
제이미는 상대의 공격에 살짝 무릎을 구부리며 피해낸다. 하지만 여전히 손잡이를 잡은 검을 뽑지 않았다.
“뭐야, 검도 뽑을 줄 모르는 애송이신가?”
피하기만 하는 제이미를 보며 거구의 사내는 다시 바스타드 소드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며 달려들었다.
큰 덩치만큼이나 호쾌한 검격이 파공음을 일으킨다.
제이미는 이번에도 가볍게 공격을 회피했다.
하지만 관중은 절대로 피하는 쪽이 유리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단 한 번이라도 바스타드 소드를 막으면 제이미의 손목은 나뭇가지처럼 부러질 것 같았다.
거구의 사내가 지금껏 상대했던 사람들도 대다수 손목이 부러져 나갔다.
‘한 번만 막아봐라.’
거구는 호기롭게 검을 휘둘렀다.
검제의 제자니 뭐니해도 우스워 보였다.
자신의 기세에 밀려 검도 뽑지 못하는 머저리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하지만 거구가 착각한 것이 있었다.
“그 정도인 건가.”
제이미의 말에 거구가 흥분한 듯이 얼굴 근육을 구겼다.
“계집 같은 놈이 검 대신 혓바닥을 놀리는구나.”
“그래?”
다시 한번 거구의 사내가 횡으로 검을 크게 그었다. 피하든 피하지 못하든 다음 공격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제이미의 검이 거구에 옆구리를 내려친다.
거구의 사내는 크윽, 하는 신음을 흘리며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굽혔다.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다. 제이미와 거구는 덩치부터가 틀렸고, 불리한 싸움으로만 보였다.
“이 X끼…….”
“실력 차이 정도는 알아둬.”
거구의 사내는 옆구리를 움켜쥐더니 쓰러졌다.
단 한 합.
그것도 방어구 위에 맞은 거로 거구가 기절했다.
주심은 곧 제이미의 승리를 선언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일격 일참.
아버지와 형이 사용하는 아르빈트 가의 검술이었다.
자신은 사사받지 못한 검술.
사람들은 다음 시합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했다.
주심마저 제이미에게 의사를 물을 때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다.
“계속 제가 합니다.”
상대 팀은 이미 단 일격에 거구를 보낸 제이미의 위용에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힘겹게 올라온 만큼 그들 역시 포기하진 않았다.
엘빈이 나오기 전에 한 번만 이기면 된다. 그것은 상대 팀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번엔 바스타드 소드보다 조금 더 큰 대검을 든 사내가 올라왔다.
한 눈으로 봐도 선봉으로 나선 거구보다 실력이 웃돈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제이미의 단정한 얼굴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그녀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지기 시작한다.
‘아르빈트 아저씨의 검으로 단 한 합도 질 수 없지.’
두 번째 시합이 개시되었다. 상대 남성은 대검을 들고도 신중하게 움직였다.
제이미와의 거리를 재고, 간격을 맞춘다.
그 행동만으로도 상대는 보통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치를 깨뜨린 것은 상대 남성이 먼저였다.
사내는 빈틈을 본 건지, 아니면 빈틈을 만드는 것인지 긴 리치의 대검을 찌르고 들어왔다.
제이미는 상대의 매서운 공격을 최소의 간격으로 회피했다.
부웅, 부욱!
바람을 때려 부수는 듯한 굉음이 연거푸 울려 퍼졌다.
제이미는 위력적으로 공격해 오는 대검을 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허술하군.’
제이미는 그렇게 뇌까렸다. 하지만 관중들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가검이지만, 저렇게 큰 무기에 맞으면 뼈도 못 추릴 것 같다고 걱정했다.
타인에게 있어서 사내의 공격은 매섭게만 보였다.
하지만 제이미의 시선으로는 그저 힘으로 휘둘러대는 멍청이에 불과했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테냐!”
사내는 고함을 치면서 대각선으로 대검을 베어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제이미는 왼발을 축으로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뻐억!
공격을 피하는 반동과 함께 제이미는 가검을 뽑아 사내의 목덜미를 내려쳤다.
“컥!”
사내가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쓰러진 사내는 그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관중들은 신검의 제자에게 열광하기 시작했다.
유트와 티미의 결승전만큼이나 신검의 제자가 보여주는 무용은 그들에겐 기쁜 구경거리였다.
게다가 그들의 다음 상대가 바로 유력한 우승 후보 유트 로사리오다.
“리에르, 저 검은…….”
역시 유트는 제이미의 검술을 알아차리고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리에르의 굳어진 얼굴에서 후우, 한숨이 흘러나온다.
생각지도 못하게 아버지의 검술과 리에르가 시합하게 되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지, 필연이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대륙 최강의 검술을 가진 아르빈트 가문.
그 속에서 나고 자란 리에르는 검술에 재능이 없다고 멸시당하고, 조롱당했다.
리에르는 지고 싶지 않았다.
배우고 싶었지만 배울 수 없었던 아버지의 검술을 사용하는 타인에게.
제이미는 그대로 세 번째 선수까지 일격에 쓰러뜨린 후, 갈채를 받으며 퇴장하였다.
리에르와 유트는 생각지도 못한 상대방의 무용에 전의를 다지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의 시합은 티미와 에레사들의 팀이었다.
계속되는 올킬 쇼에 티미도 질 수 없다는 듯이 선봉으로 나섰다.
‘제발 져라. 그냥 떨어져 버려라.’
제이미들과 준결승을 해서 올라가게 된다면, 티미 팀과 최종 결승전을 붙어야 한다.
티미와 싸우는 것이 두렵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팀에는 에레사가 있었다.
리에르로서는 에레사와 함께하기 위해서 카이샤에 진학하려 했다.
