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2)
레필리아 레소드-32화(32/398)
레필리아 레소드 32화
리에르와 유트(7)
퍽!
다시금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엘빈의 몸이 크게 앞으로 휘청거렸다.
공중에서 회전하며 제자리에 착지한 유트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진 엘빈을 향해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며 들어왔다.
몸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도 엘빈은 용케 유트의 검을 막아냈으나, 저절로 한쪽 무릎이 바닥에 꿇려졌다.
오늘의 두 번째 치욕.
그것을 생각하며 엘빈은 피가 새어 나오는 이를 사리물었다.
하지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유트의 대거가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목에 검을 들이대게 된다면 무조건 패배다.
어차피 자신이 내 건 공약에 따라 패배를 인정해야 하는데, 진짜로 당할 수는 없다.
“합!”
엘빈은 기합을 내지르며 유트를 걷어찼다.
복부를 걷어차인 유트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엘빈 역시 롱소드를 땅에 짚고서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엘빈은 가검으로 피해를 보고도 터프하게 달려드는 유트를 보며 난색을 표였다.
주심은 두 사람의 시합에 멍하니 포인트 계산도 잊은 채 서 있었다.
서로 난타전을 벌였으니 쉽사리 점수를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두 사람은 또다시 검을 비껴들고서 달려들고 있었다.
챙!
철과 철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지나쳐 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선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찌르고 들어갔다.
잠시간의 정적 끝에 엘빈의 검이 유트의 목을 겨냥해 있는 자세가 되었다.
엘빈은 한쪽 무릎을 땅에 굽힌 유트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유트의 오른손에 들려 쥔 검은 자신의 목을 언제라도 벨 수 있도록 잘 뻗어져 있었다.
서로서로 목에 검을 가져다 대는 형국이 되자 움직이지도 못하고 정지된 상태가 되었다.
주심은 차라리 잘되었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들끼리 겨루는 일반 검술대회이다 보니 포인트 제도가 있는 것인데 점수를 계산하기 어려운 시합이었다.
주심은 양손을 들어 두 사람뿐이 아닌 모두에게 들릴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외쳤다.
“무승부!”
관객들은 기가 막힐 정도로 피 튀기는 시합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구경 온 시간이 아깝지 않다는 듯이 환호성을 보냈다.
“이 괴물 같은 놈…….”
엘빈은 피로 젖은 입술을 벌리며 중얼거렸다.
유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 말에 대답했다.
“파엘 형 이후로 처음이군요.”
유트는 이렇게 고전을 한 상대는 파에트 이후로 처음이었다는 아주 건방진 소리를 하였다.
파에트 아르빈트는 십일검 기사단의 선두 기사단인 유격기사단의 단장이었으며 서열 1위의 실력자였다.
게다가 검의 실력이 해마다 향상되고 있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네 성장을 기다리는 것이 참 무섭겠구나.”
“오늘 당신과의 시합 덕분에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름이라. 과연.”
엘빈이 재미있다는 듯이 조소했다.
“너무 많이 놀았군. 애초에 점수를 한 점만 내도 패배라고 했는데, 이건 좀 심했군그래.”
“배운 게 많았으니 상관없습니다.”
유트는 두 자루의 검을 회수하며 유이와 리에르가 대기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건 누가 봐도 내 패배다. 기록해 둬라.”
“아, 알겠습니다.”
심판은 엘빈의 말에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엘빈은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제이미에게 걸어갔다.
엘빈은 검푸른 머리칼의 파에트와 은회색 머리칼의 유트를 동시에 떠올렸다.
‘세상에는 천재라는 녀석들이 오지게도 많군.’
엘빈은 멍하니 서 있는 제이미에게 조소하며 중얼거렸다.
“그렇죠?”
“응, 그러네…….”
절로 웃음이 나온 엘빈은 진행요원들의 부축을 거절하며 대회장 밖으로 나갔다.
“그럼……. 리에르 뒷일을 부탁한다.”
유트는 피곤한 기색으로 리에르에게 말했다.
유이는 자신의 오빠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부축하면서 의무실로 인도했다.
비록 진 것은 아니지만 천하의 유트가 상처를 입고서 의무실로 끌려가는 것은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다.
상대가 같은 학생이 아닌 현역 기사였는데 저 정도 부상만 입은 것이 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이제부터는 시합을 결정짓는 것은 리에르 아르빈트였다.
