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17)
레필리아 레소드-318화(317/398)
레필리아 레소드 318화
아르빈트의 남자들(8)
굉음으로 가득한 전쟁터에서 들릴 리 없는 작은 소음.
엘빈의 갑주가 종이 베듯이 잘려 나갔다.
잘려나가는 철의 갑주 사이로 붉은 혈선이 대각선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혈화 사이로 보이는 리에르의 붉은 눈동자.
그것은 기울어져 가는 엘빈의 상반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빈 트위아의 이름 기억하겠다.”
리에르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되도록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끝없이 막는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안 돼!”
제이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렸다.
이제 그녀를 지키는 기사들도 몇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에르는 직접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이고, 아버지와 깊은 인연이 있는 여왕이었다.
리에르는 상대가 원하지도 않을 최소한의 예우를 차리려 했다.
하지만 그때 갑작스러운 살기가 느껴졌다.
콰직!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핏빛으로 물든 양손검이 내리쳐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리에르의 머리 위에서 우뚝 멈추고 말았다.
칠흑의 커튼이 아른거리며 시전자를 보호하고 있었다.
리에르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자신을 기습한 상대를 바라보았다.
“엘빈, 안 된다는 것을 알면 물러섰다가 기회를 보는 것이 지혜야.”
“크큭.”
엘빈은 리에르의 말에 광소를 터뜨려 보였다.
그의 입에선 연신 피거품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미 핏발 선 두 눈동자는 생명의 위급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잘려 나간 갑주 사이로 보이는 선홍빛 핏물은 당장에라도 지혈을 하지 않으면 위험했다.
하지만 그의 시야에는 공포에 질린 제이미를 보고 있었다. 항상 그녀를 지켜왔다.
항상 그녀의 시선이 파에트에게만 머무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엘빈은 지금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어느 날 간신들의 음모로 아르빈트 가문이 실각하게 되었다.
파에트의 곁에 머무를 수 없게 된 제이미는 매일같이 시들어갔다.
혹시나 파에트가 없다면 자신의 자리가 커질 거로 생각했던 것은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안타까웠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파에트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엘빈만이 가능한 것이 있었다.
엘빈은 굽히지 않고 사력을 다해 리에르의 방어막 위를 때렸다.
칠흑의 커튼에서 전해지는 충격음을 보고 리에르는 차가운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엘빈도 알고 있었다.
리에르는 아직 완벽한 악마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
예전에 자신에게 목숨을 빚진 바가 있었기에 굳이 살수를 쓰지 않고 있었다.
방금도 일부러 엘빈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상처를 입힌 것이었다.
엘빈도 지금은 물러서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십일검 기사단에 몸담았던 엘빈은 나름 독보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건 파에트가 할 수 없는 범위의 일이었다.
“물러서, 엘빈.”
리에르는 다시 한번 말했다.
죽음을 흩뿌리는 칠흑의 마왕이 전장에서 안면이 있는 상대를 베지 못한단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전쟁터에서 적으로 만났다면 상대가 연인이든, 가족이든 베어 넘겨야만 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죽어간 이들에 대한 배려였고, 지금도 목숨을 불태우는 전사들에 대한 예우였다.
엘빈은 오열하고 있는 제이미를 보았다.
그녀도 엘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은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지금은 물러서야만 했다. 하지만 육체는 그렇지 않았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고 돌아설 수 없었다.
“팔검은 전원 이탈한다!”
엘빈이 소리쳤다.
그의 익숙한 음성을 들은 이들은 전원 명령을 전달하며 퇴로를 준비했다.
하지만 엘빈은 광소를 머금으며 리에르를 향해 멈추지 않고 맹격을 가했다.
“그런 건가.”
“그런 거다.”
리에르의 말을 엘빈이 받아친다.
거대한 양손 검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쾌검이 이어졌다.
그것을 받는 이는 묵직한 일격에 균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알아봐 줘서 고맙다.”
아르빈트 가문에 몰래 숨어들었을 때, 리에르는 곤란해졌다.
