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16)
레필리아 레소드-317화(316/398)
레필리아 레소드 317화
아르빈트의 남자들(7)
적에게 앞과 뒤로 공격받는 아렌은 전멸을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싫은 타입이네.”
아르미안은 예상외의 적이 나타나자 살짝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간단하게 끝날 수 있었던 일이었다.
아주 적은 숫자의 희생만으로 해결될 수도 있었던 일이었다.
어차피 결과는 같은데도 불필요한 저항을 하는 그들에게 비난을 퍼붓고 싶었다.
“상급 기사들을 전부 후방 기습을 방어. 병사들은 전부 장창 방진을 준비하세요.”
아르미안은 침착하게 명령을 하달했다.
선지자의 명을 받든 광신도들은 전군에 명령을 하달했다.
하지만 그 명령이 끝까지 미치기도 전에 매서운 팔검대가 진입하였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잿빛 늑대들의 거창.
그 선두에 선 엘빈은 광소를 터뜨리며 적을 베어 넘겼다.
“엘빈…….”
제이미는 팔검이 질풍처럼 돌격하는 것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생각해 보면 엘빈은 항상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제이미가 성에서 가출할 때도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엘빈이었다.
그녀가 호위도 없이 다닐 때도, 훈련할 때도 곁을 지켜주던 인물은 엘빈이었다.
생각해 보면 엘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음험한 성격과 차가운 얼굴. 하지만 제이미만은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모두 멈추지 않고 돌격한다! 뒤를 보지 않는다! 팔검대와 합류한다!”
모리스도 기사대의 에이스가 없어 돌파구를 찾기 힘든 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팔검의 엘빈 대장이 나타난 것은 큰 기회였다.
“마음껏 짐승이 되도록. 내가 허락하겠다.”
선두에 선 엘빈은 사방에 피보라를 일으키며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희열로 가득 차 있었다.
전쟁터에서 태어나고, 전쟁으로 사는 괴물 같은 모습이었다.
아르미안은 심상치 않은 엘빈의 돌격을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려 보였다.
칠검을 앞뒤로 에워싸서 전멸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칠검대와 팔검대에 둘러싸여 샌드위치 공격을 받는 태세가 되었다.
“방진을 유지하고, 상급 기사들은 나와 함께 여왕을 잡으러 간다.”
“적의 여왕벌을 썰러 간다. 내 뒤를 따른다.”
아르미안은 상황이 점점 나빠지자 방진에서 쐐기로 변형했다.
하지만 곧바로 그녀를 향해 엘빈의 칼이 번뜩였다.
아르미안은 순식간에 병사들을 걷어내는 엘빈을 보고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최정예는 아니었지만, 전투로 경험이 다져진 병사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그냥 어린아이들 밀어내듯 하는 것은 대륙 최강을 자랑할 수 있기에 가능한 장면이었다.
‘내가 직접 나서야 하나.’
아르미안은 검 자루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그녀가 검을 뽑을 필요는 없었다.
“와아아!”
함성 소리와 함께 좌측의 언덕 너머로 칠흑으로 물든 존재들이 떼거리로 나타났다.
“크큭, 이거 참.”
엘빈은 본능적으로 적의 뒤를 잡았다.
하지만 그의 뒤를 잡은 무리가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엘빈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으로 전장을 주도하는 괴물.
칠흑의 마왕, 집정관 리에르 아르빈트.
그는 자신의 정예들을 이끌고서 칠검과 팔검이 합체되는 것을 막아서고 있었다.
허리가 잘려나간 팔검은 삽시간에 진형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너진 진형을 수습하기 위해선 한차례 물러서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싸우는 적은 그럴 시간을 주지 않기로 유명한 지휘관이었다.
“안 돼…….”
제이미는 마치 피가 날 것처럼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전술을 잘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상황은 굉장히 좋지 않았다.
도주하고 있는 칠검은 후방이 잡힌 상태였다.
그 앞을 아르미안의 군대가 막아섰다.
그 후방을 엘빈의 팔검이 기습했다. 하지만 그 허리를 리에르가 잘라내고 있었다.
차라리 그냥 잡혔다면 최소한의 목숨만 죽었을지도 몰랐다.
