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92)
레필리아 레소드-293화(292/398)
레필리아 레소드 293화
시스터(3)
얼마나 오열했을까. 에레사는 눈물을 훑으며 붉어진 코를 훌쩍거렸다.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에레사는 조금 전만 해도 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한참 울고 나니 허기짐만 찾아들었다.
에레사는 살아가기로 했다.
자신의 안에 살아 숨 쉬는 생명을 위해서라도, 다시 리에르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에레사는 일단 엘의 눈을 피하고자 길을 떠났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엘에게 거짓을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두뇌가 비상하고 눈치가 빠른 것 이외에도 그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엘은 어디에 있던 대륙의 온갖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의 그런 정보 수집 능력은 무서울 정도였다.
에레사는 그런 엘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고민했다.
‘코스모스.’
엘에게 있어 유일한 약점은 신에게 받은 저주뿐이었다.
그는 코스모스의 교리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포스를 행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에레사는 코스모스의 교리를 몸에 두르기로 결정했다.
코스모스에서의 생활은 괴롭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그곳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람 사는 곳이었다.
작은 것에 행복해하고, 큰 것을 나누는 삶은 나름 풍요로웠다.
이곳의 사람들에게 있어 법보다 앞서는 것은 교리였다. 자신과 다른 교리를 가진 이에 대해서는 살의마저 품었으니까.
에레사는 교단의 흑백논리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눈가를 찌푸렸다. 이곳은 도피처가 될 수 없었다.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특별한 기도회가 열리게 되었다.
새로운 집정관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코스모스 교단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에레사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리에르도 코스모스 교단에 들어와 있었다.
더더군다나 그는 교단의 고위직인 집정관이 되어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거머쥐고 있었다.
에레사는 리에르가 살아 있다는 소식에 너무나 기뻐했다.
그의 얼굴만 생각해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리엘…….’
에레사는 리에르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오해와 이기심 때문에 그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만날 용기는 없다. 하지만 만나고 싶다.
에레사는 교단에 계속 남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그를 찾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을 부정해도, 전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생긴 아이. 리에르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 이런 사실을 알면 그가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해졌다.
아이의 존재가 두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에레사는 리에르에게 족쇄가 되더라도, 그의 마음을 억지로 붙드는 일이라 해도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리에르에게 단 하나의 세계가 에레사였듯이, 에레사에게도 리에르는 단 하나의 세계였다.
그리고 에레사는 리에르를 만날 기회를 찾았다.
코스모스 집행관의 대승을 축하하는 대규모 집회가 곧 있을 예정이었고, 그날 에레사도 코스모스의 시스터로서 함께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에레사는 망설였던 마음을 다잡았다.
그에게 어떤 사과의 말을 해야 할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계속 가다듬고 가다듬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에레사는 엘 파실드를 만나게 되었다.
“리에르의 아이인가요?”
엘의 말에 에레사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분명 겉으로 보기엔 에레사는 임산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엘은 남들과는 다른 시야로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그것이 신의 축복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죠?”
엘의 입가가 비스듬하게 균열을 일으켰다.
그의 온화하고도 음산한 말에 에레사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였다.
단 한 번의 관계. 리에르와 처음이자 마지막 밤을 보냈던 그 날로 인해, 에레사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가 익숙하지 않았다.
자신의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 그것의 호흡이 느껴지고, 감정이 느껴졌다.
그것은 너무나 따뜻하고 은혜로워서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지탱시켰다.
그것은 대단히 신비로운 감정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에레사에게 극심한 우울증을 갖다 주었다.
평범하게 결혼하고, 평범하게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가정을 꾸렸다면 행복했을 터였다.
리에르는 곁에 있어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에레사는 그의 진심을 거절했다.
오히려 그를 함정에 빠뜨렸다. 사악한 기운을 극대화 시켜주는 테헤라자드의 단검으로 욕심의 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사랑하는 이의 차가운 죽음이었다.
에레사는 두려웠다. 누군가로 인해 미워하고, 누군가로 인해 사랑한다.
그가 살아 든 죽어 있든 다시는 마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리에르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아도, 그저 동정심에 불과할지라도 에레사의 안에 있는 것은 두 사람만의 결실이었다.
그것이 완성된 사랑이든, 어긋난 사랑이든.
“에레사, 당신은 이제 저를 믿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전 당신에게 하나의 진실을 알려드리죠.”
엘은 에레사의 안에 자리 잡은 날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것은 당신을 죽게 만들 겁니다.”
“당신은 정말 저질이에요, 엘 파실드!”
엘의 말에 에레사는 소리를 질렀다.
그를 믿었던 단 한조각의 마음마저도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에레사의 시점으로는 테헤라자드라는 존재보다 엘이 더 사악하게 느껴졌다.
“결국, 당신은 리에르로 인해 파멸하게 될 겁니다.”
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어 올렸다.
에레사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엘의 저주에 분노를 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엘의 처연한 눈빛이 이상했다.
