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96)
레필리아 레소드-297화(296/398)
레필리아 레소드 297화
웰던 시가전(4)
헥타르는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남을 것을 짐작했다.
그의 입가에 거만한 웃음이 그리워졌다.
유트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완벽한 포위망이었다.
설령 포스라 할지라도 빠져나가는 것이 어려울 것 같은 두께였다.
유트는 패전이라는 낯선 단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눈을 감았다가 뜨면 모든 것이 꿈일 것만 같았다.
유트는 정말로 눈을 꾹 감았다가 떠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지독하리만큼 비릿한 피 냄새만큼 처절했다.
‘누구냐.’
유트는 자신을 사지로 몰아간 이가 누구일지 찾았다.
현재 군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헥타르였다.
하지만 유트의 눈에는 그가 이번 일의 주연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유트와 나스의 눈이 마주쳤다.
전쟁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달막한 보랏빛 소년.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초콜릿을 오독오독 깨물어 먹는 모습은 어딘가 모자라 보였다.
나스도 유트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수많은 적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위축되지 않는 모습.
그리고 전사로서도 강력한 무용을 보여주는 모습은 패왕이란 단어에 적합했다.
“헥타르 형아.”
“어?”
헥타르는 한참 신나 하다가 나스가 부르자 멈칫하였다.
나스는 그저 초콜릿에 중독된 망할 꼬맹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세를 뒤집는 지략을 펼쳐 보였다.
당장은 유트를 잡아서 좋았지만, 헥타르는 나스에 대해서 경계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이놈은 커서 유트보다 무서운 적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법이었다.
헥타르도 지금 급한 상황이 처리되자 모든 상황이 냉정한 시각에서 계산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지금 상황이라면 유트를 완벽하게 붙잡을 수 있었다.
아울러 언젠가는 강적이 될지도 모르는 나스를 손쉽게 제거할 수도 있었다.
“이제 퀸을 잡아야 해.”
“어?”
헥타르는 무서운 생각을 하다가 나스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작전 회의 때 들었던 이야기 중의 하나.
킹을 잡고 퀸을 잡는다.
킹을 잡으면 비기기도 힘든 상대를 손쉽게 묶어낼 수 있었다.
여기서 킹은 유트를 말했고, 퀸은 빅스터를 의미했다.
작전 회의 때 나왔던 말처럼 빅스터의 군대가 성의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상황은 페리안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샤의 기병들이 성으로 진입함과 동시에 헥타르의 병사들은 성을 걸어 잠갔다.
덕분에 기병의 속도에 뒤처져 있던 빅스터는 길목이 막혔고, 유트는 복병과 기병의 양동작전에 일망타진 되었다.
“제가 다녀올게요.”
사샤는 아직 말에서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테스타롯사에게 복수가 하고 싶었다.
전의 전투에서 사샤는 테스타롯사에게 밀리기만 하다가 큰 피해를 보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였다.
테스타롯사는 거의 전멸된 아군 병력에도 불구하고 유트를 구하기 위해 날뛰고 있었다.
그는 시뻘건 피칠을 한 채로 핼버드를 휘둘러댔는데 꼭 악귀와도 같아 보였다.
“게이라서 강한 것이 아니다. 강하기 때문에 게이인 것이다아아!”
사방으로 혈선을 그어대는 테스타롯사를 막을 수 있는 인물은 없어 보였다.
앞, 뒤, 양옆에서 칼과 창이 찌르고 들어왔다.
하지만 테스타롯사는 아주 간발의 차로 그것을 피하고 받아치는 형식으로 한 합에 네다섯 명을 토막 내어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서른 명 이상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헥타르는 눈썹을 찌푸렸다.
“생긴 건 우스워도 진짜 전사군.”
짜증을 잘 부리는 헥타르의 눈에도 테스타롯사의 전투는 경이롭게 보였다.