낙제점인 그로서는 유일한 방법이 검술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로막는 것은 에레사 팀이었다.
운명의 장난도 이런 장난이 있을 수 없었다.
“예전보다 실력이 월등하게 늘었군.”
유트는 내심 감탄한 듯이 티미의 시합들을 지켜보며 한마디 하였다.
리에르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티미는 가뿐하게 올킬을 달성했다. 그러고는 환호하는 관객들을 향하여 오른팔을 들며 보답하였다.
에레사도 자신의 연인인 티미가 자랑스러운 듯이 손뼉을 치면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에르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마음 한 곳이 조여 오는 기분이 들었다.
에레사의 미소에 보답하듯 살짝 그녀를 포옹하는 티미의 모습은 이미 영락없는 커플이었다.
자신이 끼어들 여지는 그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후우…….”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의 어깨를 유트가 위로하듯이 두드려 주면서 속삭인다.
“에레사도, 찢겨 나가는 나약한 마음도 그 검으로 부숴 버리는 거다. 리엘.”
“알고 있어.”
리에르는 경기장을 나서는 에레사와 티미를 바라보면서 느꼈다. 이제 마음의 정리를 해야 하는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이미 너무나 완벽해 보이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자신은 절대 보여줄 수 없는.
리에르도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유트 남매는 첫 준결승전을 위해 정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리에르 자신에게는 그저 에레사의 호감을 위해 시작한 대회지만, 남매에겐 생계를 위한 수단이었다.
-수련의 성과를 보여줄 때야, 리에르. 지금의 너는 네 눈앞에 보이던 사람들에게 절대로 뒤처지지 않을 거야.
잠자코 있던 아르미안도 리에르를 응원해 주었다. 허언을 하지 않는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그저 격려를 위한 말은 아닐 터였다.
리에르는 그녀의 말마따나 이전과는 다르게 전신에 힘이 솟아나는 느낌이었다.
“선봉은 유이. 중견은 나, 그리고 후위는 네가 맡아.”
유트는 리에르가 얼마 전 올킬을 달성했을 때 이상해졌던 것을 신경 쓰고 있었다.
유트의 걱정과는 다르게 리에르는 태연했다.
일단은 자신을 위하여 시작된 팀이었지만 이미 목적은 사라졌다.
하지만 유트의 앞으로가 달린 이 대회의 상금을 위해서 이겨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신만을 위한 검술.
자신에게 허락된 재능. 그것을 이곳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각오를 다지며 리에르는 팔 보호대의 매듭 끈을 이빨과 왼손으로 잡아당겨 착용을 마무리 지었다.
리에르는 분명 며칠 전만 해도 많은 사람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긴장감으로 떨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유이는 선봉을 위해 검집을 손질하다가 리에르와 눈이 마주쳤다.
“발목은 잡지 말아주세요.”
리에르는 순간 발끈하는 것을 느꼈다.
새침한 표정으로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하는 유이.
그런 유이의 얼굴에 피니쉬 블로우를 먹이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아야 했다.
유이는 승부의 방향을 짚어주는 중요한 선봉 대결에 나선다.
리에르는 경기장에 올라가는 사람에게 괜한 삿대질을 하고 싶진 않았다.
관중들의 시선이 한껏 모인 경기장 위.
그곳을 향해 올라가야 하는 16세 소녀.
리에르는 유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새삼스러운 감정이 느껴졌다.
유이는 매번 자신과 투덕거리지만, 겉모습은 연약하고 체구도 작았다.
유이가 사용하는 가검은 기본적인 크기의 롱소드보다도 짧았다.
하지만 작달막한 유이에게는 바스타드 소드 크기로 느껴진다.
리에르는 유이의 모습에 마치 어린아이가 아빠의 신발을 신은 듯한 안쓰러움을 느꼈다.
“유이, 힘내라.”
“……?”
유이는 철천지원수 사이인 리에르가 진지한 얼굴로 응원을 하자, 잠시 멍한 얼굴을 지어 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유이는 입가에 피식, 비웃음을 흘리더니 코웃음을 쳐 보였다.
리에르는 16세 어린 소녀의 표정이 저렇게 음흉하고, 표독스럽고, 건방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네까짓 게 날 응원해? 누가 누구를 응원하는 거냐? 원숭이 주제에.
리에르는 유이의 얼굴만 보고도 지금 생각들이 전부 읽혀서 양손으로 귓가를 막았다. 저절로 찌푸려지는 미간.
“혹시……. 나 마법으로 상대의 마음마저 읽는 건가!”
-그건……. 그냥 네 착각이고…….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바보 같은 중얼거림을 들으며 쿡쿡, 웃어 보였다.
상대 팀에선 제이미가 아닌 엘빈이 경기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리에르란 녀석 나오면 바로 내려와!”
제이미가 표독스럽게 엘빈의 뒤에다 대고 소리를 쳤다.
“물론 그래야지요.”
엘빈은 그렇게 말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귀여운 꼬마 아가씨인걸…….”
“나는 왜 이렇게 짐승들이랑 마주하는지.”
유이는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도 않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지한 얼굴을 혼자 짓고 있던 원숭이나, 삐쩍 마른 구렁이까지.
제대로 된 남자는 유트밖에 없다고 혼자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엘빈은 롱소드를 천천히 뽑아 들면서 마른 입술을 열었다.
“귀여운 꼬마 아가씨 시합에 앞서 딴 생각하면 다친다고.”
“애들 시합에 아저씨가 나오면서 걱정해 주는 척하시네.”
유이의 말에 엘빈은 가슴 한편이 찔려왔다.
안 그래도 현 유격기사인 자신이 대회에 참가한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