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
레필리아 레소드-3화(3/398)
레필리아 레소드 3화
재회(3)
‘어떻게 나 말고 다른 놈을!’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녀와 자신은 단순한 소꿉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소꿉친구라는 권리만으로 그녀를 속박할 권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에레사는 언제나 자신 이외의 남자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오랜 소꿉친구라서 남자로 보이질 않았는지 아니면 나이가 두 살 연하라는 이유로 남자로 보이질 않았는지.
에레사는 항시 다른 남자들에게 시선을 주고 또한 그것을 자신에게 상담까지 했었다.
그럴 때마다 리에르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는데 둔한 에레사는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한다.
맨 처음 에레사가 사랑에 빠졌던 것은 7년 전이었다.
하필이면 그 상대는 리에르의 친형 파에트 아르빈트였다.
모친 라일라를 닮은 검푸른 머리카락. 조각같이 잘 깎여진 잘생긴 얼굴과 부드럽고 온화한 성품.
파에트는 뭇 여성들의 가슴을 흔드는 이상형이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파에트와 리에르는 한집에 살았었다.
하지만 파에트는 아버지 로이스타를 따라 십일검 기사단에 들어갔다.
일반 기사도 아닌, 제국 최고의 기사단에 입단한 파에트는 그야말로 엄청난 인기를 구사했다.
천재 기사. 페이서스의 젊은 혜성.
마을 여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것도 모자라 동성에게까지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형.
리에르는 형의 존재가 자랑스럽기도, 질투 나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형 때문에 연애편지 배달부가 되기도 했었다.
그래도 형을 좋아한다는 여성들이 싫지 않았다.
‘그놈의 아르빈트의 핏줄.’
항상 누군가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는 아르빈트의 이름이지만, 자신에게는 더없이 무거웠다.
‘하기야 검술도 못하는 나 같은 놈이.’
리에르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호흡하며 눈을 떴다.
주변의 모든 것이 잿빛이 되어 있었다.
마치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세상은 오로지 리에르에게만 보이는 환경이었다.
리에르는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팟!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좌에서 우로, 편 손바닥을 움직인다. 작은 불꽃이 그에 따라 허공을 유영하듯 움직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술.’
리에르는 작은 불꽃을 딱밤이라도 때리듯이 쳤다.
불꽃이 앞으로 뻗어져 나가서 벽에 부딪혀서 산화했다.
리에르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보였다.
사물에 깃들어진 색깔이 보인다.
어떤 것은 붉었고, 어떤 것은 푸르렀다. 가지각색의 색을 가진 것들은 서로 뒤엉켜서 있다.
가끔은 어떤 물체에 작은 요정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날아다녔다.
리에르는 그것들이 보였고, 그것들도 리에르를 보았다.
언제서부터인가 그것들은 리에르에게 인사를 건넸다.
‘말해봤자 미친놈이란 소리를 듣겠지만.’
리에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문에서 똑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리에르는 눈을 여미었다가 떴다.
잿빛으로 물들었던 세상이 자기 색깔을 되찾았다.
“리엘, 나야.”
리에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뭐야, 유트냐?”
“누구이길 바란 거냐?”
유트는 방에 들어오면서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뭐야, 아까 봐놓고 왜 또 온 거야? 남자에게 인기 좋기는 싫단 말이다.”
“안타깝게도 넌 남자에게도 인기는 없어.”
유트의 말에 리에르가 윽, 하는 신음을 냈다.
“왜 왔냐?”
“아까 이야기하다 말았잖아.”
“무슨 이야기?”
리에르는 유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이샤에 진학하고 싶다면서? 방법이 없는 건 아니어서 말해주러 온 거야.”
“뭐? 그런 방법이 있다면 진작 말해줘야 할 거 아냐!”
생각지도 못한 유트의 말에 리에르는 눈을 반짝이며 기대했다.
하지만 이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아니다, 됐다.”
“왜? 불가능한 것을 제시할 것 같아서 그래?”
“갈 필요가 없어졌거든.”
이미 에레사를 빼앗겼다.