자신의 몸에 자잘한 생채기가 남는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붉은 헬버드로 혈선을 사방에 그어나가며 적을 무너뜨리고 돌진했다.
그 돌진의 앞에는 페리안의 왕, 유트 페브리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불을 향해 날아가는 불나방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죽음을 알아도 단 하나의 빛을 향해 달려가는 그 모습은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억울해하지 말아라. 이건 어디까지나 결투가 아닌 전쟁이니 말이야.”
헥타르는 손을 들어 궁수대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의 활시위가 천천히 당겨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헥타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던 유트는 제자리에서 껑충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이른 그의 모습을 보고 궁수대는 순간적으로 표적을 놓쳤다.
아무리 지쳐 있다고 해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유트는 비록 지금 이곳에서 제압당한다 해도 그대로 멈춰 있을 수 없었다.
손을 들고 가만히 있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항상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나서야 활로가 열렸었다.
헥타르의 명령이 없어도 병사들의 창끝이 유트를 향해 찌르고 들어갔다.
단, 유트의 목숨을 취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들의 공격은 날카롭지 않았다.
이번 전투는 어디까지나 유트 왕을 생포하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
지금 여기서 유트를 죽이게 된다면 리즈의 본대와 맞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전멸 당할 수밖에 없었다.
“으아악!”
다시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유트는 양손에 붙든 이도를 휘둘러 적의 목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대장도 아닌 왕이 전면에 나선다는 것은 표적이 되겠다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도 유트가 죽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를 보좌하는 정예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트는 자신의 턱밑까지 날아드는 창날을 피하고 쳐낸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베어내는 검 끝은 붉은 혈선을 허공에 수놓았다.
사방에서 인육의 기름으로 미끄러워졌다.
그 위를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유트의 모습은 붉은 학과도 같았다.
그것을 보고 헥타르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왕이란 것은 상징적인 의미였다.
그런데도 유트가 보여주는 무예는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지경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빅스터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성문을 뚫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샤의 정예 기병들이 그들을 가로막았고 실질적으론 무모한 진격에 불과했다.
제대로 진형을 갖출 수 없는 곳에서 기병과 보병이 싸운단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만을 연상시켰다.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이라 해도 절대적인 상성을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기지 못할 전투인 것을 알면서도 빅스터가 소모전을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냥 이대로 있다면 적에게 모든 주도권을 넘겨야만 했다.
그리고 빅스터가 아는 유트는 아무리 불가능해도 자신의 능력과 근성으로 해결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적들의 대군을 이쪽으로 시선을 돌려야지만 기사회생의 전략이 발휘될 수 있었다.
하지만 빅스터는 사샤라는 여성 무장의 능력치를 너무 낮게만 보았다.
분명 조금 전에 교전했을 때에는 빅스터가 압도적인 전술의 힘으로 사샤를 압박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기병과 보병이 전법 없이 부딪힌다면 결과는 명명백백(明明白白)했다.
빅스터는 천천히 입안에 말라붙은 빵을 밀어 넣었다.
중앙이 기병에게 돌파당하고 지휘부를 향해 돌진해 오는 적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빅스터는 이제 무방비로 적의 칼날에 닿을 상태였다.
아주 조그만 방심.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던 한 수였을지도 몰랐다.
안일한 마음이지만 적에게 실수가 나오길 바랐으나 그 또한 나오지 않았다.
점쟁이라 할지라도 100%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0.001%라는 확률이 존재해도 그것은 절대라는 단어가 되지 않는 법이었다.
10대 때부터 전쟁의 천재라는 실 루드비히 오트리아를 뒤따라서 전장을 누벼왔다.
직접 천재에게 재미 삼아 사사한 전술.
그것을 발전시켜 점점 큰 시점으로 전장을 내려다보는 능력을 얻은 빅스터는 불패의 신군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 덕분에 무력을 소유하지 않아도 그는 대륙 오제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실 루드비히 오트리아의 서거 이후 아크우드 가문을 받드는 나이브만 가문으로서 새로운 주인을 모셔야만 했다.
