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91)
레필리아 레소드-292화(291/398)
레필리아 레소드 292화
시스터(2)
에레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로 인해 무너지고 망가진 것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당신의 입장에서는 원망스럽겠죠. 하지만 제 입장으로서는 어쩔 수 없군요. 큰 것을 위해서는 작은 것을 희생해야 하니까요.”
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레사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도망쳐도 소용없다는 건 당신도 잘 알잖아요.”
잘못 들으면 다칠까 봐 걱정하는 듯 들려온다.
하지만 에레사는 그가 거짓된 가면을 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왜 그랬어요!”
“리에르가 전투 속에 살아가길 원했어요.”
리에르에게 있어 에레사는 단 하나의 세계였다.
“베이는 맛이 좋은 칼이 있는데 쓰지 않고 박아두면 아깝잖아요.”
엘이 다시 두 걸음 다가왔다.
에레사는 다시 뒷걸음질 치면서 엘과의 거리를 벌렸다.
잔인한 말을 하면서도 엘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저 온화한 웃음을 지을 뿐.
에레사는 촉촉하게 젖어 드는 눈동자에 힘을 주고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 때문에 리엘과 난……!”
에레사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일 년 전 그때. 에레사는 테헤라자드가 준 단검으로 리에르를 찔렀다.
리에르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눈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죽어가면서도 그 어떤 원망도, 원한도 내뱉지 않았다. 그 모습을 떠올리면 그저 마음만 아파 왔다.
따뜻했던 리에르의 핏물. 그것이 차갑게 마를 때까지 에레사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욱 고통스러웠을 리에르를 생각했다.
에레사는 죽음을 선택하려 했다.
사랑하는 남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 대가는 단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에레사는 죽지 못했다.
그녀는 리에르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리에르가 갑자기 교단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집정관이 되어 대륙을 피로 물들이는 마왕이 되었다. 이 모든 비극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에레사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녀는 그렇게 코스모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리에르를 이곳에서 만날 수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에레사는 단 한 번만이라도 리에르를 만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원망해도, 자신을 죽이려 해도, 혹은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해도.
그녀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리에르의 죽어가는 모습이 매일 밤 악몽으로 찾아왔다. 살아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이제 악몽에 시달릴 것 같지 않았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전 어디까지나 리에르가 숨지 않기를 소망했거든요. 하지만 당신은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사랑한다던 남자를 찔러 죽였죠.”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에레사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논리를 반박했다.
“당신은 당신의 야망만을 위해 모든 것을 장기 말처럼 사용하고 있지 않나요?”
에레사의 말에 엘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인간은 이기적입니다. 리에르는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고, 자신의 죄에서 도망치려 했습니다. 에레사 당신은 어떤가요? 사랑하던 남자가 원수가 된 기분이? 당신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그리고 자신을 믿고 있던 그를 배신했죠.”
에레사는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엘을 상대로 도망칠 수 있을 리 없다.
“아니, 말은 똑바로 해야겠죠. 당신은 사랑하는 부모 때문에 그를 죽였던 건가요? 정말 그랬던 건가요?”
엘의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지만, 입가에는 비아냥거림이 가득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죽여 버리는 여자라니. 당신이 그렇게 질투심이 강한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런 당신이 이기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나요? 정말로 이기적인 것은 누구입니까, 에레사 레이나드?”
“당신 따위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미쳐 버린 사람 따위는!”
에레사의 분노한 눈동자가 엘을 향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엘의 다정함에 기댔었다.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은 서로 적의로 가득하게 되었다.
아니, 엘에게 있어 에레사는 적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적은 단 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확실히 당신 말대로 우리 두 사람 다 꼴불견이군요.”
엘이 다시 한걸음 걸어왔다.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에레사는 엘을 상대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발톱을 치켜세웠다.
그녀의 손에는 보랏빛 기운이 흐르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설마 저를 찌르시려고요?”
“다가오지 마세요!”
에레사는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엘은 그녀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핏!
에레사가 들은 단검이 대각선으로 베어 들어갔다.
비록 한동안 쉬었다곤 하나 카이샤에서 수재로 불렸던 그녀였다.
엘은 가볍게 에레사의 공격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낚아챘다.
엘은 순식간에 단검을 빼앗아 자신의 손안에서 돌리며 미소를 그렸다.
“정말 휘두를 줄이야. 너무하잖아요.”
에레사는 무기를 뺏겼어도 엘을 노려보기만 했다.
어차피 자신의 힘으로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엘은 자신이 뺏은 테헤라자드의 단검을 훑어보았다.
손안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짙고 깊은 사악함이 묻어져 나왔다.
“꽤 아팠을 거예요. 이런 무기에 찔렸으니 말이죠.”
에레사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일부러 다시 말했다.
에레사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엘은 그녀가 듣던, 듣지 않던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테헤라자드의 단검. 일명 칼리프 리제는 상처 입힌 상대의 생기를 흡수하며 극심한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것은 죽음으로만 해제할 수 있죠.”
