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18)
레필리아 레소드-319화(318/398)
레필리아 레소드 319화
아르빈트의 남자들(9)
“후회하지 않니?”
“교단의 선지자께서는 참회 기도도 받아주시나 보지.”
아르미안의 말에 리에르는 차갑게 조소를 머금어 보였다.
“하지만 모든 구정물을 뒤집어쓰는 대신에 인류의 멸종을 막을 수 있잖니.”
테헤라자드는 이제 완벽하게 미쳐 있었다.
그는 마치 게임을 즐기듯이 현재 운영되는 세계를 전부 소거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재미가 없으니까.
새로운 재미를 위해서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운영해 볼 가치가 있었다.
엘 파실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절대자인 신에게 도전하기 위해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려 하였다.
그는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해 모든 시스템을 리셋시키려 하고 있었다.
“인류를 운운할 정도로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은 안 하는데.”
“그렇게 자책할 필요 없어, 리엘.”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곁에 다가와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의 어깨가 차갑게 식혀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온기를 품지 않은 몸.
죽음이 깃들어진 육체는 점점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슬슬 마력이 떨어질 때가 되었던가.”
리에르는 자신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아르미안의 손길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아르미안은 포스처럼 강력한 마력을 받지 못한다면 육체를 유지할 수 없는 몸이었다.
리에르는 천천히 아르미안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르미안은 힘없이 그의 손길에 이끌리듯 안겼다.
리에르는 그대로 아르미안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차갑게 식은 입술의 끝으로 촉촉한 온기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입맞춤인 것을 알았다.
그 어떤 열정도 실리지 않은 스킨십에 쾌락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마치 배터리처럼 충전되는 몸은 질력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리에르와 키스가 가능했다.
만약 이런 몸이 아니었다면 그와 이런 관계는 불가능했다.
아주 짧은 입맞춤. 텅 비어 있던 몸에 마력이 감돌기 시작하자 아르미안은 눈가를 열어 보였다.
멀어지는 리에르의 얼굴을 보면서 아르미안은 살짝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평소라면 이 이후의 무언가가 존재해야만 했다.
뜨겁지는 않지만, 그와 관계가 가능한 유일한 때였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아르미안의 표정에 리에르는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리에르는 천천히 자리에 일어섰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리에르를 보며 아르미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리에르는 아르미안이 손목 소매를 붙잡자 잠시 멈추어 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아르미안의 표정이 보였다.
아무것도 가려지지 않은 아르미안의 표정은 신문지를 구긴 듯이 보였다.
“용무가 더 남은 건가?”
리에르의 무미건조한 말에 아르미안은 천천히 손을 놓았다.
풀려난 그는 거리낌 없이 막사 밖을 나서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연심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난 에레사 레이나드가 될 수 없겠어.”
뜬금없는 아르미안의 말.
“난 한 번도 네 보호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신의 저주로 인해 아르미안은 일그러졌다.
그 일그러짐은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파멸로 이끌게 했다.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바쳐도 넌 나를 이용하고 죽인 것 이외에 없으니까.”
“가증스럽군그래.”
리에르는 차갑게 비웃었다.
사랑이란 이름 때문에 여러 사람을 파멸로 몰아간 인물치고는 싸구려 감성을 팔아대고 있었다.
“너 역시 나처럼 저주받았어, 안 그래? 네가 사랑하는 이는 항상 파멸했으니까 말이야.”
아르미안은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천천히 목을 풀어 보였다.
“물에서 구해줬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란 건가? 마력을 채워줬으니 이제 성욕도 채워달라는 거야?”
리에르의 힐난. 아르미안은 자신도 모르게 독설을 내뱉는다.
“네 다정함은 언제나 에레사에게만 특별하구나.”
“적어도 이거 하나는 확실하지. 넌 나에게 특별할 리가 없다는 것을.”
리에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르미안에게는 가시가 되었다.
“그래, 잘 알고 있어.”