에레사는 왠지 처음으로 엘의 진심을 느끼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리에르는 당신을 너무나 보고 싶어 하더군요. 당신이 건강한지 항상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리에르가…….”
엘은 정말로 마법사였다. 그의 말 한마디는 그 어떤 마법보다 강력했으니까.
에레사는 리에르를 상처 입힌 것을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 일로 인해 다시는 리에르를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되었다.
주루룩.
에레사의 뺨 위로 별빛을 담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긴 꼬리를 남기며 허공으로 떨어지는 유성우.
무너지기 시작한 에레사의 얼굴은 눈물로 가득했다.
에레사는 리에르라는 말 한마디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리에르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그의 숨소릴 듣고 싶었다.
다정했던 손길을 느끼고 싶었다.
장난스러운 눈빛, 슬픈 눈동자, 맑은 웃음.
그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보물이었다.
엘은 그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에레사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이제 엘의 정체를 깨닫고 있었다.
그렇기에 엘이 등장하고 나서 경계심을 가득 피워 올리고 있었다.
동물도 새끼를 갖게 되면 주변의 위험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지금의 에레사는 경계심이 날아가버린 상태였다.
‘사랑, 그것참 어리석은 감정이지요.’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다.
엘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에레사가 가진 아이는 조사나 분석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리에르의 아이가 확실했다.
태아인 아이가 본능적으로 마력의 날개를 펼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야기다.
후생가외(後生可畏].
재능은 이어지고 이어져서 더 강력한 재능으로 꽃피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으나 확률론에서 우세한 것은 사실이었다.
리에르와 에레사의 아이가 태어난다면 정말 말도 못 할 괴물이 탄생할 것이 분명했다.
예전에는 한 시대에 한 명의 포스만 등장했다. 하지만 지금은 벌써 네 명, 아니, 이제 다섯 명의 포스가 존재한다.
엘은 굉장히 무서운 사실을 깨닫고서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은 자신이 해온 전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일이 기다릴 수도 있었다.
‘에레사 당신은 출산하면서 자신의 아이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아나요?’
엘은 이세계인으로서 후천적인 재능에 의해 포스가 되었다.
포스는 사실 만능의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두 번째 포스인 리즈는 자신의 어머니를 알지 못했다.
리즈가 태어남과 동시에 죽었기 때문이었다.
네 번째 포스인 아일이 어릴 적부터 부랑자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가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친모가 죽었고, 친부에게 버림받았다.
세 번째 포스인 리에르는 예외적으로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륙 오제라 불릴지도 몰랐을 정도로 강한 마법사였다.
그런 여성이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마력을 잃고서 평범하게 되어 버린 것은 포스를 낳아서였다.
‘아이를 낳는 그 순간 당신은 죽습니다.’
엘은 에레사 속에서 기운을 감추는 어린 포스를 보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잔인할 정도로 인형에게 냉정했던 엘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들의 뒤틀린 삶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리에르와 동맹을 했으니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습니다.”
에레사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은 제가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현명한 여성이니 금방 깨닫게 될 겁니다.”
엘은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저는 정보수집이나 분석 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갑자기 왜 자랑을 하죠?”
에레사의 반응은 여전히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에레사는 엘의 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리에르의 안부가 궁금할 뿐이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엘이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말만 계속했다.
“당신의 배가 왜 부르지 않는 건지. 저는 알 것 같습니다.”
“네……?”
엘은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문밖을 걸어 나갔다.
“다음에 올 땐 카르샤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녀는 용족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좋아하거든요. 물론, 인간의 아이는 더욱 좋아하지요.”
“카르샤만 오는 것이 더 고마울 거란 생각은 안 하시나요?”
에레사의 말에 엘이 맑게 웃어 보였다.
엘은 자신에게 적대하는 인형은 누구도 살려두지 않았다.
잘못이 자신에게 있다 하여도.
어차피 에레사는 출산하게 된다면 자동으로 죽는다. 그리고 그녀가 리에르를 만날 수도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에레사가 아무리 용기를 내서 리에르를 보러 와도, 리에르가 피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죠, 리에르?’
에레사의 집을 떠나며 엘은 분자화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의문으로 남던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엘은 더 이상 에레사의 집에 머물렀다가는 리에르에게 공격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꼈다.
리에르와 생사 결판을 내는 것은 좋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내가 신이 되는 그날까지.’
엘은 이제 신을 죽이는 것 이상의 계획을 떠올리고 있었다.
에레사의 집에서 엘의 잔영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검은 인영은 붉은 눈동자를 열면서 차갑게 조소했다.
“그래, 날 이용하기 위해서는 아직 이빨을 드러내면 안 되겠지.”
에레사는 아직도 아름답고 청초했다.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밝았던 그녀의 모습이 약간의 피곤함을 담은 듯 우울해 보였다는 정도였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면 볼 수 있었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소리치면 분명히 대답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도 검은 인영은 엘이 사라지는 모습만 확인하고서 등을 돌렸다.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이제 얼마나 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검은 인영은 내일을 기도하고, 다음을 소망했다.
그럴 자격이 아직 남아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