엘은 테헤라자드의 단검을 햇빛에 굴려 가며 반사광을 일으켰다.
엘은 누구보다 이 단검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단검에 치명타를 입은 엘은 저주로 인해 마력의 구멍이 생겨났다.
덕분에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없을뿐더러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한없이 찾아 들었다.
즉 정신적으로 지독한 고통과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리에르는 어떤 저주를 받았을 것 같나요?”
엘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에레사는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눈을 질끈 감아 내렸다.
“그는 아물지 않는 상처를 얻었습니다. 지금은 살아 있지만, 언젠간 몸의 혈액이 전부 소실되어 죽겠죠. 뭐 저처럼 정신적 고통을 얻는 것보다 육체적 고통이 나을 겁니다. 진통제라는 것이 효과가 있을 테니까요.”
에레사는 자신의 귀를 감싸 안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눈가에서 슬픔이 맺히기 시작했다.
엘은 에레사가 적의를 보이지 못할 정도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옅은 연민을 느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엘에 의해 생겨난 피해자 중의 하나였다.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웅크리고 앉은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엘은 빼앗았던 테헤라자드의 단검 날을 집고서 그녀에게 건넸다.
사실 엘은 에레사를 죽이려는 생각이 아직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엘은 오로지 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살았고, 오로지 신만을 증오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엘, 리에르, 아르미안이 동맹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때였다. 순간 엘은 강력한 압박감을 느꼈다.
탁!
에레사에게 다가가던 엘의 손은 무언가에 튕겨 나갔다.
엘은 욱신욱신한 자신의 손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테헤라자드의 단검은 이미 바닥에 미끄러져 멀찍이 나가떨어져 있었다.
쭈그려 앉은 에레사는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탓으로 죽어가는 리에르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수없이 많은 악몽을 꾸었다.
자신의 손에 의해 죽어가는 리에르는 항상 비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감히 사랑하는 그를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엘의 말이 맞았다. 에레사는 질투에 눈이 멀고, 감정의 혼란이 찾아 들었다.
테헤라자드의 단검. 그것이 무언가를 빼앗고 흡수하는 특성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핑계도, 변명도 댈 수 없었다.
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스르르 열어 보였다.
에레사의 등 뒤로 마력의 깃털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은 에레사를 감싸 안는 듯 보였다.
엘의 눈가가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포스?’
엘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포스 특유의 마력 깃털이었다.
하지만 에레사가 포스가 되었다고 말하기엔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지독한 이질감. 엘은 처음 들어서면서 무언가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고, 그저 잠시간의 착각이라고만 여겼다.
그 이질감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엘을 향해 압박을 펼쳐 보였다.
엘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그의 입가에 천천히 머무르는 미소는 평소의 온화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광기. 차갑고 조소를 섞은 그것이 미소를 흉내 냈다.
“축하합니다, 에레사.”
엘은 믿어지지 않았지만,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단 하나의 결론으로 말해야만 했다.
“임신 중이었군요.”
에레사는 임산부의 배와는 달랐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잘록한 허리.
그곳을 중심으로 푸른 마력이 자장을 일으키며 깃털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에레사는 처음 보는 엘의 차가운 눈동자를 보면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았다.
일 년 전 에레사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폐인처럼 지내왔다.
이제 눈물이 말라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을 때. 에레사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불쌍한 리에르를 찌른 단검. 그것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어 최후를 맞이하려 했다.
에레사는 입술을 꼭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아 내렸다.
그대로 손목을 찢기 위해 힘을 준 단검은 무언가에 막혀 움직이지 않았다.
푸른 자장은 단검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한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설마…….’
에레사는 자신의 안에서 살아 있는 생명을 느꼈다.
그 생명의 태동과 온기는 절망감에 빠져 있던 에레사에게 구원과도 같았다.
‘리엘…….’
에레사는 자신의 배를 끌어안으며 펑펑 울어 젖혔다.
이 세상이 전부 리에르를 원망하고 미워해도. 자신만은 오로지 그의 편이어야 했다.
그저 타인의 적의 가득한 이야기들을 핑계 삼아 그를 원망했다.
페이서스의 비극 이후로 오로지 그만 찾아 살았다.
그를 보고 싶어 했고, 그를 원했고, 그를 사랑했다.
에레사는 다시 만난 리에르를 보니 가슴이 뛰었다.
어릴 적의 모습이 남은 표정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성숙함이 느껴지는 남성미.
무엇보다 사랑했던 소년을 다시 재회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의 육감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같은 마음이었다.
에레사는 차라리 그것을 축복해 주고 싶었다.
물론 하기 쉽지 않았다.
마음을 고쳐 잡으면 고쳐 잡을수록 마음은 점점 더 무너지기만 했다.
에레사는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
온기가 사라지는 리에르의 몸. 허물어져 가는 그의 육체.
“미안해, 미안해…….”
죽어가면서 그 어떤 원망의 말도 하지 않은 리에르. 그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에레사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