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03)
레필리아 레소드-304화(303/398)
레필리아 레소드 304화
패도[覇道](6)
“각하, 핀란드 군사참모장이 찾아왔습니다.”
“들어와라.”
각하로 불리는 인물은 교단에서 단 한 명만 존재했다.
현재 코스모스 교단의 집정관이자, 강력한 무력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무한한 지지를 받는 영웅.
리에르 아르빈트였다.
기본적으로 리에르는 기존 교단의 권력 파들과는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었다.
리에르 아르빈트가 등장하기 전만 해도 교단에서 모든 권력을 등분하던 것은 장로들뿐이었다.
처음에는 다시 찾아온 적혈의 악마를 교단에선 내치려 했다.
하지만 이전보다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그를 이용할 방법을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장로회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저 인형으로 삼으려 했던 인물은 오히려 자신들을 장기말처럼 다루고 있었다.
전시에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무법자들을 효율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전시에 강력한 지휘력을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은 소수.
리에르는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장로뿐이라고 부추기면서 각 지부의 총독으로 보내 버렸다.
겉으로 보기엔 그들의 능력을 존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열두 명의 장로들이 서로 나뉘는 것은 장로회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장로회는 리에르 아르빈트와 사이가 좋을 수는 없었다.
지금 리에르의 막사 안으로 들어가는 핀란드 군사 참모 역시 그러했다.
단, 그는 좀 더 생리적인 혐오감 때문에 리에르를 싫어했다.
‘우연히 얻은 힘으로, 별다른 대가나 노력 없이 최고라고 으스대는 꼬맹이.’
핀란드는 막사 안에 들어서자 저절로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듣고서 찾아왔지만, 소문은 사실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요, 각하?”
핀란드는 톱니 같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리에르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가를 열어 보였다.
“뭘 말하는 건가?”
“저거에 관해 물었습니다만.”
핀란드는 검지를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금발 머리의 아름다운 여성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험상궂은 핀란드의 모습을 보고 잠시 움찔했다.
“아직 쓸모 있는 손가락이라면 접어두는 것이 나을 듯 보이는군.”
리에르의 살기 어린 시선을 보고 핀란드는 애써 팔을 내렸다.
그러고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리에르를 쏘아보았다.
지금은 교단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전쟁은 절정을 향하고 있었고, 이제 곧 단 하나의 뜻과 힘으로 뭉쳐진 단일 세력, 단일 종교가 만들어지기 직전이었다.
대륙을 코스모스의 이름 아래.
세력이 나뉘지 않는다면, 종교가 다르지 않다면 애초에 분란이 일어날 필요가 없었다.
그 원대하고 중요한 시기에 중심인물인 사람은 다름 아닌 리에르 아르빈트였다.
역사적인 사명을 가진 인물이 여자나 끼고서 시시덕거리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아니,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집정관께서 지금 여자를 끼고 놀 상황은 아닌 거로 압니다만?”
“장로회에선 내 포크질, 젓가락질까지 신경 쓸 생각인가?”
“전쟁 중에 여자를 끼고 노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여긴 여타 어중이떠중이 세력이 아닌 코스모스 교단입니다. 신앙으로 하나 된 이들이 인류의 미래와 희망을 위해 생명을 고갈시키는 성스러운 전장이란 말입니다. 설마 죽어간 생명들이 안타까워서 자신은 새로운 생명을 더 잉태시키겠다는 궤변이 아니길 바랍니다.”
리에르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로 핀란드의 비난을 들었다. 다른 인물이 이런 비난을 해오고 있다면 깔끔하게 죽였을 터였다.
하지만 핀란드는 군사 참모였다.
아울러 그런 직위가 아니라 해도 그는 교단의 장로였다.
아울러 그의 형제도 장로로 있었기에 그가 거느린 세력들도 보통은 아니었다.
“내가 자네의 배경을 두려워한다 생각하면 오산이야.”
리에르는 차갑게 웃어 보였다.
핀란드는 그의 냉랭한 말투에 코웃음을 치면서 톱니를 드러내 보였다.
