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09)
레필리아 레소드-310화(309/398)
레필리아 레소드 310화
출사표(6)
포스를 사용하면 굳이 검술 따위를 사용하지 않았다.
칠흑의 날개를 꺼내 들고 나면 가벼운 정권 하나만으로 능히 모든 것을 깨부술 수가 있었다.
가벼운 발차기도 상대를 부순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모래알처럼 으깨는 것이 가능했다.
검술은 말 그대로 검을 사용하는 기술이었다.
인간이 더 강해지기 위해, 더 강력한 무기를 들고서 더 철저하게 부수기 위한 기술이다.
라파엘은 그제야 리에르가 날개도 꺼내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날개의 구현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용솟음치는 에너지가 인간의 작은 그릇에 머물지 못하고 솟구치는 현상이었다.
‘4단계 이상이다.’
라파엘은 아쉽지만, 전투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리에르 아르빈트는 가장 강력한 포스였다.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했던 먹잇감이 이제는 오히려 포식자가 되어 있었다.
라파엘은 저릿저릿함을 느꼈다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버리고 네 할 일이나 해라. 이번에는 룬 위시를 회수해.”
“아, 자네가 껍데기만 회수했던 그 룬 위시를 말하는가?”
라파엘은 아직 일어서지도 못하면서 킥킥거렸다.
손뼉을 치고 싶었지만, 아직 부러진 팔이 재생하지 못해서 시도만 하고 말았다.
리에르는 빙긋 웃으면서 제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그러고는 라파엘에게 냉랭하게 입을 열어 보였다.
“네놈을 죽이지 못해서 안 죽인다고 착각하면 곤란하지.”
“그래, 자네가 강하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내가 최종 단계에 진입하면 자네 팔, 다리를 잘라 화분에 담아놓고 양분을 줄 수 있을 걸세.”
라파엘의 가시 돋친 말에 리에르는 빙긋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럴지도 모르지.”
“크윽!”
기본적으로 무통증인 라파엘이었다.
하지만 지금 리에르는 그의 가슴을 짓밟으면서 마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라파엘은 강력한 포스의 마력이 혈액을 타고 전신을 찢자, 오랜만에 고통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리에르의 눈동자에서 붉은 이채가 그려졌다.
리에르의 포스는 순식간에 라파엘의 혈액을 통해 몸 곳곳에 뻗어 나갔다.
침투에 성공하고 확장에 성공한 포스의 마력은 이내 목적한 바를 이룩하기 시작했다.
라파엘의 몸 곳곳은 흡착판을 붙인 것처럼 신력이 뽑혀 나가고 있었다.
신력이 빠져나가도 수호신장은 존재 자체가 반신이기에 다시 힘이 회복된다.
하지만 신력이 소실된 상태에선 그들의 몸도 한낱 인간과 다를 바 없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리에르는 마음껏 라파엘을 희롱하며 상하관계를 확실히 하고 있었다.
리에르는 라파엘이 힘을 잃자 결계가 부서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라파엘을 버려둔 리에르는 천천히 막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서 있는 미카엘이 보였다.
“재미있는 걸 하고 있었잖아요? 왜 저만 쏙 빼놓는 건가요?”
금발의 귀여운 얼굴을 한 미소년.
그런 모습을 한 것과는 정반대로 번들거리는 뱀의 눈동자와 혓바닥을 가지고 있었다.
“라파엘과 룬 위시를 되찾아 와.”
“싫어요.”
리에르는 미카엘을 지나치다가 멈춰 섰다. 미카엘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마왕의 붉은 눈동자.
명백한 분노를 담은 치명적인 살기가 오로지 자신만을 향하고 있었다.
미카엘은 뛰는 가슴을 애써 부여잡았다.
“당신 혼자 아렌으로 가려는 거잖아요. 저도 같이 갈 겁니다.”
“농담할 생각 없다.”
“저도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잊었나요? 저는 당신의 광기에 매혹되어 따르는 자.”
미카엘의 눈동자가 마왕과 시선을 마주했다.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
지독한 살기는 반신인 수호신장들도 얼어붙게 하듯 하였다.
사람이 아닌, 무가치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했다.
“명령한다, 미카엘.”
“거부합니다. 당신에게 매혹되었다고 내 몸도 당신의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시죠.”