아르미안은 서운함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애초에 리에르의 인생을 바꿔 버린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변명이 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린 인물은 다름 아닌 리에르였다.
자애로운 여신에서 타락한 어비스의 창녀로 뒤바뀐다.
그 고통은 리에르로선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다.
“넌 여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독이니까.”
리에르의 손이 그대로 아르미안의 목을 붙들었다.
한 줌밖에 되지 않는 가냘픈 목은 그대로 힘을 주면 꺾어질 것만 같았다.
아르미안은 고통스러운 얼굴 대신에 차갑게 내뱉었다.
“그때 날 죽인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 이번에 죽이면 이유만이라도 알려주겠어?”
아르미안은 리에르를 똑바로 바라보며 힐난했다.
차가운 독설과 냉소. 리에르는 코웃음을 치면서 아르미안을 밀어냈다.
“아티팩트가 전부 모이면 알려주겠다.”
리에르의 말에 아르미안은 코웃음을 쳐 보였다.
“리엘, 너에겐 나밖에 없어. 이제 순순히 인정해. 네가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지금 이 순간에도 너에게 한 줌밖에 남지 않은 생명은 널 난도질하고 있지. 그래, 솔직히 인정하겠어. 난 내 것이 필요해. 그 소유물이 너이길 원하는 마음이 강하지. 무엇보다 에레사 레이나드와 너는 절대 이어질 수가 없잖니?”
아르미안의 말에 리에르는 서서히 살기를 피워 올렸다.
지금 에레사는 교단에 있었다. 이번 원정길에 에레사도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었다.
하지만 리에르는 애써 그녀를 두고서 혼자 출정했다.
자신의 아이를 밴 에레사를 보니 리에르는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사랑스러운 그녀를 바라보면 그저 행복한 감정밖에 전달되지 않았다.
리에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에레사는 죽는다. 그릇에 수용량이 넘치면 그 안에 담겨 있던 것은 흘러넘친다. 혹은 그릇을 깨부수고 넘치게 된다.
에레사는 그저 보통 사람에 불과했고, 포스의 마력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을까?
리에르와 에레사의 아이는 미성숙한 상태였다.
10개월이 지나서 이미 출산을 해야 했을 에레사는 만삭조차 되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이가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단 하나를 의미했다.
아이가 스스로의 존재를 거부하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에레사가 죽는다. 아이가 유산되면 에레사는 고통과 슬픔을 겪어야만 했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든 비극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네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받을 수 없을 거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네게 받아야겠다.”
리에르의 차가운 눈동자는 아르미안을 물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가 자신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하듯 보였다.
그때 막사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아르미안은 리에르에게 하려던 말을 못 하고 입술을 여미었다. 리에르는 드디어 기다렸던 전갈이 오자 입을 열었다.
“가져오라.”
안으로 들어온 병사는 집정관을 향해 군례(軍禮)를 행하며 보고를 올렸다.
리에르는 아렌 측에서 온 전서를 펼치며 안의 내용을 읽었다.
그의 옆에서 함께 내용을 본 아르미안은 격앙된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용 자체는 굉장히 단순했다.
-원하는 바를 얻고 싶다면 직접 오너라. 오늘 밤 7번 경계소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전서에 표기된 인장이 아니어도 한눈에 알아볼 힘 있는 필체였다.
그것을 본 리에르는 입가에 웃음이 머금어졌다.
리에르는 이번에는 로이스타가 부드럽지 않을 것을 짐작했다.
아니, 아주 잠깐의 기회만 엿본다면 가문의 수치가 된 자식을 베어버리고도 남았다.
혈육의 정에 연연하기에 앞서, 그는 대륙 최고의 영웅이었다.
수많은 목숨과, 수많은 희망을 저버릴 만큼 냉정한 위인이 아니었다.
“어떻게 할 거니?”
아르미안이 리에르의 뒤에서 물었다.
“당연히 간다.”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지금의 리에르에게는 가장 두려운 상대일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히 봐주면서 싸울 수 없었다.
