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11)
레필리아 레소드-312화(311/398)
레필리아 레소드 312화
아르빈트의 남자들(2)
아렌 왕국이 몬스터 연합이란 족쇄를 풀어버리게 된다면 그 후폭풍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말 그대로 대륙 최강을 자랑하는 기사단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닌 괴물뿐이었다.
만약 폭룡 네버 에이지의 군대가 아니었다면 이미 아렌 왕국은 교단을 향해 진군했다.
그리고 지금쯤은 세력 치가 완전히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빅스터마저도 놀라게 만든 날카로운 한 수가 있었다.
마왕 리에르 아르빈트. 교단의 집정관은 1천의 정예를 이끌고 아렌 왕국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마침 아렌 왕국의 정예들은 하나같이 몬스터 연합 군대와 대치 상태였다.
그 빈틈을 노리고 들어온 리에르는 관문을 돌파하고 아렌 수도를 향해 입성하고 있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한 수를 보고 대륙은 경악했다.
아무리 마왕이라 해도 아렌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 로이스타라는 대영웅이 있는데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나 다른 바 없었다.
“목숨을 걸고 막아라!”
“이곳이 뚫리면 왕성이 위험하다!”
“곧 지원군이 당도할 것이다! 병사들이여 분전하라!”
아렌 왕성은 다급하게 부랴부랴 비상군을 모집했다.
하지만 동원령에 따라 모집된 인원들은 대다수 비전투인인 일반인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시민은 전부 전투에 나가 있는 상태였고, 대다수 어린이나 아녀자 같은 인물들밖에 없었다.
그나마 정식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 긴급하게 백부장, 십부장에 임명되어 다급하게 전투를 교육시켰다. 물론 큰 의미는 없었다.
시민들은 훈련 교육에 열중하지 않았다.
그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 때문에 모든 오감이 마비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지금 쳐들어오는 군대는 교단에서 정예 중의 정예인 흑기사들이었다.
더 안 좋은 사실은 적의 지휘관은 대륙 최강자로 악명 높은 마왕, 리에르였다.
“곧 아르빈트 대원수가 도착할 거예요. 모두 최선을 다해주세요.”
금발의 아름다운 여왕. 제이미 룬 아레스트도 갑옷을 입고 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한때는 그녀도 뛰어난 검사였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여왕으로 등극하고 나서는 검에서 손을 뗀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스스로 검을 잡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지금 아렌 수도의 위급한 상황은 십일검 기사단에도 전달된 상태였다.
수도를 지원하기 위한 기병들이 전속력으로 회군하는 중이었다.
결국, 시간만 끌 수 있다면 지금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망일 뿐.
“모든 흑기사는 들어라.”
칠흑으로 그려진 듯한 마왕이 말을 시작했다.
붉은 눈동자를 가늘게 열은 리에르 아르빈트는 자신을 가로막는 아렌의 군대를 보며 조소해 보였다.
“나약한 존재들에게 강자의 의무를 다해라.”
흑기사들은 자신들의 수장이 하는 말을 듣고 눈에서 광채를 뿜어냈다.
잔혹한 살기. 싸우고자 하는 투지의 빛을 보고 리에르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다는 말을 거부한다.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할 필요도 없다. 내 기사들은 약자에게도, 강자에게도 항상 강해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유일하게 내 이름을 허락한 천 명의 기사들이다.”
공기가 서늘했다.
“모두 베어라. 모두 죽여라. 앞을 가로막는 것은 모두가 너희의 적이다. 새 시대를 위해서는 낡은 관습이 무너져야 한다. 눈앞에 모든 것을 무너뜨려라. 그것이 내 이름을 잇는 자들의 숙명이다. 대의를 위한 희생에 뒤돌아서지 마라.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진격뿐이다!”
“명을 받듭니다!”
전쟁의 귀신들로 이루어진 칠흑의 기사들이 날카로운 칼날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포효하는 흑기사들을 보며 성안의 사람들은 공포로 물들었다.
순식간에 수도까지 침입해 온 그들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전에 여왕의 명으로 국경을 지키고 있던 삼검대장 밀피유는 리에르와 격돌하여 대패하고 말았다.