미카엘은 들개처럼 헐떡거리며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리에르는 천천히 아르카이제를 손안에 잡았다.
어차피 수호신장이라는 존재들은 이용가치가 있기에 남겨두었다.
애초에 테헤라자드도 그들을 이용하라고 내주었다.
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들을 전부 제거하는 것도 방법의 하나였다.
“하지만 당신이 상을 주겠다면 이야기는 다르지요.”
미카엘은 리에르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 매끈거리는 혀를 날름거렸다.
“네가 원하는 상과, 내가 말하는 상이 다를 수도 있겠군.”
리에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대로 몸을 회전시켰다.
뻐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미카엘은 그대로 팽이처럼 가로로 회전하며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둘이 같이 누워서 잘 생각해 봐.”
리에르는 막사 구석에 늘어진 미카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미카엘은 멀어지는 리에르의 뒷모습을 보면서 헤실헤실하며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헤헤, 벌써 상을 받아버렸네.”
막사 안의 라파엘은 리에르에게 당한 덕분에 아직도 재생을 못 하고 있었다.
덕분에 미카엘은 피를 혀로 핥으면서 즐거워했다.
미카엘은 리에르가 함께 가는 것을 거부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는 리에르가 가고 있는 길을 알 것만 같았다.
어차피 제국은 더 이상 교단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리에르가 없다 해도 지금의 전쟁에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리에르는 연신 뱀과 너구리를 상대하려니 피곤한 기색이 찾아들었다.
수호신장이란 것들은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자극에 취약한 면모를 보였다.
아니, 애초에 놈들에게 고통을 안길 수 있는 존재 자체가 흔하지 않았다.
테헤라자드가 애초에 수호신장들을 리에르에게 넘긴 것도 즐겁기 위한 것이었다.
쾌락만을 좇는 사냥개들.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진 이들에 대한 아주 작은 연민.
리에르가 그런 것을 느끼는 것은 자신도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기 때문이었다.
잘못된 각성으로 인해 몸 깊숙이 적셔 들은 독.
그 독은 씻어내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이 젖어 들었다. 그 와중에 전생의 기억까지 되찾은 리에르는 눈앞이 더 혼탁해지고 이성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감정들.
“어서 와, 리엘.”
아름다운 금발 머리의 여성. 혼탁한 어둠의 속에서 유일하게 단 하나의 빛으로 보이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 황금의 빛 뒤편으로 펼쳐지는 푸른 날개 깃털은 리에르의 눈가를 차갑게 만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구나.”
에레사는 애써 밝은 얼굴을 해 보였다. 리에르는 자신의 제복 가운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에레사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떤 말을 해주길 바라는 거지?”
에레사의 슬픈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어떤 걸 원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날 용서하기 힘들단 것을 알아.”
‘아니, 용서받아야 할 것은 나다.’
자신의 존재로 인해 에레사의 인생은 일그러졌다. 모든 것이 뒤틀렸다.
“이런 말 할 자격이 될지 모르겠어.”
‘네 앞에 서 있을 자격이 없는 건 나야.’
사랑스러운 여성.
금빛 보리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물결이 흰 목선을 타고 어깨 위에 올라있다.
지금 그녀는 공포를 느끼고 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외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태어나지 않는 아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제 항상 널 믿을 거야, 그러니…….”
“대답은.”
에레사의 말이 끊어졌다.
리에르의 입가에 궐련이 물렸다. 불꽃이 궐련을 태운다. 메케한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와 동시에 옆구리에 달라붙은 상처의 통증이 둔해졌다.
“이번 전쟁이 끝나고 답해줄게.”
리에르는 부드럽게 웃으며 에레사의 뺨을 어루만졌다.
“리엘…….”
에레사의 눈가가 축축이 적셔 들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답과 자신이 원하는 답이 다르다는 것을.
최악이 최선일 때가 있다.
“걱정하지 마. 지켜줄 테니.”
자신의 방식으로 지킨다.
리에르는 자신에게 슬픈 감정이 단 한 조각이라도 남았다는 것에 감사했다.
* * *
“큰일입니다, 베리타스!”
갑자기 들이닥친 기사의 말에 은발의 왕은 고개를 돌렸다.