친구의 호투도, 흘린 저 피도 자신의 한 시합에 달려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짓눌려지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와는 반대로 제이미는 흥, 코웃음을 치면서 잘 만났다는 표정으로 리에르를 노려보았다.
잠시간의 시간 동안 유트와 엘빈이 흘린 피를 정리한 경기장에 주심이 자리를 잡았고, 마지막 시합을 선언하며 선수 입장을 외쳤다.
“리에르 따위는 박살 내 버려!”
리에르는 제이미의 등 뒤쪽으로 보이는 비계가 가득한 돼지 인간이 흥분한 것이 보였다.
“어, 쟤 왜 너희 팀에 있냐?”
“가다 주웠다.”
“저런 거 주워 오지 마. 아빠한테 혼날걸?”
“감히 날 혼낼 수 있는 것은 없다.”
제이미의 건방진 말에 리에르가 코웃음을 쳐 보였다.
관객들은 엘빈과 유트의 시합에 흥분해 있었다.
뒤이은 시합은 신검 로이스타의 제자와 신검 로이스타의 둘째 아들이라는 것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과연 검술을 잇는 자와 피를 잇는 자 중에 누가 승리할 것인가는 당연한 유흥거리라고 할 수 있었다.
“유흥이 아니라고 이쪽은…….”
리에르는 머리가 아픈 듯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기세등등한 제이미가 경기장에 올라서서 검집에 손을 대고서 자세를 낮추었다. 주심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제이미 선수, 아직 시작 안 했어요.”
“아, 네.”
“이봐. 그렇게 날 패고 싶은 거냐?”
리에르는 제이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주심에게 경고를 받고 자세는 풀었지만, 눈빛만은 당장에라도 피떡을 만들어 줄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리에르의 눈에 티미의 곁에서 자신을 걱정하며 쳐다보는 에레사의 눈길이 느껴졌다.
‘아, 어떻게 이 많은 사람 중에 네가 어디에 있는지 이렇게 쉽게 찾아지냐.’
차라리 그녀가 지켜보고 있지 않다면 부담이라도 덜했을 터였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두드려 맞는 것은 어렸을 적뿐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아르미안을 통해서 수련을 단단히 했다.
“시합 개시!”
주심의 신호가 떨어졌다. 사람들의 시끄러운 외침이 들려온다.
에레사는 양손을 가슴께로 모으고서 기도하고 있었다.
눈앞의 여자가 아닐까 의심되는 호모 녀석은 잡아먹을 듯한 기색으로 노려보고 있다.
리에르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유흥이 아니라고……. 이쪽은.”
리에르는 조바심이 일었다. 그도 그럴 듯이 관중들에게는 즐거운 볼거리에 불과한 시합이다.
하지만 이 시합은 유트의 명예와 생계유지가 걸려 있었다.
일부러 친구라는 명분 때문에 전력도 안 되는 자신을 한 팀에 끼워준 그였다.
아마도 유트는 부상 때문에 이틀 뒤에 있을 결승전에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우승은 못 하더라도 최소한 유트가 노력한 준결승만이라도 꼭 이겨야 했다.
아버지와 형의 검술을 사용하는 제이미를 상대로 하는 것은 지금껏 나약했던 스스로를 탈피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리에르는 주심의 준비 신호와 함께 스르릉, 가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제이미는 여전한 특유의 발도 자세를 취하고 어깨를 낮추어 보였다.
“근데……. 넌 왜 나를 그렇게 싫어하냐?”
제이미는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신에게 굉장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리에르의 입장에선 처음부터 지금까지. 까칠까칠하기만 하고 말 섞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상대의 반응이 납득 불가였다.
지금 리에르의 말을 듣고서 보이는 저 표정처럼 말이다.
“몰라서 묻나? 네 녀석 같은 하찮은 게 아르빈트 가문의 수치라고 생각한다. 검을 다루는 자 중 그들을 숭배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 그런데 네 녀석 같은 수치를 보니 참을 수가 없지……. 무엇보다 자네의 그 원숭이 같은 몰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리에르의 가슴에 콕콕 찌르고 들어왔다.
‘아, 유이 녀석도 나를 이렇게 싫어하진 않을 건데…….’
리에르는 중얼거리다가 생각해 보니 유이도 만만치 않게 자신을 싫어했다.