각 검의 대장이라면 아렌에서 가장 강한 사람만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리에르의 강력한 돌파력에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했다.
대장기가 순식간에 꺾이자 천하의 정예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밀집해서 관문을 수비했지만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검은 무리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온다!”
소리친 남자는 수비대장이었다.
그는 전 아레스트 영주 때부터 충성을 바쳤던 인물이었다. 검술 실력의 한계 때문에 십일검 기사단이 되지는 못했지만, 꿈을 접고 아렌의 가디언이 되었다.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사명감과 의지는 기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겨우 천 명! 경장으로 공성을 시도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보라! 도전하는 저놈들의 죽음을 목도하라! 곧 끝날 전투 후에 저놈들의 시체에 오줌을 갈기리라. 멍청한 놈들의 멍청한 짓거리를 유쾌하게 쳐부수리라!”
마치 당연히 이긴다는 수비대장의 어투에 모두의 경직된 공포가 누그러들었다.
확실히 수비대장은 능력이 나쁘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번 전투가 첫 전쟁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간다.”
리에르는 흑기사들의 가장 선두에 서서 말을 달렸다.
화살이 날아왔다.
무의미했다. 마왕을 노리는 모든 행위가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했다.
왕성의 성문을 가기 전에 있는 하천은 다리 없이는 건너기 불가능했다.
하지만 리에르는 그대로 흑마를 달려, 하천을 뛰어넘고 성문으로 달려들었다.
화살이나 돌 따위가 피해를 줄 리 만무했다.
리에르는 그대로 아르카이제를 들어 성문을 향해 검을 그어 내렸다.
베었다.
칠흑의 검호가 문에 서려진다.
다시 베었다.
칠흑의 선호가 문을 두들긴다.
정면으로 베어 넘긴다.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한 성문이 조각조각 나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순간을 목격한 성 너머의 병사들은 그대로 마비되어 있었다.
“입성하라.”
리에르의 차가운 한마디를 끝으로 흑기사들이 물밀 듯이 성 내부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성문을 뚫기 위해선 당연히 공성 전차와 같은 병기가 필요했다.
거대한 몬스터라면 스스로의 강력한 육체를 이용해서 강철로 만든 성문을 돌파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들 간의 전쟁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단신으로 성문을 돌파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그 모습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은 두려움과 경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칠흑의 마왕 리에르였다.
성문의 부서지는 아래로 짙은 먼지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그 안으로 천천히 들어와 손을 앞으로 뻗어 올리는 남성.
그가 칠흑의 마왕 리에르란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감히 마왕을 막아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누구도 감히 칼을 겨누지 못한다.
누구도 감히 말을 건네지 못한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존재를 향해 시민들은 죽음을 예지하고 있었다.
마왕의 뒤로 흑기사들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마치 시커먼 밀물과 같은 모습을 보며 시민들은 두려움에 움직이지 못했다.
“막아라! 전부 움직여라! 목책을 가져와라!”
수비대장의 눈에서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두려움을 넘어선 분노가 그에게 치밀어 올랐다.
십오 년 이상 이곳에서 근무했던 그였다. 십일검 기사단으로서의 뛰어난 재능이 없던 그에게 있어 단 하나뿐이었던 재능.
그것을 유일하게 인정해 준 아레스트 영주에 대한 충의는 목숨마저 불태울 수 있었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수비대장의 지시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불과 얼마 전에도 칼 대신에 괭이와 낫을 들고 농업을 하던 이들이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사랑하는 이가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오는 것만 기도하던 그들이었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이, 사랑하는 이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순간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저앉는다.
울었다.
공포를 이겨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은 검은 칼날의 번뜩임과 동시에 땅바닥을 굴렀다.
삽시간에 바닥이 핏빛 붓칠을 시작했다.
어지럽게 좁혀 들어오는 사신들의 움직임에 시민병들은 비명만 토해냈다.
개중에는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은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은 창을 쥔 채로 최대한 반항했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사력을 다하는 법이었다.
