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22)
레필리아 레소드-323화(322/398)
레필리아 레소드 323화
검은 동화 이야기(2)
로이스타의 손이 검을 훑어냈다. 그 순간 광활한 날의 색이 푸른색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순백에서 순청. 화려한 빛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보고 미카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불멸과 내 필멸. 누가 우위인지 확인해 보겠다.”
“네에?”
로이스타는 지치지도 않았는지 그대로 미카엘을 향해 검을 찔러 들어갔다.
미카엘은 다급하게 팔을 긴급 재생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불꽃 망치를 들고서 공격을 막아냈다.
“하하, 안 된다니까!”
미카엘은 푸른 검신을 막아내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검은 망치를 뚫고서 미카엘의 가슴에 박혀 들어갔다.
인간과 다른 바 없는 시뻘건 피가 튀었다.
미카엘은 불길함을 느꼈다. 그 불길함은 위험함을 전달했다.
미카엘은 리에르를 찾았다.
로이스타가 이렇게 성검을 들고 있다는 것은 리에르의 음모가 분명했다. 언제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리에르 아르빈트! 당장 나와요! 난 당신의 계획에 꼭 필요한 존재예요!”
미카엘은 자신의 찔린 부분을 중심으로 마력이 소멸하는 것을 느꼈다. 분명 처음 보는 감각이었다.
그것을 느끼자 미카엘은 명백한 공포를 느꼈다. 지겹디지겨운 영원불멸의 삶 속에서 처음 느끼는 인간적인 감정이었다.
“내가 없이는 당신의 계획은 실패하잖아요? 당장 나와요!”
미카엘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로이스타가 검을 그어 내릴 때마다 푸른 섬광이 허공을 태웠다.
미카엘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소리를 질렀다.
“하, 하다못해 당신에게라도……!”
미카엘은 동공을 뒤집었다. 차라리 마왕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좋았다. 그의 손에 능욕되고, 그의 손에 생을 맞이한다는 결말도 괜찮았다.
하지만 지금 복수를 갈망하는 이에게 복수 당하는 생을 원하지는 않았다.
아니, 애초에 살고 싶었다. 그 하나의 진실을 위해 여러 가지 거짓을 점철하였을 뿐이었다.
미카엘은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미 목은 제거된 상태였다. 머리 아래의 모든 몸은 이미 순청의 검기에 재가 된 지 오래였다. 이제 남은 것은 순수하게 머리 하나였다.
그 상태에서 미카엘은 머리를 회전시키고 있었다. 자존심 상하지만 그는 리에르를 찾았다.
그의 미친 계획에는 자신이란 존재가 필요했다. 그 이유는 테헤라자드의 네 마리 사냥개 때문이었다.
그들 넷이 모인다면 아무리 리에르라해도 힘들었다.
하지만 넷 중의 하나가 배신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미카엘은 자신의 동료들이 싫었다.
그것은 동료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서로 오랜 기간을 살아온 동료지만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미카엘은 아까부터 서둘러서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남은 마력들을 한없이 끌어모아 몸을 재생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와 동시에 동료들에게 현재의 좌표를 연신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도 오지 않았다.
미카엘은 웃음이 나왔다.
이미 이 경계소는 순백의 결계가 쳐져 있었다.
아주 강력한 결계였다. 그물망처럼 촘촘한 사슬로 연결된 마력의 가닥. 그 가닥 뒤에 다시 촘촘한 그물처럼 덧대어진 마력의 가닥들.
마왕 리에르는 이런 고위급 마법이 가능하지 않았다. 이런 것이 가능하다면 단 한 명의 존재만 가능했다.
‘엘 파실드!’
유일한 신의 대적자. 모든 마법의 군주이자, 첫 번째 포스.
‘감히 이딴 짓을 하는 건가요? 살려준 대가가 겨우 이딴 거란 건가요!’
미카엘의 눈동자가 증오로 번들거렸다. 푸른 섬광의 검신이 미카엘의 남은 머리를 깨끗하게 잘라냈다.
미카엘의 머리가 재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로이스타는 천천히 눈가를 여미어 보였다.
죽어버린 못난 아들에게 보내는 진혼곡.
“무구를 각성시키는 인간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미카엘이 죽자 순백의 마법사가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후드를 천천히 벗으며 엘은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청아한 그의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달랐다. 아주 많이.
“녀석은 어디에 갔소?”
로이스타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방금 전만 해도 푸른 섬광을 흩뿌리던 그였다.
