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02)
레필리아 레소드-303화(302/398)
레필리아 레소드 303화
패도[覇道](5)
무엇보다 다른 강국의 입장에서 제국을 도와야 하는 뚜렷한 명분과 이유가 없었다.
그 제국이란 틀과 이름에 반감을 품은 세력들이 많았다.
오대 강국이란 존재들은 제국을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을 돕고 나서 권력을 차지하려는 멍청한 형제 싸움을 지켜봐야만 했다.
즉 지금의 제국이 망하기를 원하는 것은 교단뿐만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천하의 이실렌이 모를 리 없었다.
제국에 대해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움직이고 있는 프레이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레이야는 제국의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까지 검을 들기로 약속했었다.
그리고 그 맹약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
이실렌은 코스모스를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기 위해선 제국이 무너져야만 했다.
어차피 무너질 제국임을 알아도 이실렌이 프레이야를 돕는 것은 나중의 일을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의료 지원대는 전부 성벽 진료소로!”
“물자 운반은 아직인가!”
“내일 오전에 또다시 출정이 이어진다!”
“사망자와 부상자를 각 부대장은 파악해서 보고한다!”
간헐적으로 벌어지는 제국과 교단의 전투 속에서 무의미한 사상자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금발 머리의 아름다운 여성은 흰옷을 입고 구급 지원을 하고 있었다. 팔이 잘려 나가고 창자가 삐져나온 이들이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여성은 자신에게도 통증이 그대로 전달되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금발의 여성, 아니, 에레사는 자신의 소꿉친구인 리에르 아르빈트를 만나기 위해 전쟁터의 한복판까지 왔다.
‘리에르…….’
에레사는 죽음으로 뒤덮인 막사 안에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죽어가는 이들을 볼 때마다 일 년 전 리에르가 차갑게 식어가는 광경이 보였다.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었다.
에레사는 리에르가 살아 있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비난하더라도, 그가 자신을 외면하더라도.
그런 에레사의 결단력이 있어도 그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에레사는 어디까지나 교단의 말단 시스터였다.
교단이 말하는 특별한 신앙심이나 힘 따위는 없었다.
그런 이가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대한 교단의 집정관을 대독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만 있다면 만날 기회는 더더욱 없을 수밖에 없었다.
움직여야만 기회가 생긴다. 기회가 생겨야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레이나드 씨. 잠시 휴식 좀 하고 오세요.”
“아니에요.”
구급 막사에서 장시간 있다 보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에 다다른다.
사방에서 죽음을 토해내는 신음과 오열은 보통의 인간이 버티기에 힘든 것이었다.
더군다나 잦은 죽음을 목격하면 깊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쉬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다간 당신도 저기 누워 있게 될걸요.”
의료사의 말에 주변에 있던 시스터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좀 쉬고 오라는 신호를 보여주었다.
에레사는 제대로 식사도 못 하고서 계속 의료 봉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잘 알지 못했던 봉사 정신. 아니, 어쩌면 상처 입은 자에 대해서 관대한 것은 그녀 특유의 성향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강박관념을 느끼듯이 움직이는 이유는 사람의 죽음을 많이 겪게 되면서였다.
결국, 에레사는 반강제로 휴식을 하게 되었다.
옆에서 웃으며 기다리는 젊은 의료사는 에레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태세였다. 그리고 눈치 빠른 선배 시스터들도 곁눈질로 웃으면서 에레사에게 쉬고 올 것을 종용했다.
“레이나드 씨처럼 열정적으로 환자들을 돌보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에레사는 젊은 의료사가 건넨 따뜻한 음료를 받으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굳이 에레사만이 의료 봉사에 열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에레사 이상의 경험과 숙련도를 가진 열정 어린 시스터들의 숫자는 많았다.
다만 시커먼 교단의 튜닉을 입어도 에레사의 미모가 빛이 바래긴커녕 오히려 빛을 발하기 때문이었다.
에레사는 말하지 않아도 젊은 의료사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그녀에게 다가왔고, 같이 식사를 하고 싶어 했고, 억지로 같은 근무 시간을 편성하기도 했다.
타인의 관심은 누가 되었든 고마운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에레사는 지금 타인의 호감에 대해서 논해보고 생각해 볼 여를 이 없었다.
‘만약 내가 임산부란 사실을 안다면…….’
에레사의 배는 만삭의 몸이 아니었다. 그저 젊고 아름다운 처녀로 보일 뿐이었다.
이미 일 년이 지났지만, 에레사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도 찾아오질 않았다.
분명 아이를 가진 지 10개월이 지난 상태였다.
그런데도 에레사의 몸에는 별다른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
불안하고 걱정되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고민을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아이가 혹시나 유산이 된 것은 아닌지, 아니면 상상임신에 불과한 것은 아닐지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만났던 엘이 분명히 힐난하는 어투로 임신한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는 따뜻한 기운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 온화한 기운은 너무나 포근하고 따뜻해서 잠이 들 것만 같았다.
마치 하나로 일체화된 것 같은 감정의 기류를 떠올리면 에레사는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저기 레이나드 양. 혹시 괜찮다면 오늘 저녁에 함께 식사할 수 있을까요?”
젊은 의료사는 에레사가 멍한 얼굴로 있자 웃음을 지으며 입가를 열었다. 하지만 에레사는 그의 말에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이 보였다. 그것을 본 순간 에레사는 움찔하며 자리에 일어섰다.