포식자인 고양이를 물기 위한 쥐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고양이의 가벼운 손길 한 번에 쥐의 목은 잘려 나갔다.
고양이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포식을 위해서 쥐를 잡지 않았다.
그저 본능적으로 고양이는 쥐를 죽였다.
마치 지금처럼 하기 위해 살아온 것처럼.
“여왕님, 피하셔야 합니다!”
“아아…….”
제이미 여왕은 하염없이 눈물을 토해냈다.
눈물에 반사되어 전해지는 핏빛 배경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든 막아내고 싶었다.
제이미의 옆구리에는 롱소드가 채워져 있었다.
롱소드는 실전용으로 쓰이기엔 너무나 고풍스러운 문양과 황금빛 선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여왕에게 있어서는 그저 장식이나 다른 바 없는 무기였다.
“여왕님, 안 됩니다. 지금은 이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여왕의 생각을 눈치챈 신하가 간곡히 그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평상시라면 엄연히 국왕 모독이었다.
제이미는 입술을 잔뜩 깨물었다.
정예인 흑기사들을 상대로 일반 시민병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평생 싸움이라곤 해보지도 않은 평범한 이들이었다.
제이미는 흑기사의 중심에 있는 남성을 바라보았다. 파에트와 닮은 얼굴이었다.
아버지와 형과는 달리 아무런 재능이 없어 고민하던 아이.
심술 맞지만 순수한 눈동자. 그리고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찬란한 재능으로 빛나던 소년.
처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찾아갔던 소년에게서 호감을 느꼈다.
그리고 아르빈트와 끊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느꼈었다.
그녀의 예상은 반만 맞고 반은 틀리게 되었다.
“여왕님!”
신하들이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성토하고 있었다.
지금 피하지 않으면 영영 피하지 못하게 되었다.
제이미는 순간적인 뜨거운 감정과 차가운 이성을 서로 조율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예전과는 너무나 다른 여성이 되어 있었다.
어릴 적엔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했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한다.
“말을 준비해 주세요.”
제이미는 눈가를 여미었다. 억지로 뜨거운 눈물을 끊어낸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왕님을 모셔라!”
여왕을 대피시키려는 신하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바쁘지 않은 것은 제이미뿐이었다.
지금 수도를 지키기 위해 파에트와 엘빈이 각각 기사단을 이끌고 오고 있었다.
제이미는 당장의 위기를 생각하기보단 엉뚱한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가 탈 백마의 마차가 준비되었다.
제이미를 태운 마차가 빠르게 수도를 벗어나기 위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제이미는 흐릿한 눈동자로 마차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피난을 떠나는 시민들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소란스러웠다.
여왕으로서 자신의 백성들을 두고 떠난다는 사실이 너무나 치욕적이고 괴로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이 한마디로 절약되는 미사여구를 떠올린다면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제이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제이미의 마차가 달릴수록 옆에서 따라붙는 기사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말을 탈 줄 아는 신하들도 그녀의 행렬이 되어 뒤따르기 시작했다.
호위하는 기사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고 제이미는 안심보단 치욕감이 더해졌다.
아무리 모르는 이가 보아도 한 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왕국을 수호해야 할 여왕이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간단 사실에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마차가 속도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웬 놈이냐!”
기사들은 감히 여왕의 앞을 가로막는 사내를 향해 호통을 치려 했다.
하지만 곧 기사는 사시나무처럼 떨어대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마왕, 리에르였다.
“어디를 가십니까, 여왕 전하.”
제이미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마차에 내려 리에르에게 살육을 멈춰달라고 요청을 하려 했다. 하지만 신하들은 그녀의 마차 문을 막아섰다.
“멍청한 놈. 혼자서 우리를 막겠다는 거냐!”
기사들은 검을 뽑아 들었다. 리에르는 달려드는 기사들을 향해 콧방귀만 뀌었다.
그들은 멀리 있었던 탓에 리에르가 성문을 어떻게 뚫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소문은 항상 부풀리게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그 판단이 실수란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리에르가 손을 뻗자 검은 큐브 형태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금세 긴 칠흑의 도검으로 화하여 달려드는 기사들을 한 합에 베어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