그것도 수호신장이라는 지고의 괴물을 토막 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었다.
엘 파실드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정말로 그냥 인간일 뿐인지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스위치가 들어갔으니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겠죠.”
엘은 로이스타가 말하는 녀석의 행방에 대해 말했다.
엘은 굉장히 정확한 타이밍에 두 사람을 찾아왔다. 두 부자는 서로의 목숨을 갉아먹기 위해 검을 맞댔다.
하지만 로이스타는 진심으로 아들을 베지 못했고, 리에르 역시 패륜을 저지르지 못했다.
엘은 조소했다.
대륙의 모든 신뢰를 한 몸에 받는 남자와 대륙의 모든 저주를 한 몸에 받는 남자.
이 두 사람이 부자였다.
더 웃긴 것은 따로 있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 어떤 존재도 말살하고, 그 어떤 존재도 이용하는 것이 리에르라는 괴물이었다.
영웅왕 아리아였다면 로이스타를 주저 없이 베었다.
검은 사제 잉그리드였다면 로이스타를 현혹하고, 이용했다.
피의 황제 질 루드비히 오트리아였다면 기습했다.
칠흑의 늑대 펜릴이었다면 이미 로이스타를 분해해서 산채로 생고기를 즐겼다.
붉은 달의 헤임달이었다면 최강의 검과 전투하는 쾌락에 전율했다.
칠흑의 오딘이라면 아주 잔혹하게, 아주 잔인하게 소중한 것을 잃는 모습을 보여주며 나약함을 일깨워 주는 친절을 발휘할 터였다.
엘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이율배반.
칠흑의 마왕 리에르 아르빈트의 존재는 명백하게 일그러진 존재였다.
그가 살아온 삶. 그리고 겪었던 전생들은 하나같이 달랐지만 하나같이 똑같은 것이 있었다.
생에 대한 경시. 아니, 생에 대한 숭배라고 해도 좋았다.
타인을 죽임으로써 스스로 살아 있음을 느꼈다. 타인의 소중한 것을 빼앗음으로써 자신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엘을 돌아올 수 없는 수렁으로 빠뜨린 것 역시 리에르의 존재였다.
칠흑의 오딘은 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와 살아 있어야 하는 근간을 뒤흔든 존재였다.
그런 잔인한 살인마가 자신의 전생도, 자신의 강력함도 일깨운 상태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전의 광기를 보여야만 타당했다.
하지만 지금의 리에르는 그러지 못했다. 마치 스스로 순수했던 청년인 양, 마치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양 연기하고 있었다.
아니, 메소드 연기란 것이 있었다.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에 취해서 자신이 그 배역에 빠져드는 것을 말했다.
그들은 그 연기에 깊이 빠져 스스로가 그 존재가 된 것처럼 착각한다. 그리고 한동안 정신적인 질환에 시달리는 일도 있었다.
“자, 설명해라.”
로이스타의 손길에 따라 성검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끌어들였으니 자격은 충분하겠지.”
중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강건한 기운을 내뿜는 로이스타.
그를 보며 엘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 *
어떻게 시작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은 검은 구름에 속박되어 있었다.
한때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 존재했다. 똑같은 생명은 서로 다른 문화와 인격을 지녔다. 즉 경계가 존재했다.
그 문명이 사라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축을 울리는 폭음만이 요란하게 울렸다.
강렬한 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문명이 이룩한 거대의 유산도, 과거의 영광이 서려진 유물도.
곧 거대한 화염 폭풍이 밀어닥쳤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녹아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왜 모든 것이 지워지는지도 묻지 못했다.
세상은 그렇게 자신의 잘못으로 일그러졌다.
찬란한 문명이 존재했던 대지는 가라앉았다. 침수로 만들어진 퇴적층 위에 새로운 대지가 생겨난다.
생존자는 존재했다. 그들은 당장 생존을 위해 생필품 발굴했다. 어렵지만 살아 있는 누군가를 위해 구조도 하였다.
인류라는 이름의 생존자들은 낙원을 만들고 싶어 했다. 폐허의 대지 위에서 새로운 문명을 이룩하려 했다.
절대적인 불운은 반복되었다. 그들은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성공하지 못했다.
갖고 있던 생필품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꿈도 희망도 없는 땅이었지만 사랑을 했다. 종족 보존을 위한 책임 마냥 새로운 생명도 태어났다.
축복이 깃들지 않았다.
