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297)
레필리아 레소드-298화(297/398)
레필리아 레소드 298화
웰던 시가전(5)
“늦었군요.”
“미안합니다.”
빅스터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토해냈다.
“베리타스에게 먼저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쪽은 더 무서운 사람이 있거든요.”
“더 무서운 사람요?”
빅스터는 리즈의 말에 의아함이 찾아왔다.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절박한 상황을 단신의 힘으로 뒤바꿀 수 있는 존재란 하나뿐이다.
‘백의의 마도사, 엘 파실드.’
그렇다면 빅스터도 안심이었다.
“자, 연합군 여러분. 이제 집에 가셔야 할 시간이에요.”
사샤를 비롯한 다른 기병들도 리즈를 향해 검과 창을 찔러 들어왔다.
리즈는 가볍게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언월도를 우에서 좌로 가로질렀다.
붉은 선혈이 사방에서 꽃피우며 곡선이 그려졌다.
“엄마한테 집에 일찍 안 들어오면 죽을 거란 소리 못 들어보셨나요?”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휘두르는 붉은 언월도는 섬광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그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사지가 잘려 나갔다.
갑자기 나타난 괴물을 보고 루카스는 혼란스러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가로막는 존재가 누구인지 깨닫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리즈는 오른손에는 언월도를 쥐고서 왼손으론 붉은 채찍을 감아쥐고서 사방으로 적군을 찢어버렸다.
“학살자 리즈!”
그제야 루카스는 눈앞에 나타난 괴물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사샤는 지금 리즈가 보여주는 무력을 보고 당황했던 상태였다.
하지만 상대의 정체를 알고서 전신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리즈 지센라이드라는 포스, 마법사 아니었어?’
결국, 리즈가 마법을 사용한다면 대량 학살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지금은 도망치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은 굉장히 우습게 돌변해 버렸다.
기병 부대가 보병 부대를 중앙 돌파하며 병력을 갈아버리는 형태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병 부대가 뚫린 틈이 메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점에선 붉은 남성이 시뻘건 언월도를 흔들면서 적 기병 진형을 맨몸으로 돌파해 내고 있었다.
기병의 돌파력이 막히자 역공을 당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저 달리지 못하는 말 위에서 머뭇거리는 사이 사방에서 창이 찌르고 들어왔다.
결국, 사샤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회군을 명령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있어봤자 얻는 것은 전멸이라는 이름뿐이었다.
살기 위해 날뛰는 기병대를 보면서도 리즈는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언월도로 사람과 말을 똑같이 베어 넘긴다.
핏물이 안개처럼 사방에 피어올랐다.
말아 쥔 채찍이 사람의 목을 감아 찢어냈다.
목뼈가 훤히 드러난 인간은 그대로 비틀거리다 피 보라를 일으키며 낙마했다.
무기를 들은 채로도 리즈는 마법의 룬어를 중얼거렸다.
그의 등 뒤로 연신 붉은 룬의 문양들이 그려지며 사방으로 불꽃을 포격해냈다.
빅스터나 나스 같은 전략가의 관점에서 리즈 같은 일개의 무력은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디까지나 작전은 인간이라는 척도에 맞춰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리즈 같은 괴물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나왔으니 사샤가 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리즈 님.”
붉은 채찍이 혈흔의 꽃을 피워 올리자 황홀했다.
언월도로 가로지르자 주변에 있던 것들이 전부 혈액을 쏟아내며 나자빠진다. 하늘로 솟구치는 혈화가 폭죽처럼 아름다웠다.
하늘에서 뿌려지는 온기를 품은 혈액은 응고되지 않아 기분 좋았다.
잘려 나간 신장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액체를 뿜어낸다.
핏기 어린 기름기를 잔뜩 머금은 직장이 허공을 춤추듯이 돌면서 어깨 위로 떨어져 내린다.
“리즈 님!”
뜨거운 혈액에서 전달되는 비릿한 냄새.
몸 안에 도는 피가 펌프질하듯이 뜨겁고 빠르게 전신을 달리고 있었다.
뜨거운 열이 몸 곳곳에 전달된다.
미열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고 묘한 쾌감과 황홀감을 불러일으켰다.
몽롱한 정신 상태에서 리즈는 귀 끝까지 찢어질 듯이 웃어 보였다.
리즈는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시야가 정지된 듯이 느리게만 보였다.
주변에서 아우성 거리는 소리가 웅웅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위험합니다!”
아름다운 폭죽을 보고 싶었다.
서걱.
목이 뽑혀 나가자 핏물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당신은 명백한 괴물입니다. 인간처럼 느껴졌나요?
누군가가 말했다.
리즈는 초승달처럼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명백한 괴물이기에 명백히 괴물로서 살아간다.
지독한 목마름을 참아 낸 지도 오래되었었다.
이성을 잃기 일쑤였고 몇 번이나 꿈에서도 인간을 학살하는 꿈을 꾸었다.
리즈는 부드러운 은발의 남매를 떠올렸다.
그들의 눈동자가 오로지 자신만을 향했다.
부모를 잃고 누군가에게 기대 본 적 없는 두 사람은 붉은 남자에게 이유 모를 신뢰감을 느꼈다.
그 부담감이 그다지 싫진 않았다.
인간이 아닌데 인간으로 대해주는 그들의 눈동자가 기뻤다.
-사자가 생을 취해 삶을 잇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자연의 섭리.
머더러가 살육으로 갈증을 해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식물인간처럼 누워만 있는 데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답은 아니오였다.
그것은 살아 있되 살아 있는 체하는 것에 불과했다.
물론 깨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난제의 답은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질문의 답은 명백히 존재했다.
포스로서 각성된 자아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무슨 승려도 아니고. 욕구불만의 배출은 해야 하지 않겠어? 그동안 잘 해왔잖아?