혹시나 막사에 있던 환자가 혼자서 움직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크게 다친 누군가가 미처 막사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쓰러져 있을지도 몰랐다.
에레사는 핏자국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분주한 막사와 병사들의 사이로 칠흑의 망토를 펄럭이는 장신의 남성이 보였다.
망토 사이로 보이는 옆구리에선 흥건하게 핏물로 적셔져 있었다.
에레사는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저기, 잠깐만요!”
에레사는 사내를 불러 세웠다. 저런 상처를 입고서 제대로 환부를 소독하지 않는다면 상처가 악화된다.
별것 아닌 상처로도 죽음에 이르는 사람은 얼마든지 차고 넘쳤다.
에레사는 의료 막사에 들르지 않는 사내를 걱정해서 그를 뒤따라 갔다.
“거기 허리에 상처 입으신 분.”
에레사는 말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사내의 뒷모습이 낯이 익다고 생각되었다.
사내의 옷은 고위급 간부들보다 더 고풍스러웠다.
검은색 일색이지만 고급 원단으로 만들어진 그의 망토나 옷은 일반인들이 평생 가도 입을 수 없었다.
긴 기럭지와 칠흑. 그것을 생각하는 순간 에레사의 머릿속에 단 한 명의 남성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부름에 응답하듯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리에르를 되돌릴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명뿐이에요.
언젠가 엘이 말했던 한마디.
-에레사, 당신만이 그에게 있어 행복할 수 있는 권리를 줄 수 있어요.
에레사는 기억하고 있었다.
주변의 아이들에게 온갖 괴롭힘을 받아도 항상 옆에서 지켜주던 아이.
자신의 노예기에 자신만 괴롭힐 수 있다는 억지 논리로 억지 싸움을 벌이던 아이.
그런 주제에 싸움은 매우 못했던 아이.
그런 아이가 상처를 입는 것이 슬퍼서 울던 자신.
그런 자신을 보면서 쾌활하게 웃는 바보 같은 아이.
부족한 자신만을 바라보던 아이.
자신과 같은 시선에서, 같이 있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하며 공부했던 그 아이.
자신을 위해서 강해진 아이.
자신을 위해서 카에르 최고의 둔재에서 최고의 실력자로 대회 우승을 차지한 아이.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페이서스에서 도망치지 않은 아이.
그 덕분에 음모에 휘말려 적혈의 악마가 된 아이.
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죽지 않은 아이.
그 아이는 자신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억지로 목숨을 연명했었다.
자신이란 존재가 죽지 않았기에 그 아이는 다시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어 일어섰다.
그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기로 한 아이.
결국, 자신에게 배신당한 그 아이는 죽음의 나락으로 향했다.
“리엘…….”
에레사의 눈가에서 눈물이 적셔지기 시작했다.
피로하고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칠흑의 청년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칠흑의 청년도 천천히 눈가를 열어 보였다.
“에……렌…….”
칠흑의 청년, 아니, 리에르 아르빈트는 자신이 피로한 나머지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에레사가 코스모스 교단의 시스터들이 입는 튜닉을 걸치고 서 있었다.
아니, 무엇보다 에레사가 전쟁이 벌어지는 최전선에 있을 리 만무했다.
“리엘, 리엘, 리엘……!”
에레사는 리에르를 향해 걸어갔다.
아니, 이미 뛰기 시작했다.
잠시라도 멈추면 리에르는 어딘가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달리는 에레사의 후드가 벗겨져 탐스러운 금발이 넘실거렸다.
한때 증오를 품었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단발이었지만 1년이 지나 이제 어깨 아래까지 금발이 자라나 있었다.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게 된 모습이었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고위 간부들의 갑옷.
그리고 피로 얼룩진 그의 모습은 이미 소꿉친구의 모습은 단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모습이라 해도, 어떤 때라 하여도 항상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남자.
퉁명스럽게 굴면서도 항상 상대를 생각하던 자상한 사람.
리에르는 짙은 피 냄새로 인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통증 때문에 마약을 듬뿍 흡입한 상태였다.
세상과 현실은 물과 흙을 섞은 듯이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 혼미하게 흔들리는 불완전한 세상에 단 하나의 금빛이 품 안으로 들어왔다.
오열하는 금발의 여성은 칠흑의 남성을 끌어안았다.
미처 주변을 지키고 있던 호위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핏빛으로 물들었던 세상.
그것이 서서히 걷힌다. 리에르의 붉은 이채는 서서히 사그라졌다.
거부해야 했다.
리에르는 많은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것을 느꼈다.
아니, 애초에 에레사가 안기지 않았어도 리에르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사람이었다.
분명히 거부해야만 했다.
그녀의 죽어버리라는 절규가 아직도 귓가에 아른거렸다.
이렇게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곤 상상치 못했었다.
그렇다 하여 그녀에 대한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 그녀의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교단의 집행관에게 뛰어든 여자를 보고 근위병들은 당황하는 얼굴을 넘어 분노를 표출했다.
그들은 에레사를 붙잡고 그대로 마왕에게서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차가운 망토 자락이 에레사를 감싸 안았다.
그녀를 위해 밀어내려 했었다.
하지만 타인의 손에 붙잡힌 그녀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 버리고 말았다.
마왕이 금발 여성을 지키자 근위병들은 더욱 당황스러운 얼굴을 지어 올렸다.
당황하기는 리에르도 마찬가지였다.
리에르의 모든 시작은 에레사였다.
모든 끝도 그녀여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