지난 전투로 인해 크게 다친 유트는 한쪽 팔에 깁스를 한 상태였다.
그나마 상처가 깊은 왼팔을 제외하면 리즈의 치료 덕분에 금세 회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국의 왕. 그것도 대륙 오대 강국 중 하나인 페리안의 왕이 왕성에서 기습을 받았다는 사실은 굉장한 불명예였다.
유트는 굳이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스스로의 오만함을 잊지 않고자 했다.
실력은 있다지만, 빠르게 성공의 길을 걸어온 유트였다.
그의 뒤로는 도와주는 이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많았다.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연합 전쟁의 마지막.
그 전투에서도 유트는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여 뼈아픈 대실책을 하고 말았다.
그 한 번의 실책은 곧 대패로 마무리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스스로의 희생을 생각하지 않고 뛰어든 리즈가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인간의 세상은 인간의 힘으로 이룩되어야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리즈는 살육으로 얼룩진 사람답지 않게 감상적인 말을 했었다. 그리고 되도록 그는 포스의 힘으로 싸우는 것은 지양해 왔다.
하지만 관문 전투에서 페리안의 위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향하여 초월기를 발휘했다.
위험에 빠진 유트를 구하기 위해 혼자 대군과 싸우기 위해서 포스의 힘을 발휘했다.
그 결과 승리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페리안의 힘이 아닌, 전설적인 포스 사용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만들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에 교단이 급습해 올 것을 알면서도 유트는 혼자서 대응하려 했다.
그 결과 유트는 암살자에게 크게 다쳤다.
유트는 잇따른 실패를 경험으로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있었다.
“공주님이……!”
유트는 불안함이 엄습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혼자 성 밖을 나가셨습니다!”
그냥 성 밖을 나간 거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왕족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도시를 돌아다닐 수 있었고,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신분이 들키지 않게끔 변복을 해야 하는 귀찮음을 감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유트는 보고를 해오는 기사의 분위기가 그런 내용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행선지가 아무래도 제국 쪽인 것 같습니다!”
“바보 녀석…….”
유트는 이마 언저리를 짚으며 눈가를 찌푸렸다.
극도로 분노가 치솟았지만, 최대한 입술을 깨물며 화를 삭였다.
유트는 유이가 계속 리에르의 일 때문에 걱정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실에서 학살을 벌인 뒤로도 쭉 리에르를 보고 싶어 했다.
그 와중에 리에르가 교단의 집정관으로서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남매는 어안이 벙벙했다.
두 사람은 리에르에게 무언가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리에르와 마주할 수 없으니 아무런 대화도 할 수 없었다.
그 답답함을 애써 참고 있던 유이는 결국 스스로 못 견디고 뛰쳐나가 버린 것이었다.
“마치 누구 같군요.”
옆에서 보고를 듣고 있던 리즈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유트는 리즈에게 항의를 하고 싶었으나 이내 입을 닫았다.
유트도 리에르의 소식을 알자마자 유이처럼 뛰쳐나갔었다.
그 당시에도 유트는 왕좌에 자리했었고, 그 막중한 책임을 뒤로한 채 죽을지도 모르는 여행길을 떠났었다.
물론 유트의 여행길에는 리즈가 안배를 이미 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일이 잘되었기 때문에 다행인 일이었다.
그때와 다른 것은 유트가 유이의 심중을 꿰뚫지 못하고 몰래 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정도였다.
“같지 않습니다.”
“세간에선 이런 것 같다고 말합니다.”
유트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를 마친 기사는 고개를 숙이며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그때와 상황이 너무도 다릅니다.”
그때의 리에르는 분명 스스로를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의 리에르는 스스로 교단의 집정관이 되어 모든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리에르는 유트가 알던 리에르의 모습이 아니었다.
또 누군가에게 세뇌를 당하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다르지만 내용 자체는 똑같군요.”
리즈의 의미심장한 말에 유트는 고개를 돌려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어둠에서 구원한다는 내용 자체는 너무나 똑같습니다.”
그 내용 자체가 해피엔딩이 될지, 배드엔딩이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데려올 수 없을까요?”
“무리일 겁니다. 벌써 출발한 지 며칠 지난 상태니까요.”
리즈의 말에 유트의 한숨은 더 깊어지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