일그러진 괴물을 출산한 산모는 사망했다. 피막을 펼쳐 든 괴생명체는 자신을 낳아준 어미를 뜯어먹었다.
마치 곤충과도 같았다. 새로운 생명을 위해 자신의 육체를 제공하고, 새로운 삶이길 원해 에너지를 충족시킨다.
그것은 인육을 했다.
그것이 아니어도 이미 얼마 남지 않은 인류도 인육을 했다.
더는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아니, 먹을 것이 없어지게 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생존 인류도 다툼이 생겨났다. 그리고 죽어갔다.
방사능으로 인해 사람들은 철저하게 죽어갔다. 어린 소년도 죽음을 기다렸다.
소년은 그들에게 있어 식량과도 같은 존재였다. 소년과 같은 신세였던 아이들은 이미 잡아먹히거나 방사능으로 죽은 지 오래였다.
방사능으로 변이된 사람들은 말 그대로 괴물이 되었다. 비정상적으로 몸이 부풀어 오른 자, 비정상적으로 팔, 다리가 많아진 자. 하지만 변이된 자들도 생은 길지 않았다. 그것들 또한 죽어갔다.
운 좋게도, 혹은 운 나쁘게도 소년은 살아남았다. 그는 더는 자신을 가축 삼아 묶어 놓았던 어른들이 없음에 안도했다.
시커먼 하늘에선 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어둠으로만 가득했다.
소년은 멀거니 앉아만 있었다. 주변에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쓰러진 건물들에선 이끼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들의 사체는 서서히 백골이 되었다. 그리고 뼈는 점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소년은 굶주림 때문에 닥치는 대로 집어삼켰다. 이미 썩어 문드러진 시체도 언젠가부터는 만족스러운 음식이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더는 먹을 수 있는 시체도 없었다.
풀뿌리, 나무뿌리 하나도 보이지를 않았다.
소년은 점점 말라갔다. 하지만 더욱 메말라가는 것은 정신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소년은 문득 검은 하늘이 점점 걷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칠흑으로 물들어져 있던 검은 대지는 원래의 색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이 세상은 이제 소년만이 남았다. 소년은 한없이 달렸다. 소년은 한없이 걸었다.
소년은 한없이 헤엄쳤다. 소년은 한없이 잠들었다. 소년은 한없이 날았다.
아무것도 없는 대지 위에 오로지 단 하나의 존재만이 서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몸이 무언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방사능으로 인한 돌연변이. 그리고 유일하게 생존한 인류로서의 각성이 시작되고 있었다.
단 한 명만이 남았을 때 시작되는 오퍼레이터 시스템(Operator system)이 발동되었다.
소년은 다시 시작되는 지구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셀 수 없는 세월이 지나갔음을 느꼈다.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소년은 친구를 원했다. 자신과 함께 괴로워하고, 자신과 함께 기뻐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소년은 강하게 친구를 소원했다.
소년은 더욱 강하게 친구를 기원했다.
소년은 자고 일어난 어느 날 자신과 꼭 닮은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는 소년보다 훨씬 작은 생명체였다. 칠흑으로 빛나는 별을 닮은 눈동자.
막 빚어낸 밀가루처럼 뽀얗고 하얀 살결. 조그만 단풍잎 같은 손이 꿈틀거릴 때마다 소년은 새로움을 느꼈다.
친구가 생기자 소년은 더없이 행복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그 누군가가 옆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하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소년은 매우 신이 났다. 그리고 시스템의 운영권에 대해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식물을 꽃 피우기 시작했다. 이전에 기억하던 동물들을 하나, 둘씩 제조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어느새 스스로 걸어 다니고, 스스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여쁜 소녀로 자라난 아이는 소년의 곁에서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소년은 옆에 생긴 유일한 친구에게 힘을 얻었다. 단둘만이 존재하는 세상도 좋았다.
하지만 소년은 소녀에게 자신이 살았던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소년은 소녀만 옆에 있다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단 하나의 세상을 위해서 살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였다.
소년은 시스템으로 대륙에 종자를 뿌려냈다. 그리고 두 사람 이외의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숲이 생기고, 강이 생기고, 산이 생긴다.
수풀이 우거지고, 곤충들이 태어났다.
들판을 질주하는 짐승들이 보였다. 갖가지 종과 이름으로 불릴 그것들이 수북한 세상.
소년은 자신의 힘에 감격했다. 자신의 위대함보다는 옆에 있던 소녀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행복했다.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동물들과 함께 뒹구는 소녀의 모습은 가슴을 뛰게 했다.