붉은 혈화가 눈가를 어지럽혔다.
어느 날의 꿈에선 유트 남매의 머리를 뽑아 들고 웃는 자신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더없이 행복하게 느껴졌었다.
깨어나서는 씁쓸함만이 입안에 감돌았다.
묘한 흥분이 마약처럼 혈액을 타고 흘렀다.
한동안은 잘 참아왔고, 이제 목마름은 제어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리즈는 전쟁에서 대규모 마법으로 적을 학살했다.
관문의 위에서 절대적인 죽음을 선사하자 사방에서 예쁜 빨간 꽃들이 피어났다.
그 광경에 리즈는 황홀감이 느껴졌다.
서쪽 전투가 끝난 뒤 유트를 지원하러 오면서도 연신 그때의 그 광경만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것을 억지로 짓누르고 참아내면 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화가 솟아올랐다.
리즈는 두려웠다.
갑자기 찾아오는 갈증은 머릿속의 미열처럼 끊임없이 고요하고 집요하게 괴롭히고 상기시켰다.
“리즈 님,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 당신의 제자는 아직도 위험하단 말입니다!”
병사들이 물러서는 게 보였다.
이미 말을 탄 기병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주변에는 꽃을 피워 올릴 수 있는 소재들이 많았다.
리즈는 천천히 어깨에 언월도를 얹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빅스터를 비롯한 병사들은 지금 진짜 공포를 느끼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그나마 용기가 있는 자만이 뒷걸음질하면서 떨어댔다.
리즈는 천천히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초승달처럼 변질된 눈빛. 귀 끝까지 찢어질 듯이 웃는 기괴한 붉은 미소.
핏빛으로 샤워를 한 리즈의 모습을 보고 아군은 공포로 젖어 들었다.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것을 보고 빅스터는 자신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저는…… 피곤하니…… 먼저 왕에게…….”
그때 리즈가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입에서 신음처럼 음성을 내뱉었다.
빅스터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쥐어짠 목소리였다.
리즈는 이제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짓지 않고 있었다.
정말로 그의 안색은 파리해진 상태에서 괴롭게 보였다.
빅스터는 어차피 리즈가 움직이긴 힘들 것으로 보여 아직 움직일 수 있는 병사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리즈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있었다.
마치 붉은 마귀처럼 사방에 칼날을 덧씌우는 리즈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이 저리게 만들었다.
리즈가 언월도를 버리자 그것은 순식간에 붉은 재로 화해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리즈는 아직도 극심한 목마름에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몸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리즈는 빅스터의 형체가 마치 기괴한 검은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다만 그가 빅스터라는 것을 알 방법은 귀에 익은 목소리뿐이었다.
“하하…….”
리즈는 천천히 웃음을 머금었다.
입술이 찢어져 핏물이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어쩌면 잘 해낼지도 모른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리즈는 주변에 모든 것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은 것을 기억해냈다. 그 광기와 쾌락은 언제든지 다시 푹 빠지게 해줄 수 있다는 듯이 손짓을 한다.
결국, 리즈는 그것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도 이 빌어먹을 몸뚱이로 할 수 있는 건 남아 있습니다.”
리즈는 차갑게 조소하며 중얼거렸다. 과정과 결과가 어찌 되었든 리즈의 등장으로 빅스터는 목숨을 건졌다.
리즈가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자괴감에 빠져 있을 무렵 빅스터는 피투성이인 유트 왕을 안전하게 보호했다.
말도 안 되는 무위로 적을 혼란하게 만든 유트의 활약 덕분에 페리안 군대는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즈와 빅스터 군대에 패퇴한 사샤의 기병대를 보고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트를 손쉽게 생포하거나 죽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많은 수의 병사들이 부상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덤벼들고 있었다.
결국, 연합은 그대로 회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즉 이제 북에서 벌어진 연합군과 페리안의 겨울 전쟁은 끝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페리안은 순식간에 엄청난 명성을 올리며 유능한 인재들을 휘하에 끌어모았다.
무엇보다 이제 페리안은 반 코스모스 연합의 중심 국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칠흑의 마왕은 페리안의 승리 소식을 듣고서 차갑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처음부터 페리안이 무너질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렌 왕국의 십일검 기사단도 네버 에이지의 군대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것과 발맞춰서 리에르에 의해 무너졌던 왕국들은 하나, 둘씩 봉기를 하고 있었다.
리에르는 그 왕국들을 교단의 식민지로 삼기 위해 장로들을 투입하고 운영하게 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거센 봉기는 상황을 반전시키고 있었다.
리에르의 다음 목표는 제국이었다.
리에르는 교단의 대군을 이끌고 이듬해 제국의 수도로 향해 출정을 시작했다.
그 순간 또 한 사람도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꽤 자주 가봤던 여행길. 금발의 아름다운 여성은 건조 식량을 담고 여러 겹의 천과 잘 말린 약초를 담은 주머니를 넣었다.
또한, 갑자기 온도가 떨어질 것을 대비해서 모포도 빠짐없이 챙겼다.
교단에서는 이번에 전쟁 지원을 할 사람을 뽑고 있었다. 아무리 신의 곁으로 가기 위한 성전이라곤 하나 목숨을 함부로 버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의술을 아는 이들, 혹은 식사나 기타 전투 외적인 일들을 도와줄 지원자를 뽑고 있었다. 물론 그 보수도 좋았고, 교단 내에서 여러 가지 혜택도 얻을 수 있었다.
금발의 여성도 이 지원부대에 참가했다. 그동안 참가할 기회는 많았지만, 번번이 기회를 날려 버렸었다.
그동안은 한 조각의 용기도 생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맑은 눈동자를 한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기다려, 리엘.’
에레사는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가 망가진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조금이나마 그를 위해 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