“각하가 두려워할 것은 자기 자신일 겁니다. 이미 악명이야 뒤집어쓸 만큼 뒤집어쓴 것 같고, 부하에게 할 말 없어서 칼질해대는 위인이라고 소문나면 지금 당신의 세력들도 순식간에 반토막 나겠죠. 좋습니다. 자, 오늘 전투 그건 뭡니까?”
“적 지휘관의 목을 따지 못한 것을 말하나?”
리에르는 결국 대륙 오제인 프레이야와 이실렌을 놓치고 말았다.
두 사람도 만만치 않은 영웅이었기에 리에르가 주머니에서 손 꺼내는 것처럼 쉽게 결판 짓긴 어려웠다.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핀란드는 극도로 분노를 터뜨리며 대답했다.
“당신 혼자 성문을 돌파하고, 당신 혼자서 적 기사단을 돌파하고, 당신 혼자서 적 영웅의 목을 베고, 당신 혼자서 적 지휘관들과 싸우고.”
그야말로 괴물과도 같은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위기기도 했다.
“당신은 우리의 훌륭한 신성 군대를 장난감 병사로 생각하는 겁니까? 당신이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면 당신이 없는 군단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가 될 겁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결정짓는 전쟁은 치트로 결정돼선 곤란합니다. 누구나 수용할 만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결과가 나와야지만 승복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겁니다.”
너무나 강력한 힘. 그것도 단일의 힘으로 이룩된 임시 평화.
하지만 그 힘이 사라진다면 다시 전란이 열릴 것이 분명했다.
그때는 호랑이가 있었기에 물러섰지만, 이제는 그 호랑이가 없으니 해볼 만하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왕이니, 황제느니 떠받들어졌던 인물들은 또다시 자신의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하게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아쉽군. 그대의 전술로는 너무나 시간이 걸린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허기를 채우겠다면 빵 한 조각 씹으세요.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근사한 디너입니다. 우리는 음식을 요리해서 먹을 테니 당신은 굽지 않은 생고기를 물고 뜯으세요.”
핀란드의 독설은 위험수위를 넘어가고 있었다. 대륙을 공포로 물들인 칠흑의 악마에게 이처럼 말할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리에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핀란드는 코웃음을 치면서 노려보았다.
죽일 테면 얼마든지 죽여보라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금발의 아름다운 여성, 에레사만이 막사 안에 감도는 살기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는 리에르를 말려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녀가 우려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럼 이 이후부턴 맡겨도 되겠지.”
리에르의 말에 핀란드는 즉답했다.
“달갑지는 않지만, 어차피 사기가 떨어진 군대인데 각하 때문에 더 사기가 떨어진 모양입니다. 현재 탈영병이 다수 발생하고 있으니 곧 무너지게 될 겁니다. 설마 여자 끼고 밀월여행이나 다녀오겠단 경솔한 발언을 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아렌으로 간다.”
리에르의 말에 핀란드의 눈가가 움찔했다.
에레사도 갑작스럽게 아렌 왕국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시선을 돌렸다.
“그것을 하실 예정이군요.”
“그래.”
핀란드는 팔짱을 낀 채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각하께서도 이미 결정을 하신 듯하니 군말하지 않겠습니다.”
“물러가라.”
핀란드는 예를 취하며 톱니를 드러내 조소를 머금어 보였다.
“무운을.”
에레사로서는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들이었다.
리에르는 모든 일을 서둘러야만 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만은 않았다.
그렇기에 이전에 핀란드와 이야기해 둔 바가 있었다. 핀란드와 리에르는 서로 목적하는 바가 달랐다. 하지만 원하는 결과만은 같았다.
리에르는 교단 본청에 있는 아르미안에게 자신의 친위 기사인 흑기사들을 끌고 오게 하였다.
그 정예 중의 정예가 가는 방향은 아렌의 국경선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타국은 물론이거니와 내부에서도 알지 못하게끔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마을을 통째로 없애는 행위도 필요했다.
이런 정보 조작에는 아르미안이 적격이었다.
물론 지금의 리에르가 믿지 못하지만 믿을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진 않았다.
‘이 한 수로 대륙은 바뀐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강력한 한 수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만든다.
이 일이 끝나야지만 리에르는 자유로워질 수가 있었다.
그것이 해피엔드이든, 배드엔드이든.