만약 혈투라도 벌어진다면 리에르도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는 자신의 목숨도 위험했다.
‘그래,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렴. 어차피 너에겐 나밖에 없어.’
아르미안은 점점 혈겁을 채워 나가는 리에르를 보며 그렇게 속삭였다.
* * *
밤이 될 때까지 별다른 일은 없었다.
아렌의 기사단은 몬스터 군대를 상대로 잘 싸워내고 있었다.
폭룡 네버 에이지는 매우 강력한 존재였다.
아무리 강력한 인간이 있다 해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존재를 이길 수는 없었다.
분명 아렌 왕국에는 로이스타 아르빈트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있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영웅이 존재했다.
압도적인 존재를 상대로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 성검 발락시아였다.
그 무엇도 잘라내는 빛의 검. 모든 언데드들은 그 검의 휘광만 바라봐도 무릎 꿇었다.
모든 거인은 그 검에 도려지기만 해도 쓰러졌다.
그것은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드래곤은 압도적인 마력과 군대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거대하고도 육중한 몸으로 하늘을 비상할 수 있었다.
마력으로 얼마든지 자신의 부하들을 제작할 수 있었다.
강력한 불꽃의 숨결로 지상의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에는 이유가 존재했다.
블루드래곤 카르샤.
폭룡 네버 에이지 같은 거룡은 아니었지만, 카르샤 역시 얼마 남지 않은 용족의 일원이었다.
전설의 백마법사의 연인이라 불리는 카르샤의 존재는 압도적인 전력 차를 충족시켜 주었다.
카르샤가 네버 에이지를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네버 에이지도 카르샤를 상대로 단기전을 꾀할 수가 없었다.
즉 카르샤는 시간을 끌기만 해도 충분했다. 이 시간에 아렌 왕국은 그대로 돌격했다.
드래곤이라는 상상 밖의 병기가 빠지자 전투는 압도적으로 바뀌었다.
여기에다 한술 더 떠서 전설의 마법사인 엘 파실드까지 아렌 왕국에 가세했다.
그에게 걸린 금술(禁術)은 어디까지나 코스모스의 교리를 따르는 이들에게 한해서였다.
사람을 잡아먹는 마수들의 진군은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용맹한 아렌의 기사들이 대륙 최강으로서의 자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서는 순백의 마법사, 엘 파실드가 온갖 술법을 화려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엘은 버프에 특화된 포스였다. 주로 전투 시에는 스스로에게 무한에 가까운 버프를 걸고 상대를 박살 냈다.
하지만 굳이 셀프 버프뿐만이 아닌 대중 버프에도 매우 능숙했다.
온갖 타격 버프와 회복 버프, 보호 버프를 가동한 엘 덕분에 아렌 기사단은 자신의 실력 곱절 이상을 펼쳐 보였다.
덕분에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전쟁은 이제 아렌의 승리로 뒤바뀌고 있었다.
폭룡의 군대와 아직은 치열한 공방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일까.
아렌 왕국의 군대는 섣불리 마왕의 별동대를 공격하거나 포위하거나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사정이 어찌 되었든 여왕을 구하기 위해, 혹은 신병 확보를 위해 마왕군을 포위해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하지만 그런 얕은수에 마왕이 걸리지 않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있었다.
아울러 리에르 역시 아렌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리에르는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평소 같다면 아르미안이 따라나섰다. 하지만 부자간의 만남을 방해할 권리는 없었다.
미카엘도 이번만큼은 리에르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에게는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리에르는 칠흑의 제복을 걸치고 집정관이 쓰는 가시면류관을 얹었다.
낮에 뜨거운 전투가 있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밤은 조용했다.
저 멀리서 보이는 횃불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쟁터이기에 삼엄해야 할 경계소는 인적 하나 없이 보였다.
마치 간밤에 전부 죽은 듯이 조용하고 인기척 하나 없었다.
리에르는 아무런 경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