하지만 엘빈은 때마침 리에르의 존재를 감싸고, 모든 이에게 비밀을 엄수시켰다.
광란의 늑대가 하는 말을 어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리에르는 가족들에게 골치 아픈 문제를 넘겨주지 않을 수 있었다.
“나와 유트를 살려줘서 고마웠다.”
그때는 죽음 이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지독한 고통과 나락 속에서 설원에서 항전했다.
그의 곁을 찾아온 유일한 친우. 그리고 모든 이들과 대항해서 싸웠다.
결과적으로 엘빈에게 참패했다.
하지만 엘빈은 적혈의 악마를 죽였다고 공헌한 덕분에 더 이상의 추격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설원에서 분명히 죽을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친구인 유트마저도 목숨이 위험했다.
“어머니를 보호해 줘서 고마웠다.”
바람을 찢으며 날아드는 양손검에선 핏방울도 실려 있었다.
그것은 리에르 아르빈트의 혈흔이 아니었다.
이미 중상을 입은 엘빈의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네 목숨을 헛되이 하지 않을게.”
엘빈의 맹검이 드디어 칠흑의 커튼을 찢어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칠흑의 도신이 번뜩였다.
제이미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빌어먹을…….”
엘빈의 몸이 허물어진다.
“역시 아르빈트 가문이 싫다니까…….”
전쟁터에 태어나서 전쟁터에서 목숨을 다한 광기의 기사.
광란의 잿빛 늑대라 불렸던 팔검대의 영웅.
자신의 신념으로만 살았고, 누구보다 투박했으나 누구보다 기사도에 어울렸던 인물.
백주 대낮에 사악한 성주를 길거리에서 베어버린 알스터 만행 사건으로도 유명한 엘빈.
그는 전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아리아력 801년, 또 하나의 영웅이 전장에서 목숨을 다했다.
팔검대는 최대한 퇴로를 확보하며 후퇴했다.
그들은 주군의 죽음을 목도했으나 같이 죽지 못하는 치욕을 겪었다.
그들은 퇴각하면서도 너무 꽉 다문 입 사이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금 의미 없이 목숨을 버리느니, 꼭 살아남아 복수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하지만 공주를 지키던 칠검대는 대다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고 말았다.
여왕을 지키고 있었기에 그들은 끝까지 사투를 벌였고, 많은 적을 베었다.
분명 압도적인 인원이었지만 교단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리에르는 자신이 직접 무술을 테스트했던 인재들이 죽어 나간 것을 보고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여왕이라는 미끼를 잡은 이상 자신이 원하던 성검 발락시아를 취할 가능성은 커졌다.
자신의 아버지 로이스타 아르빈트는 절대 여왕 일족이 죽도록 내버려 둘 인물이 아니었다.
마왕이 아렌에 기습해서 여왕을 납치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대륙은 다시 큰 충격에 휩싸였다.
오대 강국 중 최강으로 손꼽히는 나라가 칠흑의 마왕에게 기습을 당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누구나 그런 식으로 당하면 힘을 쓰지 못한다.
아울러 또 다른 오대 강국 중 하나인 페리안도 교단의 기습적인 암살 특공에 큰 고비를 넘겼다는 소문이 파다해졌다.
그 와중에 제국이 교단에 의해 함락되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두 왕족은 힘을 합치려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늦은 상황이었다.
물밀 듯이 밀려드는 코스모스 교단은 제국의 황실을 침범했다. 그리고 도주하는 두 왕자를 붙잡아 즉결 심판을 내렸다.
대광장에 효수된 두 황자의 목은 오랫동안 매달려 있었다.
그것을 보고 감히 누구 하나 손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아직도 제국에 충성하는 이가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주군의 목을 보고도 거두지 못한다면 불충의 증거였다.
그렇다고 목을 회수하러 간다면 미리 준비되어 있던 정예병들에게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마지막 대원수인 불꽃의 여제 프레이야는 그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었다.
아직도 그녀를 따르는 세력들은 많이 있었고, 염화대 또한 강성한 힘을 갖고 있었다.