잠자코 있던 에레사는 리에르의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달콤하고도 온화한 목소리였다. 리에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부하려 했었다.
몰래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여 지켜보기만 했다.
리에르는 에레사의 수척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한 그녀였다.
그런데도 에레사는 변함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한때는 미래가 전부 암흑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런 그의 앞을 나타난 에레사는 한 줄기 빛이나 다름없었다.
이전에 설원에서 죽다 살아난 리에르가 만났던 은색의 빛줄기.
그것과도 같은 금색의 빛줄기는 리에르를 살고 싶게만 했다.
“그래, 이제 더는 찾아올 녀석들이 없는가 봐.”
리에르는 겸연쩍게 입을 열었다. 갑자기 에레사와 재회한 리에르는 당혹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단 한 곳에 몰리게 되었다.
안 그래도 타인의 시선을 강탈하는 리에르의 존재감이었다.
거기에 갑자기 이름 모를 금발 미녀와 포옹하는 마왕은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기엔 충분했다.
리에르는 에레사를 거부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거부했다.
억지로라도 떼어내려고 했다.
그녀의 팔 힘이 리에르보다 강할 리 없었다.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밀어내면 아스러질 것처럼 느껴졌다.
리에르는 어쩔 수 없이 에레사를 막사 안으로 데리고 왔다.
하지만 막사에 들어선 집행관에게 쏟아지는 보고들은 한도 끝도 없었다.
덕분에 에레사와는 다시 재회한 이래 제대로 된 대화도 못 해보고 있었다.
“잘 지냈어?”
리에르는 물었다. 실로 오랜만에 뱉어보는 말이었다.
에레사는 리에르의 말을 듣고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가가 축축이 젖어지더니 눈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억지로 참아내고, 밀어냈던 뜨거운 감정들이 다시 그녀의 가슴을 두들겼다.
“아니, 잘 못 지냈어.”
잘 지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리에르를 믿어주지 못하고 그를 괴롭히기만 했던 자신이었다.
모든 것이 누명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걱정해서 입도 뻥긋하지 않았던 그.
오랜만에 만난 자신에게 기대고 싶고, 온기를 느끼고 싶었을 그였다. 하지만 에레사는 그를 경멸했다.
이 세상 누구보다 불행하고, 누구보다 괴로워하는 그를 안아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잘 지낼 것 같아.”
에레사는 억지로 빙긋 웃어 보였다.
뚝뚝.
굵은 눈물방울이 그녀의 무릎에 연신 떨어졌다.
리에르는 당연히 에레사가 그때의 일을 잊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한때 사랑했던 남자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경멸을 내뱉을 정도로 에레사는 정신이 붕괴하여 있었다.
비록 부추김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했던 이를 찌른 기억들은 결코 기쁠 리 없었다.
‘하지만.’
리에르는 에레사와 만나면 안 된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만난 그녀가 눈앞에 있다.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
하루하루 우울하고 슬펐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은 그저 리에르 아르빈트였다.
하지만 그날 죽음의 순간 찾아 들은 전생의 기억들은 그를 더 이상 리에르 아르빈트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더 이상 에레사를 불행의 늪에 빠져들게 할 순 없어.’
리에르는 에레사가 자신의 곁에 있으려 할 것을 예상했다.
아니, 리에르는 그녀를 갖고 싶었다.
그녀만 있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절대로 씻어낼 수 없는 깊고 깊은 심연의 죄. 이미 리에르는 추락하고 있었다.
“에렌, 미안해. 하지만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에레사는 리에르의 표정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리에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칠흑의 마왕.
세상을 공포로 물들이는 괴물. 온갖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에레사는 이제 자신이 아는 리에르가 없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하지만 리에르는 다르지 않았다.
“난 이제 너와…….”
함께 할 수 없었다.
만날 수 없었다. 만나면 안 된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생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행복이 남아 있지 않았다.
“리엘, 나 임신했어.”
에레사는 무릎에 닿은 치맛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 다시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느껴졌다.
에레사의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리에르는 에레사에게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이제야 알아챘다.
두근, 두근.
그제야 소개를 받은 것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는 존재.
에레사에겐 있을 리 없는 청아한 푸른빛의 깃털이 흩날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