리에르라는 이름 대신 원숭이 녀석이란 단어가 입에 붙어 있는 꼬마 녀석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녀석도 그렇게 좋아 죽는 오빠를 부축하면서도 리에르를 연신 돌아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평소와 같은 표독스럽고 괴롭히려는 눈빛은 아니었다.
스스로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유이는 자신에게 꼭 이겨달라고 말하는 듯하였다.
리에르의 입가에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피식, 하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반응을 보고 제이미는 고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불만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나?”
“아니, 나도 아버지와 형에게 검술을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항상 가족의 그늘에 가려져 피해만 보고 살았지. 그런데 생전 보지도 못한 녀석이 아버지와 형의 검술을 사용한다? 내가 오우, 당신이 부럽습니다. 라고 할 것 같나?”
리에르는 눈을 지그시 감아 보였다. 항상 그녀와 함께했던 검의 호흡법을 기억하며 몸 곳곳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근력이 팽창하는 느낌이 들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상쾌한 느낌이었다.
리에르는 천천히 눈을 뜨고서 입술을 열였다.
“형과 아버지를 잇는 널 부숴주겠어. 그리고 무엇보다……. 계집 같은 몰골을 보면 혼내주고 싶은 가학성을 준단 말이지.”
“난 여자다.”
“어, 그래. 뭐?”
리에르는 무슨 말도 안 되냐는 표정으로 제이미를 바라봤다.
제이미의 차가운 눈동자가 리에르에게 쏟아졌다.
“그게 널 죽여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지.”
“어, 잠깐만? 나 네 알몸 본 기억이 있는데. 아무것도 없잖아!”
“유언이 그거뿐이라면.”
리에르의 말에 제이미는 노기를 띠며 눈가가 가늘어진다.
‘감히 아르빈트 가의 두 영웅을 욕했어. 그들의 피만 가진 쓰레기 따위가.’
제이미는 썩어빠진 리에르의 정신을 철저하게 두들겨 줄 생각이었다. 그것도 단 일격에.
“시합 개시!”
“하아압!”
제이미는 기합을 지르며 리에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너 따위는 로이스타와 파에트의 위명에 어울리지 않아!’
제이미는 지금껏 시합에서 보여준 이상의 속도로 달려들었다.
리에르는 보지 않아도, 대화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이미는 진심으로 아버지와 형을 존경하고 있었다.
노골적인 자신에 대한 적대. 정말이지 불쾌하고 기분 나빴다.
노골적인 가족에 대한 존경심. 정말이지 기쁘고 가슴 아팠다.
리에르는 제이미의 모습이 세간에 대한 자신의 평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지 모른단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검술대회에서 두각을 보인 이후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 변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아르미안을 만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다.
리에르는 마지막으로 검의 호흡법으로 후우, 숨을 들이켠 뒤에 내쉬었다.
“할 수 있을까요?”
제이미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리에르는 아르미안에게 스스로를 평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일단 이기고 나서 묻도록.
명쾌하고 빠른 대답이었다.
아르미안의 말은 리에르에게 언제나 이상할 정도로 믿음과 힘을 주었다.
그것이 단지 착한 거짓말을 한 것이라 하더라도 누군가가 믿어준다는 것은 기분 나쁜 것이 아니었다.
리에르는 롱소드를 말아 쥔 두 손을 들어 정면으로 향하였다.
“리에르…….”
에레사는 관중석에서 리에르의 시합을 지켜보며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녀는 리에르에게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변화가 꼭 좋으리란 법은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리에르가 상대하는 선수는 보통 실력을 지닌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곁에 있던 연인 티미 같은 실력자도 놀라워하고 있었다.
“선배 누가 이길 것 같아요?”
“미안한 말이지만…….”
티미는 미안한 말이라면서 표정은 웃고 있었다.
“네 친구에게 승산은 없어. 저 신검의 제자는 나 정도는 돼야 상대가 가능할 거야.”
냉정한 평가였다.
유트나 티미는 학원가의 최강자다. 말 그대로 리에르가 최강자가 아닌 이상은 상대할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1라운드도 버티기 힘들겠지.”
일격필살.
아르빈트 가문의 비검인 신검술. 그것을 의미하는 전광석화와 같은 발검 아래 많은 탈락자가 생겨났다.
그때 관중석에서 환호가 벌어졌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에레사는 깜짝 놀라 경기장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