아울러 강철의 대제 이실렌과 룬 위시를 들고 있는 피스는 고국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제국이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페리안의 대군이 물밀 듯이 진군을 시작했다.
페리안은 나라가 생겨난 이후, 최초로 중앙 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총사령관인 아로운과 군사인 빅스터가 함께하니 그들의 진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북쪽에서 대치하고 있던 교단 세력의 국가들은 아주 잠시간 항전했지만 만 하루도 가지 못한 채, 전부 점령당하고 말았다.
페리안은 남진을 시작하여 인근 교단 세력을 전부 박살 냈다.
그리고 위기를 느낀 코스모스 교단은 오대 강국 중 하나인 용병왕의 루카스를 전면에 내세웠다.
페리안은 루카스 왕국이 2만의 대군을 일으키자 3만의 병력이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포진을 시작했다.
총사령관인 아로운 킴은 2만 군단의 지휘권을 빅스터 나이브만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1만의 군단을 이끌고 동진을 시작했다.
현재 대륙의 모든 움직임은 동쪽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은 모든 전란의 중심지였으며, 이 소용돌이의 가운데에는 칠흑의 마왕, 리에르 아르빈트가 있었다.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었다.
페리안, 로빈타, 루나레이크의 병력들이 전부 동진하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아렌 왕국이었다.
이 와중에 리에르는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아렌의 국경선에 다다랐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대로 제이미 여왕의 신변과 성검 발락시아의 교환을 요청했다.
“과연 어떨는지요.”
대답을 기다리는 리에르를 보며 금발 머리의 귀여운 소년이 입가를 비틀었다.
어느새 미카엘은 리에르의 군대에 합류한 상태였다.
이미 제국도 함락되었으니 그는 다른 볼일이 없는 상태였다.
“룬 위시를 찾지 못한 얼간이와는 더 대화할 필요가 없겠지.”
“애초에 그 룬 위시를 찾지 못한 얼간이가 제 눈앞에 있습니다만.”
미카엘은 빈정거리다가 리에르의 발차기를 복부에 얻어맞았다. 마치 둔기로 맞은 듯한 통증을 느끼며 미카엘은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천하의 수호신장을 상대로 이렇게 막대하는 사람은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다.
미카엘은 업신여김당하는 것이 굉장히 생소한 감정이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아나는 듯한 쾌락이 정신을 지배하였다.
“전갈이 올 때까진 기다린다. 그뿐이다.”
그렇게 말을 마친 리에르는 자리를 빠져나왔다.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 리에르의 뒤를 아르미안이 따라왔다.
두 사람 다 오래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멍청하니 상대의 서신만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그 질문부터가 넌센스야. 그분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가능해.”
리에르의 말에 아르미안이 대답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답변이었다.
리에르는 자기 생각과는 달리 아티팩트가 얼른 모이지 않자 불편함이 찾아 들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들과 힘을 합친다면 다섯 무구를 모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눈치 못 챌 테헤라자드가 아니었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관중으로서 만들어진 무대를 시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깽판을 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 가진 것은 문 리버, 그랜드 크로스 두 개뿐.”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랜드 크로스를 가진 것은 교단의 세 번째 적혈의 악마인 이프리타였다.
필요만 하다면 리에르는 그랜드 크로스가 서려진 그의 눈을 적출할 수 있었다.
“라파엘 그 머저리가 룬 위시를 되찾아올 가능성은?”
“마음만 먹는다면.”
라파엘은 강철의 대공 이실렌과 마지막 순백의 기사 피스 메이커가 가진 룬 위시를 추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지하지 못한 그는 일을 대충대충 처리하고 있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아. 무슨 짓을 해서라도 룬 위시를 찾아와.”
리에르의 말에 아르미안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렵지 않아.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투 헤븐이지.”
방심했던 때가 결정적인 기회였었다.
유트의 곁에는 많은 영웅이 붙어 있었다.
그중 두 번째 포스인 리즈 지센라이드까지 있으니 투 헤븐을 빼앗는 일은 어렵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전부 내 것이 될 거야. 그 시간이 빠르냐. 늦냐의 차이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