티미 아크우드. 능력보다 허영심만 높은 인물의 출셋길을 위한 레인에 불과했던 빅스터는 10대의 황금기에서 20대의 성숙기, 그리고 30대에서는 암흑기를 겪게 되었다.
이제 40대를 바라보는 그는 새로운 주군을 만나 새로운 황금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유트 페브리안이란 젊은 패왕의 승천. 그리고 그 날개가 되어 있는 빅스터 나이브만은 실 황제의 흑룡, 무패의 신군이란 호칭으로 다시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미약한 확률의 도박은 절대라는 단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래서 전장은 어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두렵고도 설레는 것이죠.”
빅스터는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주변에서 부관들의 피하라는 외침도 더 이상은 들리지 않았다.
핏빛을 짓밟으며 달려오는 준마들.
루카스 최고의 여무사로 칭송받는 사샤의 칼날이 소름 끼치는 섬광을 퍼뜨리고 있었다.
빅스터의 말대로 전장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유트는 포위당한 상태였지만 순식간에 적들의 진형 안으로 들어가 사정없이 사방의 모든 것을 난도질했다.
핏빛 안개가 사방에서 피워 올라 시야를 어지럽혔다.
주변에 아군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편하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그저 찔러내면 적이었고, 베어내도 적이었다.
진형 안에 들어온 소수의 적은 오히려 같은 아군 때문에 전투가 힘들었다.
활도 사용하지 못하고 오로지 힘과 힘의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앉은뱅이 패배 따윈 관심도 없다.’
유트는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힘으로서 위기를 분쇄한다.
유트의 눈동자는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진실이 펼쳐진다.
자신의 육체에 다가드는 검날이 슬로비디오처럼 느껴졌다.
“뭐, 뭐야 저거……!”
이론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오히려 밀어붙이는 사람을 인간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분홍 갑주를 걸친 테스타롯사라는 게이는 아직도 죽지 않고서 헬버드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의 괴물 같은 무력 덕분에 쓰러져 있던 페리안의 기사들도 하나, 둘씩 정비를 하며 일어서고 있었다.
자신들의 왕이 보여주는 무용을 보고 피가 끓지 않는 전사가 없었다.
‘전략도 전술도 파훼시키는 단 하나의 조건.’
나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현재 상황을 보고 눈만 끔벅거렸다.
유트가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무용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된 상황인지, 그리고 앞으로의 결론이 어찌 날 것인지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이론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기에 아무런 답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유트가 강하고, 병사들이 다시 불꽃을 태워도 절대적인 조건은 여전했다. 아직 연합군의 군사는 많았고, 수적 차이는 명백하기만 했다.
비록 빅스터의 군대가 성문 안을 비집고 들어왔지만, 루카스의 기병대를 정면에서 이길 수는 없다.
유일하게 희망을 걸 수 있을 만한 빅스터도 적의 칼날 안에 있었다.
사샤는 빅스터의 존재를 발견하고 쭉 돌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빅스터를 지금 제거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습니다.”
빅스터는 비록 이번 전투에서 패해도, 그대로 페리안이 끝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 죽어선 안 되는데요.”
쿵!
하늘에서 무언가가 둔탁하게 떨어져 내렸다.
붉은 섬광과도 같은 것은 천천히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붉고 긴 머리카락은 로브 자락과 함께 전장의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사샤는 자신의 검이 붉은 핏물에 막히는 것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떠 보였다.
“아직 당신을 부려 먹…… 아니, 해줘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붉은 머리의 미청년. 리즈 지센라이드는 흰 이를 드러내며 손을 뻗어냈다.
그의 손안에서 붉은 핏물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리즈는 자신의 손안에 만들어진 언월도를 양손으로 붙잡으며 부드럽게 미소를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