이제는 카이샤에 진학해야 할 이유도, 목표도 잃어버렸다.
유트는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리에르가 처져 있는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카이샤에 가기 싫어진 거야?”
“관심 없어졌어.”
“설마 에레사가 애인이라도 생겼냐?”
유트의 말에 리에르가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알았냐는 분위기네?”
“뭐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리에르의 말에 유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알고 있던 건 아니고. 에레사가 그동안 애인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그래, 그거야 그렇지.”
“티미 선배랑 요새 친해 보이기도 했고 말이야.”
“티미?”
유트의 말에 리에르가 의문을 표했다.
유트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검술 대회 나가달라고 말하려고 했어.”
“아까 네가 말했잖아.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이젠 의미 없다니까?”
“그냥 그렇게 포기할 거냐?”
유트의 말에 리에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카이샤 진학 목표가 사라져서 대회 참가하기 싫다면, 내 부탁 좀 들어줘라.”
“뭔데.”
“대회 좀 나가줘.”
“나 놀리냐?”
리에르는 유트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나랑 같이 나가줘.”
“너랑 뭘 어떻게 나가자고?”
“이번 대회부터 개인전에서 팀전으로 바뀌었거든.”
“그게 뭔 소리야?”
리에르의 질문에 유트는 편지를 보여주었다.
“몇 명이 하는 건데?”
“세 명이서 한 팀이 되어야 해.”
유트의 말에 리에르는 침음성을 흘렸다.
“또 한 명은 누구로 할 거야?”
유트는 미리 생각해 둔 대로 즉답했다.
“유이.”
유이 로사리오.
유트의 여동생으로서 리에르보다 두 살 연하인 16살 여자애였다.
부드러운 성격의 유트와는 다르게, 유이는 굉장히 표독스러웠다.
“끄응.”
“왜?”
리에르는 난색을 보였다.
유이와 같이 함께하는 것은 싫었다.
무표정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녀석인지는 모르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다.
‘그 녀석은 나를 무지무지 싫어해.’
물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걔 아직 꼬맹이잖아. 검술이 가능하긴 해?”
“응. 너보다 잘하더라.”
리에르는 대번에 할 말이 사라졌다.
하기야 유트와 같은 핏줄이니 못할 리가 없었다.
‘같은 피를 가졌어도 재능 없는 건 나한테만 한정된 이야기군.’
리에르는 다시금 열등감이 밀려들어 왔다.
하지만 유트가 악의적으로 한 말이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할래?”
“글쎄, 생각해 봐야지.”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게.”
유트가 그렇게 입을 열었다.
리에르는 미간을 찌푸리며 유트를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잘생긴 얼굴이었다.
이 녀석은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댈 곳 하나 없는 녀석이었다.
은색의 머리카락 때문에 저주받은 아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했던 것이 얼마 전의 이야기였다.
‘즉, 진짜 마음을 터놓을 친구는 이 몸밖에 없겠지.’
사실 에레사가 물 건너갔으니 마음도 좋지 않고, 만사가 귀찮았다.
하지만 유트를 돕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혹시 알아? 대회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에레사의 마음이 달라질지.”
“응?”
“왜 그런 거 있잖아. 얘한테 이런 모습이 있었나? 혹은 얘가 이렇게 멋있었나와 같은.”
“너 은근히 악취미다.”
“굳이 에레사에게만 한정되지 말라는 거야. 다른 여자애들도 얼마든지 있잖아.”
유트의 말에 리에르가 피식 웃었다.
“그건 그래.”
“우리 유이는 어때?”
“내 라이벌 소개하는 거라면 환영한다. 하지만 다른 의미가 아니길 바란다.”
“왜 그래? 은근히 유이도 인기 좋다?”
“네가 아는 인기와 내가 아는 인기의 의미가 다를 것 같다만.”
리에르의 말에 유트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맑은 목소리로 웃는 유트의 음성이 기분 좋게 들려왔다.
“별수 없군.”
리에르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참가할게.”
“정말?”
“그래. 네가 나 아니면 누구랑 팀을 만들겠냐.”