제이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기사들을 보면서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눈을 가리고 앞을 향하지 않는 그녀의 귓가로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극이 들려온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붙어보는 것은 처음인 건가.”
엘빈은 몰려드는 흑기사들을 향해 양손검을 휘둘렀다.
단단한 그의 철검에 닿는 것들은 모두 부서지듯이 터져 나갔다.
하지만 교단의 기사들은 죽음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으면 신의 곁으로. 아주 짧은 현세의 생. 그것을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영원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살아갈 수 있었다.
“리에르으으으으으으군!”
엘빈은 눈에서 광기를 뿜어내며 날듯이 달려들었다.
리에르는 조소하며 아르카를 수평으로 들어 올렸다.
한때 리에르는 교단에 버림받고 설원에서 생을 갈구하며 도주했다.
그 뒤를 쫓고 있던 것은 엘빈이었고, 그는 리에르를 죽이지 않았다.
지금 엘빈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때 했던 판단을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리에르는 그것에 대한 답을 알 것 같았다.
엘빈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입에는 광기 어린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미 전장의 기운에 도취하였음을 의미했다.
애초에 엘빈은 광전사 같은 남자였다.
일단 스위치가 들어가면 그의 시야는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이 베어야 할 것만 바라보았다.
채에에엥!
소름 끼치는 검의 비명이 들려왔다.
엘빈과 리에르는 서로에게 검을 교차하며 지나갔다.
보통의 상대였다면 조금 전의 일격으로 손목이 부러져 나갔을 타격이었다.
하지만 둘 다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리에르는 엘빈을 그대로 지나쳐 다른 팔검 기사들을 도륙하며 돌진했다.
엘빈은 광기를 드러내며 말의 기수를 돌려 리에르의 뒤를 쫓았다.
“세 수는 양보할게.”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리에르가 엘빈에게 속삭였다. 과거 엘빈이 리에르를 상대로 목숨을 살려주었던 일.
그 일에 대한 대가로 세 번은 봐주겠다는 의미였다.
분명 엘빈과 리에르의 실력에는 그만한 간극이 존재했다.
“이 엘빈을 상대로 여유를 부리겠다니.”
엘빈이 높이 양손검을 들어 올렸다.
수많은 피를 머금은 그의 검은 여러 차례 벼려지고 벼려졌다.
그것은 이미 불길한 저주의 검과도 같았다.
그것과 무기가 맞닿은 기사들은 누구나 불길함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리에르가 들고 있는 무기는 겨우 그 정도의 저주와는 궤를 달리하는 존재였다.
채엥!
리에르의 완력은 엘빈에게 밀리지 않고 있었다.
어느새 돌아서서 엘빈의 검을 막아낸 리에르는 차갑게 조소해 보였다.
“무리야.”
리에르는 그렇게 냉랭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엘빈은 정지된 상태에서도 힘껏 검을 내리눌렀다.
리에르의 동공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엘빈과 대치하고 있던 리에르의 검이 천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아르빈트 가문으로서의 재능. 꾸준히 해왔던 훈련.
압도적인 마력은 체력과 시너지를 발휘하며 강력한 육체로 만들어 주었다.
굳이 포스라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리에르는 괴물이나 다른 바 없는 몸이었다.
그런 리에르를 상대로 엘빈은 힘으로 모든 것을 상쇄시키고 있었다.
어느새 리에르는 엘빈의 검에 밀려 어깨가 베이고 있었다.
조금만 힘을 빼도 어깨 한쪽이 도려져 나갈 기세였다.
갑옷을 입지 않은 리에르의 어깨가 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치는 길어지지 않았다. 마왕이 위험한 것을 보고 흑기사들이 엘빈을 향해 덤벼들기 시작했다.
팔검의 기사들도 있었지만, 수적인 열세로 인해 엘빈을 제대로 지원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압도적으로 강한 마왕을 상대로 또 다른 적들까지 상대하는 엘빈은 괴로운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리에르에게서 떨어진 엘빈은 자신에게 덤벼드는 흑기사들을 향해 맹검을 휘둘렀다.
말과 함께 사람도 호쾌하게 잘려 나갔다.
한차례 유혈 쇼를 보여준 엘빈은 다시 리에르를 눈으로 좇았다.
리에르는 엘빈을 상대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다른 방향으로 돌격하고 있었다.
그 방향이 어딘지 아는 엘빈은 다시 말을 달려야만 했다.
어디까지나 리에르의 목표는 여왕이었다.
그로선 아렌을 상대로 불필요한 유혈 사태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애초에 기습으로 전쟁을 시작한 것은 리에르였다.
유독 아렌을 상대로 리에르는 냉정함을 지키지 못했다.
그의 그런 행동이 다른 이에게 용납될 리도 만무했다.
어차피 악인은 악인. 자신의 고향에게 아주 작은 자비를 베푼다 해서 누구도 알아주지도, 알아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리에르는 자기 생각을 우선시하였다.
제이미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기서 잡아야만 했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당장 그녀를 붙잡아, 인질로 삼고 아렌의 아티팩트인 성검 발락시아를 획득해야 했다.
아무리 리에르라 해도 직접 아버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로이스타 정도의 괴물을 상대로 싸운다면 큰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포스인 리에르가 인간을 상대로 질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 치명적인 한계점을 지닌 리에르는 되도록 최종 사투를 위해 힘을 아끼고 싶었다.
“손이 많이 가게 하지 마라.”
리에르는 그대로 엘빈을 무시하면서 돌진했다.
이제 제이미도 리에르의 존재가 코앞에서 보일 지경이 되었다.
삽시간에 아군을 뚫고 돌진하는 리에르를 보니 칠검의 부대장인 모리스도 등골의 오싹함을 느꼈다.
“막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만 한다!”
“집정관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벤다! 죽인다!”
두 적대 세력은 서로 지도자의 길을 막고, 뚫는 것에 전념했다.
“과연 내 등골이 오싹하다!”
어느새 엘빈은 리에르의 옆까지 달려들었다.
리에르는 순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당혹감은 아주 잠시였다.
리에르는 기계적으로 아르카를 들어 엘빈의 검격을 받아쳤다.
긴 철의 굉음.
리에르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손목이 얼얼하게 마비되는 듯한 시큰함이 전달되었다.
리에르는 말에 탄 상태에서 옆으로 쭉 밀려났다.
엘빈은 허릿심만으로 양손검을 탄력적으로 튕겨내며 베어냈다.
양손 무기라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쾌속의 베기.
리에르는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음을 깨달았다.
“크큭, 그래 처음부터 네겐 오싹함을 느꼈었지!”
부모들끼리 결정된 약혼을 거부하기 위한 지미의 여행.
엘빈은 남장한 제이미를 위해 반강제적으로 호위를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소문으로는 열등생이란 소문을 가진 아르빈트의 수치를 보게 되었다.
엘빈은 로이스타를 보고 경외감을 느꼈다.
파에트를 보고는 넘어설 수 없는 재능을 느꼈다. 하지만 리에르를 보았을 때는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보기에는 그저 어리기만 한 소년이었다. 야생 동물과도 같은 본능 감각들은 경고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것이야말로 진실된 포식자라고.
“그래, 어쩌면 이런 것을 원했을지도 모르지.”
엘빈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리에르를 향해 묵직한 검격을 연신 날려대고 있었다.
공격을 받아내는 리에르가 타고 있는 말의 다리는 휘청거리고 있었다.
보통의 인물이 받아냈다면 말과 함께 베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공격이었다.
“여왕, 하나만 말하지.”
리에르는 엘빈의 거친 공격에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는 제이미와 이제 인접한 거리까지 닿아 있었다.
“네 몸뚱이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렌의 인재들을 얼마나 더 죽일 셈인 거냐.”
“뭐……?”
제이미는 분명하게 들려오는 리에르의 말을 듣고 동공을 열어 보였다.
모리스를 비롯한 칠검의 기사들은 어떻게 해서든 공주를 지키기 위해 검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흑기사들이 끝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네 형 대신 내가 혼을 내주지.”
엘빈은 광소를 터뜨리며 양손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대로 모든 전심전력을 쏟아서 일격에 내리칠 생각이었다.
리에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두 눈동자가 붉은 이체를 띄기 시작했다.
그의 등 뒤로 칠흑의 빛이 깃털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 인제 그만……!”
제이미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 칠흑으로 빛나는 날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생각했던 모든 것은 이제 의미가 없었다.
“이미 늦었다.”
피가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