“하하, 그건 그래.”
유트는 그렇게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리에르도 히죽, 웃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비록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가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 해도.
-쓸모없다.
리에르는 예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아르빈트 가문의 검술을 익힐 필요가 없다.
차가운 눈동자.
대륙 최강의 기사이자, 최고의 구원자라 불리는 아버지.
-너는.
차가운 눈동자가 자신에게 향한다.
가장 인정받고 싶은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그때.
아직도 가시가 되어 가슴에 박혀 있었다.
“내일 쉬는 날이니까, 바로 연습 들어가자. 괜찮지?”
“그래.”
리에르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미소를 흉내 냈다.
유트가 가고 리에르는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당했다.
그동안 좋아했던 소꿉친구에게도 필요 없는 인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트는 같이 팀을 해달라고 부탁해 온다.
매년 챔프를 하고, 인기도 좋은 유트가 팀원을 못 구해서 여기까지 올 리가 없다.
그저 리에르와 같이 나가고 싶으므로 찾아온 것에 불과하다.
적어도 유트에게는 필요한 사람. 그것을 생각하자 리에르는 심경이 복잡했다.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리에르는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기로 하고 침대에 누웠다. 눕기만 하면 바로 잠드는 유형이라, 뒤척이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아직도 침 흘리며 자는구나. 예나 지금이나 애라니까.”
많이 들어 본 듯한 익숙한 목소리였다.
리에르는 잠결에 눈을 떴다. 환한 빛이 눈을 아리게 만들었다.
“으음.”
리에르는 손을 들어 눈가를 가려 빛을 차광했다.
“일어나, 잠꾸러기야!”
금발 머리카락의 소녀가 핀잔을 주는 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버티기 위해 리에르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귓가로 창문 커튼이 젖혀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리에르는 밀려오는 잠과 짜증을 뒤로하며 부스스 일어났다.
그의 시야에 금발 머리카락의 소녀가 미소를 머금는 것이 보였다.
“참 칠칠치 못해.”
에레사는 자신의 소지품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지저분한 리에르의 얼굴을 닦으며 콧등을 찡그렸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나 알아?”
“몇 시인데?”
“점심때가 다 됐거든?”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
리에르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너……. 남자 방에 여자 혼자 들어오다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리에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에레사는 쯧쯧 혀를 찼다.
“침이나 질질 흘리고 자는 꼬마치곤 위협적이지 못하네. 얼른 나와! 유트와 유이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에레사의 핀잔을 듣고 리에르는 입가를 손으로 훑으면서 일어났다.
“걔들이 아침부터 왜?”
리에르는 의문을 품었다.
“훈련하기로 했다며.”
“훈련? 무슨 훈련?”
리에르는 그렇게 말하다가 아, 하고 어제 일을 떠올렸다.
“검술 대회 같이 나가기로 했다며?”
“어? 응 뭐. 나 아니면 유트 녀석이 나가질 못한다니까.”
리에르는 훗, 하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에레사는 다시 혀를 차 보였다.
“설마 그러겠니? 유트가 손만 뻗으면 감사합니다. 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랑 같이 가고 싶으니까 그러겠지.”
그녀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실제 유트가 원한다면 랭커인 학생들이 팀을 이루자고 난리일 거다.
“유트 녀석은 내 숨겨진 재능을 잘 아는 녀석이니까.”
“그래, 그래. 어쨌든 나가보는 건 좋아.”
에레사는 그렇게 말하며 리에르의 이불을 깔끔하게 갰다.
“그동안 노력 많이 했잖아.”
에레사의 말에 리에르가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그녀는 손을 뻗어 리에르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손등을 뒤집었다.
리에르의 손에 딱딱한 굳은살이 잡혀 있다. 수차례 찢어지고, 다시 상처가 달라붙고를 반복한 자국이었다.
“소꿉친구를 뭐로 보는 거야. 매일 훈련은 하고 있잖아.”
“천재는 훈련 안 하거든?”
“파엘 오빠 훈련 게을리한 적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